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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미래 - <칠드런 오브 맨>

칠순 전에 내 집 장만 좀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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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책상이 놓인 자리를 본 순간 직감했다. 그 자리에는 영감이 끊임없이 강림할 햇살이 내려오고, 바람처럼 밀려올 잡생각을 막아줄 나무들이 보이고, 평생 천 권은 쓰고도 남을 이야기꺼리들이 낙엽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

때는 서기 2027년, 인류 불임의 시대가 도래 했다. 인류 최후의 연소자 18세 소년이 사망하자, 영화 속 배경인 런던은 무간지옥이 된다. 후손이 없어 인류는 곧 멸망할 것이라는 자각을 한 시민들은 절망에 빠져 폭동을 일으키고, 이를 제압하고자 하는 정부는 군인들을 투입시켜 거리엔 피가 흐른다. 여기서 한 흑인여성이 인류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될 임신을 하게 되고, 이를 알게 된 과격 단체는 그녀를 자신들의 손에 넣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 영화는 이제 인류의 희망을 담보로 하여, 그녀를 보호하려는 자와 그녀를 앗아가려는 자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보여준다. 그리고 주인공인 클라이브 오웬은 살인도 서슴지 않는 과격단체의 추격을 피해, 한 집으로 피신을 하게 되는데, 그 집이 정말 멋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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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렇죠. 이번 회는 ‘부동산 특집’입니다. 눈치 채셨죠? 호호호. 어째서 <영사기(映思記)>는 영화칼럼이면서 매번 헛소리만 잔뜩 하느냐고 따지신다면, 이건 원래 이런 칼럼입니다. 말하자면, ‘영사기’는 ‘권위적이고 경직된 이 땅에 삼천포 문학의 중흥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탄생한 칼럼’으로서, 한동안 본심을 잃고 진지하게 영화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그 역시 모두 무용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기왕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온 이상, 이제라도 본격적으로 무용한 이야기를 잔뜩 하고자 합니다. 이래서 초심은 중요한 것이죠. 자, 그러면 본격적인 다른 이야기. 
 
영화 속에서 집을 소유하고 있는 인물은 6,70년대에 범죄 수사물에 잔뜩 출연한 마이클 케인인데, 최근 개봉작으로는 <나우 유 씨 미: 마술 사기단>에서 보험회사 회장으로 출연했다. 그래도 기억나지 않으신다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아무튼 마이클 케인은 영화에서 히피처럼 머리를 길게 기르고, 존 레논이 썼던 동그란 안경을 끼고 나온다. 영화를 보는 순간 ‘뭐야, 존 레논이잖아!’라고 누구라도 생각하게 될 정도다. 마침 그의 집에는 60년대 로큰롤이 흐르고, 집 한쪽에는 유리벽으로 마감이 돼 있어 햇살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들어온다. 그리고 그 햇살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는 녹색의 화분들은 죄다 대마초다. 그의 정체는 숲 속에 은신처를 만들어 대마초를 키우며 지내는 미래의 히피인 것이다. 그런데, 본시 히피들의 머릿속은 죄다 개성적인 사고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할 요량인지, 마이클 케인의 책장에는 각양각색의 서적들이 모자이크처럼 꽂혀 있다. 밤이 되면 유리로 마감된 집은 당연한 듯 깊은 어둠 속에 내려앉고, 인물들은 기다란 탁자를 하나 두고, 패브릭 소파에 널브러져 음악을 들으며 와인을 마신다. 이때는 대마초도 어둠 속에 달빛인지 실내조명인지 알 수 없는 빛을 받으며, 자연 속에 신이 심어놓은 듯 한 태초의 나무처럼 버티고 서 있다. 그 탓에 집은 집이 아니라 하나의 자연처럼 느껴지고, 집에 있는 사람들은 조형물 속에 들어간 인간이 아니라 자연으로 회귀한 태초의 인간처럼 느껴진다(과장이 너무 심했나요. 봐주세요. 요즘 글이 안 나와 미칠 지경입니다. 어제도 머리를 벽에 쿵쿵 박았습니다. 쿵쿵쿵).
 
다음날 마이클 케인과 클라이브 오웬은 한 책상 앞에 놓친 의자에 앉는데, 내 머릿속에는 그만 축포가 터지고 말았다. 펑펑펑. 내가 원했던 집필실이 바로 영화 속에 있었다. 당장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서 ‘어이. 감독 양반, 세트장 좀 소개해주게’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요즘 이 감독이 <그래비티>로 몸값이 올라갔고, 시차를 보니 미국에서는 잘 시간이라 참았다, 라기 보다는 전화번호도 모릅니다. 당연하죠(쿠아론 감독님 혹시 이 글 보시면 전화 한 번 주세요. 제 모든 소설의 판권과 앞으로 쓸 소설과, 시나리오와 아이디어를 세트로 묶어서 책상과 바꾸겠습니다). 나는 그 책상이 놓인 자리를 본 순간 직감했다. 그 자리에는 영감이 끊임없이 강림할 햇살이 내려오고, 바람처럼 밀려올 잡생각을 막아줄 나무들이 보이고, 평생 천 권은 쓰고도 남을 이야기꺼리들이 낙엽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 사실, 내가 60억 인구의 눈동자에서 폭포처럼 눈물이 쏟아질 위대한 작품을 쓰지 못하는 것도, 한국 삼천포 문학의 위대한 중흥을 실현하지 못하고 변방의 월세 집에서 글을 쓰며 월세독촉 문자에 시달리는 것도, 내 책이 출간과 동시에 폐기처분 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영화 속 저 집필실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 펼쳐진 그 풍경 속에 들어가는 순간, 나는 비록 미라가 될 지라도 백 시간은 꼼짝 않고 쓸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생겨났다.

 

어쩔 수 없는 영화 칼럼이니까 영화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솔직히 나는 엔딩 씬에서 힘이 빠져버렸다. 집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니고, 전쟁처럼 서로를 죽이던 인간들이 갑자기 아기가 나타나자 총을 내려놓고 모녀가 갈 길을 양보한다는 게 1차원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영화를 끝낼 것이었으면, 감정적 동화가 일어날 수 있도록 초반부에 좀 더 탄탄한 공사를 했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나저나, 이건 다 변방에서 이런 글이나 쓰는 내 생각이고, 일단은 지긋지긋한 월세집이나 탈출하자. 영화 속 자리는커녕, 아니 집필실은커녕, 칠순 전에 내 집 장만이라도 어디 한 번. 아니, 책도 안 팔리는데 내 집 장만은 무슨, 전셋집에서라도 살아보자. 그런 의미에서, 청와대에 드릴 질문 하나. 저어기, 전세 값은 언제 내려가나요?

  

 [관련 기사]

- 않더라도의 자세 - <머니볼>

- 그의 점진적 변화 - <우리 선희>

-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 - <관상>

- 영화로웠던 시간들 - <일대종사>

- 퍼시픽 림과 집필 로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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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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