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몸이 된 글, 몸부림으로써 글쓰기
나는 근래에 이토록 강렬하게 존재를 살려내는 글을 본 적이 없다.
글 : 한소범(한국일보 기자)
2025.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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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원씨는 어디로 가세요?』

유성원 저 | 난다


애초에 실패가 예견된 읽기, 그러니까 동일시가 불가능한 삶을 읽겠다는 시도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을까? 유성원 작가의 소설 『성원씨는 어디로 가세요?』를 읽으며 나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되는 독서를 하고 싶다고, 그리하여 실패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배제의 감각이야말로 이 소설을 읽을 독자에게 요구되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저지르는지도 모르고 저질러왔던 배제가, 이 소설에서만큼은 전복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나는 내가 읽을 수 없는 것들을 상상하며 이 책을 읽었고, 그 읽지 못함에 대해 쓰고 싶어졌다. 

 

소설은 작가가 독립출판으로 펴낸 『아무도 만나지 않고 무엇도 하지 않으면서 2014~2016』와 산문집 『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에서부터 이어져온 특유의 기록문학적 시선을 유지한다. 장르는 소설로 달라졌지만 여전히 화자인 성원씨는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느 새벽 찜방과 모텔, 공원 벤치, 풀숲에서 낯선 타인-남성들-과 만나고 헤어진다. 성원씨는 이들과 ‘섹스’하는데, 섹스라고만 눙치고 넘어가기엔 당연히 충분하지 않은, 구체적으로 항문과 성기를 운용하는 그들만의 방식이 있다. ‘외부’의 시선으론 가학적 변태 성행위처럼 보일지라도, 이들 사이에선 명백하게 약속-수행되는 행위다. (고백하자면, 소설에 나오는 각종 ‘플레이’들의 뜻을 검색하기 위해 자주 읽던 일을 멈춰야 했다.)

 

바깥세계는 헤테로들의 세계다. 이분법의 세계고 이른바 ‘정상성’의 세계다. 이들은 서로를 너무나 쉽게 발견하고 확인한다. 반면 이처럼 ‘밝은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모여드는 곳이 ‘찜방’이다. “찜방은 왜 어둡고, 어두우면 어떤 건 괜찮아질까?”라는 소설 속 질문은 어둠 속에서만 용인되는 세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어둠은 피부색, 나이, 염증, 바이러스 수치, 몸의 크기와 굴곡 같은 것을 흐린다. 바깥세상에서는 접촉조차 금기시되는 조건들이 이곳에선 괜찮아진다. 어둠은 감추는 동시에 허용하는 질서이고, 작가는 이러한 질서의 경계를 끊임없이 드러낸다. 

 

소설의 말미 성원씨는 HIV 검사를 받고 상담사와 대화를 나누는데, “(HIV) 양성이 나오면 어떨 것 같아요?”라는 상담사의 질문에 “설렌다?”고 답한다. 그러면서 HIV양성 판정을 받으면 ‘전파매개행위금지조항’에 맞서 소송을 하고 싶다고 덧붙인다. 에이즈예방법 제19조에 해당하는 이 조항은 HIV 감염인이 혈액 또는 체액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파매개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고, 같은 법 25조 2호는 전파매개행위를 한 사람을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법은 감염인을 타인에게서 분리시키려 하고, 성원씨는 자신의 몸을 통해 그 구분을 해체하고자 한다. 이 대목에서 소설은 한 인물의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것을 넘어 법적 현실을 향한 윤리적 도발로 도약한다. 

 

특기할 점은 이번 책에서 작가가 자신을 ‘게이’ 대신 ‘MSM(Men who have sex with men)’으로 정의한다는 것이다. MSM은 1990년대 HIV/에이즈 담론에서 사용되어온 분류로, 정체성 정치의 언어로는 환원되지 않는, 섹스라는 접촉의 조건에 기반한 분류다. 작가는 성정체성과 상관없이 ‘남성과 성관계하는 남성’이라는 실천적 분류를 통해 기존의 정체성 중심적 이해를 넘어서려 한다. 그는 이전 산문에서도 자신을 ‘예비감염인’으로 지칭했는데, 감염되진 않았지만 언제든 감염인이 될 수 있는 상태는 그가 추구하는 관계 맺기, 다시 말해 섹스를 통한 접촉이 감염 가능성으로 이어진다는 현실 조건을 회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가능성마저 끌어안고, 감염인과 비감염인의 경계를 지우는 행위로까지 나아간다. 

 

물론 이 과정이 자기 혐오라는 울퉁불퉁함 없이 매끈하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쳤을 때 병원에서 치료받지 못한 존재가 되는 일”, “눈을 마주치기 곤란해하고 밀폐된 좁은 공간에서 함께 숨쉬는 데 불편한 기색을 느끼게 되는 것. 보이지 않는 공기가 흘러갈 때 마치 무언가, ‘나쁜 것’이 실려 전해지거나 우리가 서로 섞일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시선은 돈이 있더라도, 직업이 있더라도 언제든 사람들로부터 배제될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틈입해온다. 하지만 그런 낙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더 적극적으로 ‘그런 존재 되기’다. 타인이 휘두르는 ‘편견’ ‘차별’ ‘혐오’ 따위를 이쪽에서야말로 더 적극적으로 휘둘러버리는 것이다. 미화하거나 에둘러 말하지 않고, 그래 나 이런 존재야, 심지어 이런 존재이기까지 해. 그래서 어쩔래? 하며 되묻는 것으로. 

 

그리고 이러한 되묻기를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방식은 당연히, 글쓰기다. 추천의 글을 쓴 김혜순 시인에 따르면 “그가 글을 쓰는 것은 내쳐진 이들(성소수자, 환자, 노인)을 향해 생존을 열어주려는 일종의 몸부림”이다. “글 쓰는 이유: 밤에는 내가 보고 있는 이 풍경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불빛들, 속도감, 사람 없음, 휘어지거나 직선으로 앞으로 달려나가지는 이 새벽, 밤을 사람들이 보고 싶어할 거다. 구체적으로 쓰라고 타인에게는 말했지만 구체적으로 말할 순 없어요. 이건 관계에 대한 이야기니까.” 말할 수 없어도 쓰여질 수는 있다. 그리고 쓰기는, 말할 수 없는 존재들에게 허락된 어쩌면 유일한 말하기 방식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데 기존의 언어는 충분하지 않아서, 작가의 ‘문체’ 역시 ‘이야기’의 일부가 된다. 문장과 다음 문장 사이에는 개연성이 소거되어 있고 질문과 대답은 따옴표로 구분되지 않아 마치 한몸처럼 보인다. ‘생각한다’고 쓰지 않고 ‘생각 당한다’고 쓰며 부정문을 한번 더 부정하면서 긍정으로 나아간다. 말할 수 없는 세계를 말하기 위해 문장은 때로 시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쓰기에 대해, 더 정확히는 쓰여지는 몸에 대해 생각했다. 글쓰기가 육체일 수 있다는 것을, 몸에 대해 말하는 것이 그 존재를 이렇게나 생생하게 그려낸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는다. 나는 근래에 이토록 강렬하게 존재를 살려내는 글을 본 적이 없다. 몸으로서의 글, 몸부림으로써의 글쓰기. 어쩌면 그건 “마음이 있으면 마음이 없어질 때까지” 애를 쓰면서, 몸과 마음을 분리하려는 처절한 시도로만 가능한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분리’는 밝혀진 적 없었던 것들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려는 불가피한 방식이다. 내가 이 소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내게는 읽기의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나는 초대 받은 적 없는 독자가 되어서야 비로소, 세계로부터 초대되지 못하는 상태에 대해 일말이나마 짐작한다. 그러니 작가가 “이야기를 안 하고 싶다. 내 이야기를 어디에도”와 “그런데 혼자라고 느끼면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서도, 끝내는 이 글을 써주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글쓰기가 자포자기의 결과물이 아니라 살아남기의 기술임에 안도하면서, 성원씨가 어디로 가든, 그 방향이 삶과 글쓰기의 방향이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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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원씨는 어디로 가세요?

<유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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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소범(한국일보 기자)

1991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국문학과 영상학을 전공했다. 발표된 적 없는 소설과 상영되지 않은 영화를 쓰고 만들었다. 2016년부터 한국일보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