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간다는 것 <노예 12년>
모든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어쩔 수 없는 노예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단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원고 마감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
2014.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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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솔직한 나의 생각을 쓰려고 한다. 모든 걸 부정하려는 의도도, 근거 빈약한 낙관에 기대려는 생각도 없다. 나는 단지, 이 글을 비관으로 점철된 글로 오해하지 말아주길 바랄 뿐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주로 한심할 정도로 우스꽝스러운 글을 써 밥을 먹는다. 이는 내가 글쓰기에 관해 품고 있는 철칙 때문이다.
간혹 직업상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하는 글이 있다. 그 중엔 저자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피해의식에 젖어 사회 부조리를 비판하는 형태를 빌리면서, 실은 자기 불만과 짜증만 쏟아놓는 경우가 있다. 아마 저자는 그 글을 쓰며 자기 내면에 있던 응어리가 원고지로 옮겨지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원고를 다 쓰고 나면 내면에서 냄새를 피우던 응어리는 완벽히 원고지로 분리수거 되어 있고, 어느새 스스로 정화된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 게다가 ‘원고’라는 유형의 산물까지 창조했다. 이것이 바로 사회 비판을 가장한 저자들이 고약한 책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 즉, 그 짜증을 독자들에게 전가하면서도 - 자신은 글을 쓰는 동안 하나의 해결점을 찾았다며, 그렇기에 글쓰기를 통해 ‘치유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아이러니다.
이런 저자들은 변명거리로 “판매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며, 자신은 오로지 “글을 쓰는 동안 누렸던 내면이 담백해지는 기쁨으로 만족했다”고 말한다. 이는 모든 글쟁이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이지만, 실상은 이 거대한 변명 속에 그들 자신을 편입시키는 행위에 불과하다. 엄밀히 말해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나 역시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이러한 심리를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글을 쓸 때마다, (기쁘면서도) 괴롭다. 가급적이면 이런 소재를 피하고, 다소 우스꽝스럽더라도 독자와 저자가 함께 웃길 바란다. 그 중에 약간은 생각해볼 거리가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물론, 아무런 사유의 여지가 없더라도 그걸로 충분하다. 하지만, 나는 <노예 12년>을 본 오늘만큼은 이런 생각을 접기로 했다. 하고픈 말을 하겠다.
모든 인간은 노예다. 이것은 나의 변함없는 생각이다. ‘아니, 매번 헛소리를 쓰는 작자 맞아?’라고 여긴다면, 이것 역시 나다. 나는 다만 사회적 원고를 쓸 때, 내가 관찰한 세계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 말을 아껴 왔을 뿐이다. 영화 <노예 12년>의 주인공 솔로몬은 원래 자유인 신분이었다. 그는 흑인 음악가로서 뉴욕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하지만, 어느 날 동료 예술가들의 꾐에 속아 만취한 후 깨어보니, 결박당해 있다. 그렇게 그는 납치당해 남부에 노예로 팔려간다. 스포일러라고 여길 수 없을 만큼 영화는 간단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모두가 생각하듯 그는 제목처럼 노예로 12년을 살아간다. 제목이 노예 12년이기 때문에, 우여곡절의 12년을 겪고 난 후엔 다시 자유인 신분으로 돌아간다는 것쯤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이렇듯 이 영화는 이미 제목으로 모든 것을 말해준다. 즉,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은 이야기의 결말이 아니라, 노예로 살아야 했던 그 12년의 과정이다. 그건 직접 확인하시길.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노예라는 것이다. 표면적인 노예는 남부의 흑인들이지만, 그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겼던 백인들 역시 노예다. 그들은 건장한 노예를 담보로 돈을 빌렸기에, 자신의 ‘법적 소유물을 폐기처분’할 수도 없다. 담보물이 폐기되는 순간, 빚쟁이가 된다. 그들 역시 자본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남부 목장의 주인으로 분한 마이클 패스벤더는 자본의 노예인 동시에, 자기 욕망의 노예로 살아간다. 그는 욕정을 품은 흑인 여자 노예 ‘팻시’ 때문에 안절부절 못한다. 그는 ‘팻시’ 때문에 아내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우스갯거리가 되지만 자신도 어쩔 수 없다. 주인공의 첫 번째 주인인 베네딕트 컴버배치 역시 자본의 노예이자, 동시에 ‘근사해 보이고 싶은 욕구의 노예’다. 즉, 영화에서 자유인임에 분명하고, 더 나아가 지배계급인 인물들 역시 실은 모두 무형의 사슬에 매인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서문에 글의 추를 무겁게 달아두었던 이유는, 이러한 현실이 단지 흘러간 역사의 순간에 박제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스크린에서 거두어 현실 세계로 옮기면, 인간 모두가 각자 처한 상황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 스마트 폰의 노예는 너무 사소한가. 약정의 노예 역시 귀여울지 모른다. 만약, 주택 계약의 노예라면, 대출의 노예라면, 담보의 노예라면 조금 무거운가. 스스로 설정한 목표의 노예라면, 꿈이라는 미명의 노예라면, 근사함의 노예라면, 명예의 노예라면, 아니, 성욕의 노예라면. 그것이 자발적이었든, 생물적이었든, 태생적으로 주어진 환경에 의한 것이든, 모든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어쩔 수 없는 노예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단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원고 마감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
물론, 그 어느 누구도 나를 윽박지르며 원고를 쓰라고 한 적은 없다. 모든 원고는 청탁을 받은 것이고, 그 청탁은 내가 수락한 것이다. 하지만 그 원고를 쓰기 위해 나는 약속이행이라는 보이지 않는 밧줄로 내 자신을 의자에 묶은 채 온종일 모니터와 씨름한다. 눈을 뜨면 그날의 원고를 마감하고, 온종일 지친 뒤에 노동자처럼 한잔을 마신 후에 겨우 잠이 든다. 다음날 눈을 뜨면 전화기의 일정관리에 저장된 원고 마감 시간을 보고, 또 하루 종일 내 몸을 의자에 결박한다. 외부의 제안에 손잡은 내면의 욕구가 내 몸을 자발적 노예상태로 내민 것이다. 다소 격한 표현이긴 하지만, 이런 딜레마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하나 둘 쯤은 겪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즉, 현대사회라는 거대한 틀에서 원자에 불과한 개인은 어쩔 수 없는 노예상태로 살아야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선까지 자발적인 종속을 택할 것이냐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욕구이며, 어디부터가 자신이 소화할 수 없는 종속인지 깨달아야 한다. 약속이라는 외형 역시 내부적으로는 그것을 이행하기 위해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일정기간 결박해야 하므로, 자기 내면의 거울을 꼼꼼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토록 산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예상태라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하나를 포기하면 그에 따른 자유를 얻는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면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다. 나는 비관할 생각도, 냉소주의자가 될 생각도 없다. 다만 현실주의자로서, 궁극의 자유는 죽음이후에야 얻을 수 있다고 여길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늙어가는 건 점차 휴식에 달하는 길이기에, 즉 궁극의 자유에 도달하는 과정이기에, 그것대로의 기다림이 가치 있다고 여겨진다. 살아가는 것에 비관할 필요도, 죽어간다는 것에 대해 절망할 필요도 없다. 삶에서 잃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순간을 냉철하게 관찰하되,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긍정의 면을 포착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루를 살았다는 것은 그만큼 자유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늙어가는 것도 반가운 일이다.
[관련 기사]
-가족제도에 대한 의문 - <셰임(Shame)>
-제약이 없는 규율 - <죽은 시인의 사회>
-인류의 미래 - <칠드런 오브 맨>
-보기 힘들어진 이야기의 원형 -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
-당연한 메시지가 이토록 반가운 세상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간혹 직업상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하는 글이 있다. 그 중엔 저자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피해의식에 젖어 사회 부조리를 비판하는 형태를 빌리면서, 실은 자기 불만과 짜증만 쏟아놓는 경우가 있다. 아마 저자는 그 글을 쓰며 자기 내면에 있던 응어리가 원고지로 옮겨지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원고를 다 쓰고 나면 내면에서 냄새를 피우던 응어리는 완벽히 원고지로 분리수거 되어 있고, 어느새 스스로 정화된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 게다가 ‘원고’라는 유형의 산물까지 창조했다. 이것이 바로 사회 비판을 가장한 저자들이 고약한 책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 즉, 그 짜증을 독자들에게 전가하면서도 - 자신은 글을 쓰는 동안 하나의 해결점을 찾았다며, 그렇기에 글쓰기를 통해 ‘치유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아이러니다.
이런 저자들은 변명거리로 “판매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며, 자신은 오로지 “글을 쓰는 동안 누렸던 내면이 담백해지는 기쁨으로 만족했다”고 말한다. 이는 모든 글쟁이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이지만, 실상은 이 거대한 변명 속에 그들 자신을 편입시키는 행위에 불과하다. 엄밀히 말해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나 역시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이러한 심리를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글을 쓸 때마다, (기쁘면서도) 괴롭다. 가급적이면 이런 소재를 피하고, 다소 우스꽝스럽더라도 독자와 저자가 함께 웃길 바란다. 그 중에 약간은 생각해볼 거리가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물론, 아무런 사유의 여지가 없더라도 그걸로 충분하다. 하지만, 나는 <노예 12년>을 본 오늘만큼은 이런 생각을 접기로 했다. 하고픈 말을 하겠다.
모든 인간은 노예다. 이것은 나의 변함없는 생각이다. ‘아니, 매번 헛소리를 쓰는 작자 맞아?’라고 여긴다면, 이것 역시 나다. 나는 다만 사회적 원고를 쓸 때, 내가 관찰한 세계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 말을 아껴 왔을 뿐이다. 영화 <노예 12년>의 주인공 솔로몬은 원래 자유인 신분이었다. 그는 흑인 음악가로서 뉴욕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하지만, 어느 날 동료 예술가들의 꾐에 속아 만취한 후 깨어보니, 결박당해 있다. 그렇게 그는 납치당해 남부에 노예로 팔려간다. 스포일러라고 여길 수 없을 만큼 영화는 간단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모두가 생각하듯 그는 제목처럼 노예로 12년을 살아간다. 제목이 노예 12년이기 때문에, 우여곡절의 12년을 겪고 난 후엔 다시 자유인 신분으로 돌아간다는 것쯤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이렇듯 이 영화는 이미 제목으로 모든 것을 말해준다. 즉,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은 이야기의 결말이 아니라, 노예로 살아야 했던 그 12년의 과정이다. 그건 직접 확인하시길.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노예라는 것이다. 표면적인 노예는 남부의 흑인들이지만, 그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겼던 백인들 역시 노예다. 그들은 건장한 노예를 담보로 돈을 빌렸기에, 자신의 ‘법적 소유물을 폐기처분’할 수도 없다. 담보물이 폐기되는 순간, 빚쟁이가 된다. 그들 역시 자본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남부 목장의 주인으로 분한 마이클 패스벤더는 자본의 노예인 동시에, 자기 욕망의 노예로 살아간다. 그는 욕정을 품은 흑인 여자 노예 ‘팻시’ 때문에 안절부절 못한다. 그는 ‘팻시’ 때문에 아내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우스갯거리가 되지만 자신도 어쩔 수 없다. 주인공의 첫 번째 주인인 베네딕트 컴버배치 역시 자본의 노예이자, 동시에 ‘근사해 보이고 싶은 욕구의 노예’다. 즉, 영화에서 자유인임에 분명하고, 더 나아가 지배계급인 인물들 역시 실은 모두 무형의 사슬에 매인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서문에 글의 추를 무겁게 달아두었던 이유는, 이러한 현실이 단지 흘러간 역사의 순간에 박제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스크린에서 거두어 현실 세계로 옮기면, 인간 모두가 각자 처한 상황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 스마트 폰의 노예는 너무 사소한가. 약정의 노예 역시 귀여울지 모른다. 만약, 주택 계약의 노예라면, 대출의 노예라면, 담보의 노예라면 조금 무거운가. 스스로 설정한 목표의 노예라면, 꿈이라는 미명의 노예라면, 근사함의 노예라면, 명예의 노예라면, 아니, 성욕의 노예라면. 그것이 자발적이었든, 생물적이었든, 태생적으로 주어진 환경에 의한 것이든, 모든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어쩔 수 없는 노예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단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원고 마감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
물론, 그 어느 누구도 나를 윽박지르며 원고를 쓰라고 한 적은 없다. 모든 원고는 청탁을 받은 것이고, 그 청탁은 내가 수락한 것이다. 하지만 그 원고를 쓰기 위해 나는 약속이행이라는 보이지 않는 밧줄로 내 자신을 의자에 묶은 채 온종일 모니터와 씨름한다. 눈을 뜨면 그날의 원고를 마감하고, 온종일 지친 뒤에 노동자처럼 한잔을 마신 후에 겨우 잠이 든다. 다음날 눈을 뜨면 전화기의 일정관리에 저장된 원고 마감 시간을 보고, 또 하루 종일 내 몸을 의자에 결박한다. 외부의 제안에 손잡은 내면의 욕구가 내 몸을 자발적 노예상태로 내민 것이다. 다소 격한 표현이긴 하지만, 이런 딜레마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하나 둘 쯤은 겪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즉, 현대사회라는 거대한 틀에서 원자에 불과한 개인은 어쩔 수 없는 노예상태로 살아야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선까지 자발적인 종속을 택할 것이냐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욕구이며, 어디부터가 자신이 소화할 수 없는 종속인지 깨달아야 한다. 약속이라는 외형 역시 내부적으로는 그것을 이행하기 위해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일정기간 결박해야 하므로, 자기 내면의 거울을 꼼꼼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토록 산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예상태라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하나를 포기하면 그에 따른 자유를 얻는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면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다. 나는 비관할 생각도, 냉소주의자가 될 생각도 없다. 다만 현실주의자로서, 궁극의 자유는 죽음이후에야 얻을 수 있다고 여길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늙어가는 건 점차 휴식에 달하는 길이기에, 즉 궁극의 자유에 도달하는 과정이기에, 그것대로의 기다림이 가치 있다고 여겨진다. 살아가는 것에 비관할 필요도, 죽어간다는 것에 대해 절망할 필요도 없다. 삶에서 잃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순간을 냉철하게 관찰하되,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긍정의 면을 포착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루를 살았다는 것은 그만큼 자유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늙어가는 것도 반가운 일이다.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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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이 없는 규율 - <죽은 시인의 사회>
-인류의 미래 - <칠드런 오브 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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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대자유인
2014.03.10
모든 인간은 저마다 자기의 고유한 성향과 기질을 가지고 있죠. 그것이 각자의 운명을 (이미) 결정짓는 가장 우선하는, 근원적인 인자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마저도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부여된 것이죠... 인간이 이룬 모든 정신적, 물질적 업적은 이 기원적인 물음 앞에선 모두 붕괴됩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다다른 자는 저마다의 취향대로 한 가지 믿음을 선택할 뿐인거죠.
nr56stp1oxfd7
2014.03.06
빛나는 열정
2014.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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