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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봄의 달빛이 어린 밤처럼…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e단조>
고향을 떠나는 스무 살 청년의 마음
이 곡은 강렬하지 않습니다. 약간의 우울함, 추억의 장소에 대한 회상, 달빛이 고즈넉한 아름다운 봄밤의 정취…. 말하자면 고향을 떠나 더 넓은 세계로 나가기로 마음을 굳힌 쇼팽의 심정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곡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혹시 당타이손(Dang Thai Son)이라는 피아니스트를 아시는지요? 베트남 출신인데 국적은 캐나다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1980년에 우승해 화제로 떠올랐던 인물이지요. 왜 화제였는고 하니, 1927년 막을 올린 이 국제 콩쿠르에서 아시아인으로는 당타이손이 최초의 우승자였기 때문입니다. 쇼팽의 고향인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5년마다 한번씩 열리는 이 콩쿠르가 명피아니스트들의 산실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지요. 당타이손 직전에(1975년) 우승했던 피아니스트는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직후에(1985년) 우승했던 피아니스트는 스타니슬라프 부닌입니다. 1960년대에는 마우리치오 폴리니, 마르타 아르헤리치 같은 피아니스트들이 이 콩쿠르에서 우승했습니다. 하나같이 쟁쟁한 이름들입니다. 그렇게 세계적인 스타들을 배출해온 쇼팽 국제 콩쿠르에서 당타이손은 우승뿐 아니라 3개의 특별상(폴로네이즈상, 마주르카상, 콘체르토상)까지 휩쓸었으니 화제가 될 수밖에요.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떠오릅니다. 지금은 어떤지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1980년의 쇼팽 국제 콩쿠르에서는 매우 공정한 심사가 이뤄졌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로지 실력으로 승부할 수 있는 ‘페어 플레이’ 시스템이 살아 있었던 것이고, 당시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피아니스트들도 ‘예술가의 자존심’이라는 중심을 잃지 않았던 것이지요.
저는 한 6~7년쯤 전에 당타이손과 저녁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는 연주회를 위해 내한한 차였고, 그날 식사 자리는 당시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강충모 교수(현재 줄리어드 음대 교수)의 주선으로 마련됐습니다. 두 사람은 쇼팽 국제 콩쿠르의 심사위원으로 만나 우정을 쌓은 듯했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저녁, 서울 서초동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 세 남자가 모였지요. 당타이손은 저보다 세 살, 강교수는 한 살 위였기 때문에,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마치 옛친구들이 오랜만에 만나서, 약간 수다스럽게 이야기꽃을 피우는 분위기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아주 기분 좋은 저녁 자리였지요. 여전히 자신의 오리지널 네임을 고집하고 있는 당타이손의 이름을 한자로 쓰면 ‘등태산’(登泰山)입니다. 그는 제가 가진 수첩에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썼고, 저는 태산에 몇 번이나 올라가 봤냐는 썰렁한 농담을 던지면서 화기애애하게 놀았지요. 제가 본 당타이손은 한마디로 착하고 따뜻한 사람, 남자라기보다는 거의 여성으로 느껴질 정도로 섬세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오랜만에 그와의 추억을 되짚어보는 까닭은 오늘 여러분과 함께 들을 음악이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 e단조>인 까닭입니다. 쇼팽의 피아노 음악은 예나 지금이나 당타이손의 변함없는 장기 중의 하나지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듣고 있는 음반도 당타이손의 LP입니다. 1992년에 폴란드의 바르샤바 필하모닉홀에서 녹음한 연주인데, 일본 음반사 빅터(Victor)에서 나왔습니다. 물론 이 음반을 추천음반 목록에 올리기에는 오케스트라 부분의 연주가 부족한 측면이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음반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당타이손과의 만남 이후, 가장 즐겨 듣는 쇼팽의 협주곡 음반 가운데 하나로 자리했습니다. 당타이손의 연주는 서정미가 정말 빼어납니다. 남자의 피아노 터치가 어쩌면 이렇게까지 섬세할까 싶을 정도입니다. 특히 1악장의 두번째 주제 선율, 또 녹턴(야상곡) 스타일의 2악장에서 보여주는 칸타빌레(노래하는 듯한) 풍의 선율을 듣다 보면 가슴이 아릿해지곤 합니다.
쇼팽(Frederic Chopin, 1810-1849) [출처: 위키피디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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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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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시대 작곡가 바흐부터 현대의 피아니스트 마리아 주앙 피레스까지! 인문주의자가 들려주는 음악가들의 생애와 시대 음악 담당기자이자 30여 년간 클래식 애호가로서 오랫동안 음악비평을 써온 저자가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통해 독자들에게 매혹적인 클래식 이야기를 펼쳐낸다. 기존의 클래식 교양서들에서 남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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