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반주자가 아닌, 콜라보 아티스트라고 불러주세요
음악가들의 호흡과 교감으로 생명력을 얻는 음악, 반주자가 아닌 '콜라보 아티스트'로 불러야 하는 이유.
글 : 묘점원 (뉴스레터 '공연장 옆 잡화점')
2025.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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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최근 미주투어 소식을 알렸다. 뉴욕 카네기홀 무대에 8년 만에 다시 오르는 77세의 거장 정경화는 피아니스트 케빈 케너와 한국 투어와 미주 투어를 함께하는데, 그녀는 케빈 케너를 ‘영혼의 동반자’라고 부르며 깊은 음악적 유대감을 표현한 바 있다. 

 

피아니스트 케빈 케너는 쇼팽 콩쿠르 우승(1위 없는 2위) 출신으로 정경화와는 10년 이상 호흡을 맞춰 온 파트너다. 이번 투어는 정경화 바이올린 리사이틀이 아니라, ‘정경화 & 케빈 케너 듀오 리사이틀’이라는 이름으로 두 아티스트가 동등한 이름으로 무대에 오른다. 

 

이는 단순한 명칭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처럼 피아노 없이 연주되는 예외적인 레퍼토리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작곡가들은 독주 악기를 위한 작품을 쓸 때 피아노 파트를 함께 작곡해왔다. 따라서 무대에서는 독주자가 피아니스트와 함께 연주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이들을 대부분 ‘반주자(accompanist)’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용어는 피아니스트를 솔리스트에 종속된 존재로 인식하게 하며, 많은 연주자들이 이런 태도는 좋은 음악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반주 피아노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피아니스트, 제럴드 무어

 

독일 가곡의 전설,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의 반주뿐 아니라, 파블로 카잘스, 예후디 메뉴힌과 같은 기악 연주자들과도 협업한 제럴드 무어는 피아노 반주자의 위치를 솔리스트와 대등한 관계로 격상시킨 선구자였다. 1900년대 초반만 해도 반주자의 이름은 음반에 표기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제럴드 무어는 자신을 피아니스트로 표기해 주길 당당하게 주장하였고, 이 일은 반주자의 위치가 달라지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최초의 전문 반주자로서 활동한 무어는 1943년 발간한 자신의 저서 『부끄럽지 않은 반주자(The unashamed accompanist)』란 책을 통해 반주자의 음악적 삶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한때 반주자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악기를 들어주는 일종의 캐디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 그러나 몇 년의 작업과 경험을 통해, 반주자의 음악 인생이 얼마나 중요하고 흥미로울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하는지를 깨닫기 시작했다.”



 

한편, 요요 마, 이차크 펄만, 로스트로포비치 등과 협업한 피아니스트 사무엘 샌더스는 보다 진취적으로 반주 피아니스트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 나갔다. 그는 ‘협업 피아니스트(collaborative pianist)’라는 용어를 만들었고, 최초의 피아노 반주 학위 과정(collaborative piano program)을 만들었다. 그리고 줄리어드 음악원 교수로 합류하면서 피아노 반주 석사 학위 과정을 설립하였으며, 이것은 전세계 음악원에 반주 학위 프로그램이 개설되는 계기가 되었다. 샌더스뿐 아니라 현재, 많은 반주 피아니스트의 노력으로 반주 피아노 분야에 대한 인식은 많이 달라지고 있다. 

 

정경화, 요요 마, 이차크 펄만, 안네 소피 무터의 음악적 동지 

 

세계적인 음악가인 정경화, 요요 마, 이차크 펄만, 안네 소피 무터의 공연에는 음악을 함께 호흡해 온 피아니스트들이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이차크 펄만과 1991년부터 함께한 로한 드 실바, 무려 35년 넘게 안네 소피 무터의 든든한 파트너로 함께한 램버트 오키스, 1985년부터 요요 마와 30년 이상 호흡을 맞춘 리즈 콩쿠르 수상자 캐서린 스톳, 그리고 정경화가 ‘영혼의 동반자’라 부르는 케빈 케너까지, 그들은 단순한 반주자가 아닌, 함께 음악을 만들어가는 예술적 동반자로 활약해왔다.

 

최근에는 정경화&케빈 케너 듀오 리사이틀처럼, 피아니스트의 이름을 타이틀에 함께 올리는 공연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실제로 요요 마, 안네 소피 무터, 이차크 펄만 등의 공연 계약서에는 피아니스트의 이름 표기에 대한 명확한 지침이 포함되어 있을 정도다.

 

이들은 단순한 반주자가 아니며, 독주자와 동등한 위치에서 음악을 만들어가는 진정한 파트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을 ‘반주자’가 아닌, ‘콜라보 아티스트’, 혹은 ‘듀오 파트너’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할 때다. 

 

음악은 혼자 만들어지는 예술이 아니며, 음악가들이 서로의 호흡과 해석을 통해 음악적 교감을 나눌 때, 무대 위의 연주는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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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Unashamed Accompanist

Gerald Moore

출판사 | Testa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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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공연 기획사 '크레디아'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 클래식 공연 기획자들이 직접 무대 비하인드 스토리와 음악, 예술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