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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페우스, 오르페우스, 오페라 하우스

호주 시드니 서큘러 키, 오페라 하우스-하버 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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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하우스를 감싼 시드니 만(서큘러 키 Circular Quay)의 공기는, 하늘의 물빛은, 노을의 농도는 바다의 향은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아마도 이런 이유들로 인해서 이곳에 오페라 하우스가 세워졌을 것이다. 무명 건축가 우트존이 오렌지를 까먹다가 뒤집어진 껍질의 형상을 보고 착안해 낸 이 건축물은 짓는데만 무려 16년이 걸렸고, 비용은 1억 200만 달러가 소요되었다. 시드니로 들어가는 교통의 요지이기에 환승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고, 덕분에 예술과 문화가 이곳에 몰려 있다.

바다소년

 

필름을 잃다

 

내 친구 정우는 그렇게나 많은 술자리를 거치고서도 단 한번도 필름이 끊긴 적이 없다. 정우의 꿈이 영화감독이라 그럴까. 나는 종종 필름을 잘라먹는 걸로 모자라, 잃어버리기까지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조각난 필름을 이리저리 붙이기도 하고 덕지덕지 편집해 보지만, 이미 내 기억은 블랙 아웃이다. 달나라까지 다녀온 것인지 택시비로 5만원이 지출된 적이 있는가 하면, 새로산 카디건은 또 어느집 개한테 덮어준건지 같은 옷을 두어번 사기도 했다. 심야 버스를 타고 종점을 순환해서, 탔던 장소에서 다시 내린 적도 있다. 이쯤되면 병인가 싶어 상담을 요청했다. 친구 좋다는 게 뭔가. 영화 공부를 십여년 째 하고 있는 필름의 제왕 정우를 찾아갔다. 나는 정우의 술잔에 소주를 가득 채웠다. 표면장력으로 오목하게 부푼 소주는 결국 넘쳐흘렀다. 이녀석의 필름을 조각내 주겠다는 나의 못된 속셈이 잔의 바깥까지 적셔냈다. 

 

"자, 건배."


나는 기필코 오늘만은 맨정신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했기에 딱 절반만 마셨다. 정우는 잔을 단번에 비웠다. 녀석, 오늘은 제대로 걸려들었다. 하긴 정우는 늘 나보다 술을 많이 마셨지. 


"마를 건(乾)에, 잔 배(盃). 잔을 말려야 안 되겠어?"

 

친구라는 족속들은 늘 술잔 걱정부터 해주는 사람들인 것이다. 술잔을 비워야 이야기가 진행된다. 한번이라도 넘어가는 꼴은 못본다. 


 "그나저나 내가 이상한거냐, 네가 이상한거냐."


윌 스미스라는 별명을 가진 정우는 커다란 눈을 부릅뜨곤, 두꺼운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뭐가?"
"어떻게 하면 필름을 안 끊어낼 수 있지?"
"롱테이크 만으로?" 


 녀석은 영화 얘기를 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


 "아니 술 말이다. 술만 마시면 기억을 잃으니, 이건 메멘토 급이다."


나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러자 정우는 두꺼운 쌍꺼풀이 더 커지게 눈을 지긋이 감더니, 충무로에서 이삼십년은 썩은 얼굴로 조곤조곤 이야기 했다.


"그런 감독은 없어. 아니, 그런 사람은 없지. 누구나가 술을 마시면, 아니 마시지 않아도 지난 밤의 일을 편집하기 마련이야. 술을 마시면 조금 더 과장되고, 혁신적이며, 거칠게 편집하는 거지."
"차라리 편집이라도 되면 다행인데, 나는 필름을 통째로 잃어버려. 제작자나 감독이 알면 큰일날 일이지?"

 "매장 당하겠지."


정우와 나는 열띤 토론과 토의와 구토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이 되어 기억해낸 것은 위의 이야기가 전부였다. 하는 수 없이 정우에게 전화를 걸어서 지난밤에 했던 이야기를 다시 들려달라고 생떼를 썼다.


"맨인블랙에서는 카메라 후레쉬에 노출되면 기억을 다 잃지,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선그라스를 쓰면 돼."


이건 무슨 윌 스미스 같은 얘기인가. 정우는 갑자기 전화를 끊었다. 나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정우에게 문자가 왔다.


"궁금하지? 지난 밤의 일이 죽을만큼 궁금하면 다음번에는 절대 안 잃게 돼. 필름을 말이다."


궁금하면 기필코 필름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말인가. 정우는 선문답을 펼치는 무림의 고수처럼 충무로의 그림자 속으로 쏘옥 들어가버렸다.


그나저나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우아하게 맥주를 마시며, 이런 기억은 왜 떠올리는 건지. 내일이면 또 다시 사라져버릴 이 나약한 필름 조각은 차르르르 소리를 내며 시시각각을 기록하고 있었다.

 

오르페우스 오르페우스 오페라 하우스

 

오페라 하우스를 본다는 기대에 신이 났지만, 막상 보고나니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너무 유명해져서 그런 것일까. TV에서 영화에서 책에서 인터넷에서 보았기 때문일까. 기술복제 시대에 들어서며 예술 작품의 고유한 아우라는 사라져버렸다. 물론 변형되어 나타난 형태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 감동은 복제 기술이 발전하기 이전보다 못하다. 모나리자를 직접 봤을 때도, 최지우 씨를 직접 보았을 때도 그랬다. 자주가는 카페에서 커트 코베인을 만난다면 모를까. 오페라 하우스 정도에 심장이 벅찬 시대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가보지 않고서도 그 현장성을 생생히 즐길 수 있으니 참 좋은 시대이기도 하다. 기술 복제는 양날의 검처럼 예술 작품의 구조를 변화시켜나가고 있다. 하지만 단 하나, 복제 할 수 없는 게 있다.  


오페라 하우스를 감싼 시드니 만(서큘러 키 Circular Quay)의 공기는, 하늘의 물빛은, 노을의 농도는 바다의 향은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아마도 이런 이유들로 인해서 이곳에 오페라 하우스가 세워졌을 것이다. 무명 건축가 우트존이 오렌지를 까먹다가 뒤집어진 껍질의 형상을 보고 착안해 낸 이 건축물은 짓는데만 무려 16년이 걸렸고, 비용은 1억 200만 달러가 소요되었다. 시드니로 들어가는 교통의 요지이기에 환승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고, 덕분에 예술과 문화가 이곳에 몰려 있다. 하버 브리지와 오페라 하우스 사이를 오고 가는 페리는 움직이는 예술 작품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하루에도 수만명이 다녀가는 이 공연장은 시드니의 상징일 뿐만이 아니라 인류의 위대한 문화 유산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지금 하버 브리지를 마주보며 오페라 하우스 바에 앉아 있다. 각국에서 온 사람들은 맥주를 마시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오페라'의 신이 이들의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것일까. 한때 유행했던 팝음악을 모두가 따라부른다. 나도 후렴 부분에서는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린다. 오페라 하우스의 마력은 밤이 깊어갈 수록 더 진해진다. 오페라는 독창, 합창, 관현악이 한 데 어우러지고 발레까지 참가하는 음악극이라 할 수 있다. 이태리어로 '작품'이라는 뜻을 가진 opus의 복수형이 opera인 것이다. 최초의 오페라는 <다프네>라는 작품이지만 악보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작품은 <에우리디케>다.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의 부인이 아닌가. 오페라하우스, 오페라하우스, 오페라하우스, 오르페우스! 입에 착 달라 붙는 조화로운 언어의 향연이 맥주 맛을 돋아준다.

 

오르페우스는 트리키아의 왕 오이아그로스와 칼리오페 사이에 난 아들로 아폴론에게 황금 리라를 전수받고 음악의 귀재가 된 신화 속 인물이다. 그가 연주를 하면 꽃과 나무, 심지어 돌맹이까지 춤을 추고 포악한 맹수도 강아지처럼 재롱을 피웠다고 한다. 오르페우스의 연주와 노래는 모든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그를 차지하게 된 행운의 여신이 바로 님프였던 에우리디케다. 하지만 양치기 아리스타이오스가 에우리디케를 쫓아다니며 끈질긴 구애를 던지는 바람에 에우리디케는 이리저리 도망쳐다녔는데, 그때 독사에게 복사뼈를 물려 죽게 된다. 지옥에 발이 묶인 에우리디케를 그리워한 오르페우스는 스틱스 강의 뱃사공 카론과 저승문의 입구에 있는 괴수 케르베로스를 리라 연주로 매혹시켜 지옥의 신 하데스를 만나러 간다.

 

하데스마저 오르페우스의 연주에 감동해 결국 에우리디케를 풀어주게 되는데, 한가지 조건을 건다. 지옥의 문을 벗어날 때까지 뒤따라오는 아내를 바라보면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에우리디케가 지옥문을 나서기 직전, 오르페우스는 아내의 얼굴을 힐끔 훔쳐보게 된다. 결국 지옥의 문은 닫히고, 오르페우스 홀로 지상으로 살아돌아온다. 충격을 받은 오르페우스는 여성들의 유혹을 모두 뿌리치고 소년과 동성애를 벌이기 시작한다. 감정이 상한 여인들은 광란의 카니발인 디오니소스 축제를 틈타 매를 들고 오르페우스를 찾아가서 때려 죽이게 된다. 시체는 산산조각이 나서 리라와 함께 강물에 던져지고 만다. 이 리라가 하늘로 올라가 별자리가 되었는데, 리라자리(Lyra, 거문고자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오르페우스는 하데스와의 약속을 왜 져버린 것일까. 아내를 지옥에서 살려내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도대체 왜 져버린 것을까. 100만장의 하얀 타일로 이뤄진 오페라 하우스에서는 오르페우스 역을 맡은 배우가 리라를 켜며 아리아를 부르고 있을 터였다. 오래된 팝송과 빛나는 별과 달링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리와 그 아래를 지나가는 유람선과 멈춰도 좋을 아름다운 이 순간이 점점 흐려지고 조각나고 있었다. 오르페우스는 도대체 왜 뒤를 돌아, 죽은 아내의 얼굴을 보았단 말인가.

 

바다소년

 

호기심 천국

 

오르페우스의 호기심은 무엇을 향한 것일까. 나도 알 수가 없다. 다만 추측컨대 리라연주는 그에게 전율과 동시에 고통을 주었을 것이다. 천재의 예술이란 황홀의 만찬이 아니다. 단명하고, 마약으로 굶줄이고, 사람에게 버림받고 죽어간 천재 예술가들을 일일이 들추지 않더라도 누구나가 예술의 이면을 감지할 수 있다. 삶이 그러하니깐. 예술은 삶에서 오는 것이니깐. 오르페우스에게 궁극의 리라 연주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자 나무기둥에 몸을 묶은 오뒷세이아의 모험과 같은 게 아닐까. 죽음의 얼굴, 죽음의 노래, 우리가 결코 알지 못하는 궁극의 세계에 대한 열망. 그것은 예술의, 아니 삶의 열망이다. 


영웅은 늘 호기심에 의해 비극을 맞이 하게 된다. 하지만 호기심 많은 족속이야 말로, 바로 우리 인간이 아니었던가. 나 역시도 궁금한 것 투성이다.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내가 태어날 때 어떤 모습이었고, 죽고 난 후에는 어떤 모습일지? 처음으로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의 기분은? 발밑엔 뭐가 있고, 하늘 위엔 뭐가 있을지? 지구는 자꾸 도는데, 나는 그것 때문에 돌겠는지, 이 사회가 불만이라 돌아버리겠는지.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맥주를 마시며 이런 생각 따위를 펼치는 나의 사유의 체계는 어떤 회로를 거치는지. 뇌의 구조는 어떻게 생겼는지. 믿음은 어디서 부터 우러나오는 건지. 나의 근원과 근원의 근원과 오래전부터 변하지 않고 나에게 내려오는 문명 이전의 DNA같은 것들은 무엇인지. 모두 궁금하다. 그나저나 만취한 다음날 아침, 전날의 기억이 궁금한 건 나뿐인가. 궁금해 미치겠다.


내 친구 정우는 삶의 단 한순간도 기억하지 못하면 안 되는 사람이다. 그러니깐 편집증적인 강박을 가진, 그래서 더욱 훌륭한 감독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여전히 필름을 끊어먹고, 잃기도 하겠지만 다른 어떤 호기심들로 무장해서 하루하루를 살아나가겠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는 죽어서 엘리시온이라는 낙원에 머문다고 한다. 유토피아는 라틴어 ou(없다)와 topos(장소)를 합친 말, 즉 없는 장소라는데, 신화는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신화는 결국 인간이 창조한 신들의 이야기다. 밤하늘의 별마다 이야기가 존재하고, 오페라 하우스에서 흘러나온 아리아는 별을 노래한다. 하버 브리지와 오페라 하우스와 밤하늘의 별을 삼각형으로 만들어 그 중심에 자리잡고 앉아있는 사람들이 눈앞에 있다. 티켓팅을 하려는데, 최초의 오페라 <에우리디케>는 이미 매진이다. 맥주를 다 마셨으니, 이젠 별을 마실 차례인가. 시원한 파도의 거품이 밤하늘 아래서 으스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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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소년의 포구이야기 오성은 저 | 봄아필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우리나라의 축복받은 자연환경은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아름다운 포구를 간직하고 있다. 마도로스의 아들로 부산에서 태어나 아직 청춘의 바다를 건너고 있는 젊은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여행은 그곳에 서서 잠시 읽어보는 것, 그려보는 것, 그리고 다시 되돌아오는 것이라고, 누구나 지금 당장 푸른 바다를 품은 포구를 향해 떠날 수 있다. 이들 포구로 향하는 길은 분명, 언제나 청춘 같은 삶의 힘찬 생명력을 발견하는 기쁨이며, 다시 삶의 소중함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바다를 통해 더 넓고 깊은 마음을 품게 된 자신을 발견하는 만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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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오성은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
씨네필
문학청년
어쿠스틱 밴드 'Brujimao'의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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