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쓴 산책에는 재미난 면이 있다. 인물이 진짜 그 길을 걸었든 꿈속에서 그 길을 걸었든 글자가 놓인 모양은 다를 바가 없으므로 책을 읽다 주의가 잠깐이라도 산만해지면 나는 진짜 산책과 꿈속 산책을 구분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내게는 그렇게 진짜 산책 삼기로 결심한 꿈속 산책 장면이 있다. 2022년 출간된, 외서로는 처음 편집해 본 소설인, 마이조 오타로 장편소설 『인간의 제로는 뼈』의 한 장면이다. 주인공 카오리는 새벽에 철로 산책을 한 적이 있다는 동생의 말을 듣고 꿈을 꾼다.
일출이 가까워지고 있지만 저항하는 밤 덕분에 하늘에는 암흑이 고여 부풀고 있다. 짙은 어둠 속, 불빛이 사라진 집들이 노선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벽처럼 늘어서 있어, 케이오타마가와 역의 플랫폼도 암흑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 올라가고 나서 안 사실이지만 발을 딛는 방법에 따라서 레일 역시 퐁! 하는 소리를 냈다. 평균대 같은 레일 위로는 역시 걸어가기가 어려워 나는 침목 쪽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침목도 나의 체중으로 인해 가라앉은 탓인지 세로축으로 살짝 기울어지며 밑에 깔린 자갈을 쟈앗 하고 누른다.
이런이런이런.
인간이 움직이면 뭘 해도 소리가 나게 되어 있다. (『인간의 제로는 뼈』, 14~16쪽)
꿈속이라지만 직접 겪은 일이라 하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생생하다. 내게는 이것이 카오리의 동생이 하였다는 산책과 전혀 다를 것 없는, 진짜 산책이다.
*
그렇다면 나도 한번 그렇게 해 볼 수 있겠다. 한 번도 걸어 본 적 없는, 어쩌면 영영 걸어 볼 수 없을지도 모를 곳을 글로 한번 남겨 보는 것이다. 이리 생각하고 나니 떠오르는 곳이 있다. 대학 졸업 후 6개월 동안 돈을 모아 떠난 남미 여행, 나와 친구는 칠레 국경 부근 도시 칼라마에 이틀 동안 머물렀다. 볼리비아로 넘어가기 위해 잠깐 체류하는 곳이었고 우리는 곧 국경을 넘는 새벽 버스를 기다리게 되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 갑작스레 한 남자가 5달러짜리 지폐를 들어 보였다. 방금 이곳에서 주웠는데 누구 돈 흘린 사람 없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또 다른 남자가 자기 돈인 것 같다며 지폐를 한번 봐도 되겠느냐고 물었고…… 그 뒤는 어떻게 되었더라? 지폐의 행방에 관한 기억이 없는 것은 작은 소동이 끝난 뒤 서 있던 자리로 돌아오자 배낭 위에 올려 두었던 나의 보라색 크로스백이 사라져 있었던 탓이다. 도둑맞은 가방에 들어 있던 것: 500달러, 카메라, 아이패드, 노트북, 아끼던 인형, 일기장, 주전부리 등.
친구는 어디로 사라졌을지도 모를 도둑을 잡겠다며 곧바로 새벽의 어두운 거리로 뛰쳐나갔고 나는 스스로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가방에서 몸을 떨어트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함께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 중 외국인 셋이 다가와 네 친구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도둑들이 총을 가졌을 수도 있다며. 그리고 달러 주인 타령하던 사람과 그에 동조하며 소란을 피웠던 자도 모두 도둑 일행일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현지인들에게 다가가 경찰에 신고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누구도 제대로 도와주지를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친구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손은 비었지만 친구의 뒤에는 열 마리쯤 되어 보이는 동네 개들이 신난 얼굴로 친구를 따라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와 있었다. 고요한 새벽 거리에 갑자기 뜀박질하는 사람을 마주쳤으니 개들로서는 그만큼 신나는 일이 또 없었을 테다. 긴박한 상황이었음에도 수많은 개들을 몰고 헉헉거리며 뛰어온 친구의 꼴이 퍽 웃겼다. 여권과 휴대폰을 뺀(다행히 이 둘은 복대에 따로 넣어 차고 있었다) 모든 물건을 잃어버렸으나 친구가 무사히 돌아온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국경 도시에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나는 숙소에 머물며 총 셋일 것으로 예상되는 도둑들의 흐릿한 얼굴을 떠올리고 저주를 잔뜩 퍼부어 주었다…….
글로 하는 산책이 진짜 걷는 것과 꿈결 속 걷는 것에 차이가 없듯 나는 그때 그 칼라마의 새벽 골목길을 글 안에서 산책해 볼 수도, 그리고 그것을 이렇게 써 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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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한다 하지만 나는 음식을 입에 넣기 훨씬 전, 그러니까 새벽에 산책을 나선다. 새벽 5시 무렵 집을 나서면 길 위에 사람은 없고 사람보다 일찍 잠에서 깬 개들뿐. 개들은 나를 알아보고 주위로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들로서도 혼자 거리를 떠도는 것보다는 다른 개들 그리고 이상한 인간 하나와 함께 북적북적 거리를 거니는 편이 하루를 시작하기에 더 나은 것이다. 마주치는 때가 많지는 않지만 새벽의 거리에도 사람이 서 있을 때가 아주 없지는 않다. 어스름한 시각 숙소를 찾는 관광객이 나를 알아챌 때면 그는 내게서 되도록 멀리 떨어지려고 한다. 내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움직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가 걱정하는 짓은 하지 않는걸. 나는 남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지 않는다. 떨어져 있는 것을 줍는 경우는 있어도 주인 있는 물건은 내 것으로 삼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나의 친구 서넛은 훔치고 빼앗는 일을 업으로 삼은 듯하다. 국경을 넘는 새벽 버스가 예정된 날이면 거리에서 그들을 마주치기도 한다. 또 가는 거야? 그러다 천벌받는다! 농담일 리 없는 말을 던지며 지나치면 그들은 이렇게 대꾸한다. 개 여자다 개 여자……. 그들은 내 말을 전적으로 농담인 줄 안다. 무엇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를 개 여자라고 부르는 이가 그들뿐만은 아니다. 새벽에 개 떼와 함께 동네를 거니는 사람이 흔한 풍경은 아닐 테니 나도 모르는 새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버린 것이다. 각인의 좋은 점이라면 이런 것. 아침이 밝아 올 때마다 첫 손님으로 찾는 샌드위치 가게에서 가끔 개들 몫의 샌드위치까지 내어 주는 것. 내 몫에서 조금씩 나누어 주는 조각들만 먹다가 가게 주인의 혜량으로 개들이 샌드위치를 덩어리째 먹는 날이면 날이 다 밝은 뒤에도 그들과 좀 더 걷는다. 햇살은 늘 좋은 편이다. 우리는 들판에 드러누워 다 함께 아침잠을 청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아침은 점심이 되고 점심은 저녁이 되고 저녁은 다시 새벽이 되어…….
가방 도둑맞기 며칠 전 보았던 아름다운 사막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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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제로는 뼈
출판사 | 민음사
정기현
2023년 문학 웹진 《Lim》에 「농부의 피」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걷고 뛰고 달리고 나는 존재들이 등장하는 소설집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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