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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 직전의 유태인 피아니스트, 독일군 장교 앞에서 쇼팽곡 연주

쇼팽, 4개의 발라드(Ballades) 폴란드의 민족적이고 애국적인 열정을 형상화 절망 속에서 희망을 연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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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발라드’, 그중에서도 1번을 들으면서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피아니스트’(The Pianist, 2002)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배우 애드리언 브로디가 주연했던 이 영화는 독일 나치가 폴란드를 점령했던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요.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이라는 실존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쇼팽의 음악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발라드 1번이 연주되는 부분은 잊을 수 없는 명장면입니다.

2주 전에 쇼팽의 ‘녹턴’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발라드’입니다. 쇼팽은 모두 4곡의 ‘발라드’를 남겼습니다. 1831년부터 1842년까지, 그러니까 스물한 살부터 서른두 살 때까지입니다. 창작력이 가장 왕성했을 뿐 아니라 프랑스 파리에서 청년 음악가로 승승장구하던 시절에 작곡된 곡들입니다. 저는 2주 전에 “녹턴은 시적이고 영상적인 반면에 발라드는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썼습니다. “녹턴은 시적이고 발라드는 서사적”이라고도 했습니다. 오늘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발라드’에 대한 얘기를 풀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발라드’(ballade)라는 말은 오늘날 대중음악에서도 흔히 쓰입니다. 리듬보다는 선율과 가사를 더 중시하는, 템포가 좀 느린 러브송을 ‘발라드’라고 얘기하지요. 음악적으로 적확한 개념이라기보다는 ‘댄스음악’과 대비되는 표현으로 흔히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까지도 일상적으로 쓰이는 이 ‘발라드’라는 말은 언제 처음 생겼을까요? 사실 이 용어의 기원은 아주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발라드’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중세 시대였지요. 12세기에 프랑스 남부지방에서 불리던 음유시인들의 노래에 ‘발라드’라는 명칭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유절형식(有節形式), 그러니까 1절, 2절, 3절 식으로 노랫말이 여러 개의 절을 이루고 ‘르프랭’(refrain)이라는 후렴구로 각각의 절을 연결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노래와도 아주 흡사하지요.

발라드는 교회나 궁정의 음악이 아니라 민중이 즐겼던 ‘세속음악’이었습니다. 따라서 두가지 요소가 중요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아무 곳에서나 덩실덩실 ‘춤’을 출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고, 또 하나는 흥미를 끌 만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지요. 물론 중세 사람들이 발라드에 맞춰 추던 춤은 요즘처럼 템포가 빠른 춤은 아니었겠지요. 아울러 발라드 속에는 당대의 민중이 재미를 느낄 법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떤 이야기들이었을까요? 전설이나 신화, 민담 같은 것들이었겠지요. 또 빠질 수 없는 것이 남녀상열지사였을 겁니다. 예컨대 마님과 마당쇠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 같은 것들이었겠지요. 프랑스 남부에서 발생한 발라드는 영국과 이탈리아, 독일 등지로 점차 퍼져갑니다. 그 과정에서 ‘이야기’가 한층 강화되고 춤은 점점 소멸합니다. 그래서 결국 ‘발라드’는 어떤 이야기를 담은 시, 즉 담시(譚詩)라는 의미로 굳어집니다. 중세 이탈리아의 단테, 독일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면 괴테나 실러 같은 이들이 ‘발라드’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음유시인들의 노래에서 출발한 발라드는 ‘이야기가 담긴 시’로 이어졌던 셈입니다.


쇼팽(Fryderyk Franciszek Chopin) [출처: 위키피디아]

그러다가 마침내 19세기에 악기만으로 연주하는 ‘기악 발라드’가 등장하지요. 그 대표적인 음악가가 바로 쇼팽입니다. 물론 다른 음악가들도 종종 ‘발라드’를 썼습니다. 그러나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쇼팽이 남긴 ‘피아노를 위한 4개의 발라드’라고 해야겠지요. 가사 없이 악기만으로 연주되더라도 발라드는 여전히 발라드입니다. 그 핵심은 앞서 언급했듯이 ‘이야기’입니다. 쇼팽은 자신의 고국인 폴란드의 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1789~1855)의 시에 영감을 받아 4곡의 발라드를 썼습니다. 인터넷 여기저기에 이 시인과 쇼팽이 친구라고 소개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친구’는 아닙니다. 쇼팽보다 스물한 살 많은 미츠키에비치는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대표하는 민족시인이었지요. 폴란드 태생의 피 끓는 청년이었던 쇼팽도 그의 시를 열렬히 좋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발라드 1번은 ‘콘라트 발렌로트’(Konrad Wallenrod), 2번은 ‘윌리스의 호수’, 3번은 ‘물의 요정’, 4번은 ‘버드리의 세 형제’라는 시에서 영감을 받아 쓰였습니다. 이곳에 그 시편들을 일일이 다 소개할 순 없지만, 폴란드의 민족적이고 애국적인 열정을 형상화한 ‘서사적 담시(譚詩)’라는 사실은 꼭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발라드’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음악입니다. 물론 시의 내용을 그대로 오선지에 옮겨놓은 것은 아니지요. 미츠키에비치의 시편들이 쇼팽의 음악적 감수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오늘은 4곡의 발라드 중에서도 특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1번 g단조’를 듣겠습니다. 이 음악은 쇼팽과 동갑내기 음악가였던 슈만의 극찬을 받았던 곡이지요. 20대 초반의 쇼팽에게서 느껴지는 애틋한 감수성, 아울러 청년의 뜨거운 열정이 함께 버무려진 절창입니다. 특히 맨 앞의 일곱 마디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양손을 모두 사용하는 느리고 장엄한 분위기의 서주가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세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발라드’라는 장르의 이야기적 특성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주는 첫 장면이지요. 1번을 여러 차례 들어 익숙해지면, 그 다음에 ‘2번 F장조’와 ‘3번 A플랫장조’, ‘4번 f단조’를 차례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영화 한 편을 이야기하고 글을 마치도록 하지요. 쇼팽의 ‘발라드’, 그중에서도 1번을 들으면서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피아니스트’(The Pianist, 2002)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배우 애드리언 브로디가 주연했던 이 영화는 독일 나치가 폴란드를 점령했던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요.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이라는 실존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쇼팽의 음악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발라드 1번이 연주되는 부분은 잊을 수 없는 명장면입니다. 제가 7년 전에 썼던 에세이의 한 대목을 잠시 옮겨봅니다.



영화 ‘피아니스트’(The Pianist, 2002) 中

  독일군이 점령한 페허의 바르샤바. 아사(餓死) 직전의 스필만은 폭격당한 빈집으로 숨어들지요. 구정물과 감자 두 개로 간신히 죽음을 벗어난 그는 도둑고양이처럼 주방을 뒤지다가 통조림 깡통을 찾아냅니다. 벽난로 옆에 놓여있던 부삽으로 깡통을 따려고 안간힘을 쓰지요. 그러다가 깡통이 데구르르 굴러갑니다. 그 자리, 깡통이 멈춘 자리에 한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독일군 장교 호젠펠트였지요. “여기서 뭘 하나?” 장교가 묻습니다. “깡통을 따려고…” 스필만은 죽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지요. “무슨 일을 하나?” 교사 출신의 장교가 다시 묻습니다. “저는…” 머뭇거리던 스필만은 “피아니스트였습니다”라고 ‘과거형’으로 답하지요. 물끄러미 스필만을 바라보던 장교가 한숨을 푹 내쉽니다.

  한겨울입니다. 스필만은 낡은 피아노 앞에 앉습니다. 호젠펠트가 “연주해봐”라고 말합니다. 굶주림에 두 눈이 퀭한 스필만은 곱은 손가락으로 ‘발라드 1번 g단조’를 연주하지요. 4분의4박자 느린 라르고를 힘겹게 짚어나가던 손가락이 점차 빨라집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클라이막스. 오른손의 화려한 아르페지오가 폭발하면서, 스필만은 억눌려왔던 음악가의 열정을 결국 터뜨리고 말지요. 그 다음날부터 호젠펠트는 스필만의 다락방으로 몰래 음식을 나릅니다. 러시아군에 밀려 철수하기 직전, 그는 ‘마지막 빵’을 스필만에게 건네며 외투까지 벗어주지요. “전쟁 끝나면 뭘 할거야?” “연주를 해야죠.” “이름은?” “스필만” “피아니스트다운 이름이네.”
쇼팽의 피아노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놓칠 수 없는 영화입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은 유대계 폴란드인 피아니스트입니다. 1911년 태어나서 2000년에 세상을 떴지요. 우리 나이로 아흔까지 살았습니다. 그런데 독일군 장교였던 호젠펠트는 어떻게 됐을까요? 스필만에게 몰래 밥을 날라다주고 외투를 벗어줬던 그는 연합군에게 생포돼 1952년 포로수용소에서 죽었습니다. 인생이란 그런 것인가 봅니다.

p.s. 체코의 피아니스트 이반 모라베츠(모라벡, 모라베크 등으로도 표기함)의 음반(Supraphon)은 쇼팽의 정수가 담긴 명연입니다. 국내에서 구매가 쉽지 않아 추천음반 목록에서 제외했습니다. 만약 이 음반이 눈에 띄면 망설이지 말고 선택하시길 권합니다.



아르투르 루빈슈타인(Arthur Rubinstein)/1959년/Sony(RCA)

루빈슈타인은 역시 쇼팽 연주의 달인이다. 적어도 쇼팽의 음악이라면, 그 어떤 곡이라도 루빈슈타인의 연주를 안 듣고 넘어갈 수는 없다. 그가 연주하는 4곡의 발라드는 템포와 루바토에서 매우 중용적이다. 전체적인 곡의 해석도 중립적이다. 로맨틱한 정감을 드러내되 너무 넘치지 않게 표현하고 있다. 루빈슈타인이 일흔두 살 때의 녹음이다. 어떤 이들은 청년 쇼팽의 기백과 열정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말년의 연주가 아닐까라는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우려는 첫 곡을 듣는 순간에 날아간다. 일흔두 살이 무색하게 파워풀하다.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Vladimir Ashkenazy)/1976~84년/Decca

쇼팽의 서정성을 전면에 내세운 부드러운 터치의 연주다. 발라드의 감성적 측면을 한껏 부각시키면서 매우 세밀하고 조심스럽게 음악에 접근해 나간다. 음의 텍스처는 두텁지도 얇지도 않은, 중립적 스타일을 지향한다. 다만 아쉬운 것은 다이내믹이다. 청년 쇼팽의 열정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아슈케나지의 연주는 2% 부족함을 남긴다. 하지만 이런 스타일의 연주도 쇼팽을 맛보는 레시피 가운데 하나임을 부정할 수 없다. 아슈케나지가 보여주는 나긋한 서정성을 더 극단으로 끌고 가는 피아니스트도 있다. 예컨대 베트남 출신의 당 타이손이 그렇다. 이런 계열의 피아니스트들은 쇼팽 음악의 여러 측면 중에서도 ‘여성성’을 극대화한다.


크리스티안 지메르만(Krystian Zimerman)/1987년/DG

딱 한 장의 음반을 추천한다면 바로 이것이다. 한국에서는 이 피아니스트의 성을 대개 ‘침머만’으로 표기한다. 하지만 폴란드 태생의 그는 여러 인터뷰에서 “지메르만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했기에, 이 자리에서는 그의 뜻에 따라 ‘지메르만’으로 표기한다. 쇼팽의 음악에 관한 한, 왕년의 대가가 루빈슈타인이었다면 살아 있는 최고의 연주자는 단연 지메르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연주에는 우리가 충분히 알 수 없는 ‘폴란드적인 그 무엇’이 존재한다. 테크닉과 감성은 물론이거니와 쇼팽의 삶과 음악 전반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오롯이 담긴 명연이다. 필청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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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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