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가 얼룩 개를 기른다고요? 정이현 소설가에게 어느 날 찾아온 강아지, 그 작은 돌봄과 애쓰는 마음을 연재합니다.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강아지, 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서로 적응해가는 이야기, <채널예스> 격주 월요일을 기대해주세요. |
사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것을 나는 일단 책을 통해 배웠다. 바둑이를 키우기 시작한 이래 틈만 나면 사 모은 관련서가 꽤 많은 이유다. 가장 자주 펼쳐보는 건 『반려견 행동심리학』(재지 토드 지음, 이윤정 옮김, 동글디자인)이다. '개의 행복을 위한 가장 과학적인 양육 가이드'라는 부제가 그 이유의 답이 될 것 같다. 언뜻 보면 이 문장은 모순으로 느껴진다. '행복'은 두말할 나위 없이 주관적인 개념이 아닌가. '가장 과학적인'이라는 수식과 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 미묘한 뒤섞임과 혼돈의 느낌은 가느다란 줄이 잔뜩 엉킨 목걸이를 발견했을 때의 감각과 비슷한 데가 있다.
저자인 재지 토드는 원래 평범한 심리학자였다. 여기서 '평범함'이란 '개 키우기와 상관없는 일상을 영위하던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어느 날 유기견 보호소에서 개 한 마리를 데려오면서 상상한 적 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 내가 그 많은 반려견 전문가들 중 하필 재지 토드에게 강력하게 이끌리는 것은 그의 직업이 (인간) 심리학 전문가인 까닭이 크다. 오랫동안 나는 '분석만이 힘'이라고 되뇌며 살아온 인간이었다. 모르면 두렵지만, 알면 그렇지 않다고 믿었다. 나는 바둑이가 종일 잠만 자는 것 같다 싶으면 이 책의 12장을 펼쳐 「반려견 수면의 비밀」 편을 찾아보았고, 바둑이가 엄청난 속도로 사료를 먹고 나서도 미진한 낌새를 보이면 11장을 펼쳐 「식습관의 과학」을 탐독했다. 그러면 뭐랄까, 그 잔뜩 엉켜버린 목걸이 줄이 조금씩 조금씩 풀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 '개의 행복을 위한 가장 과학적인 양육 가이드'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 내게 가장 절실한 단어는 '가이드'라는 걸 알게 되었다.
만일 누군가가 과거의 나를 찾아가 당신은 언젠가 반려견의 행복을 위한 과학적인 글을 쓰게 될 거라고 말한다면 나는 매우 놀라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지도 모른다. _『반려견 행동심리학』 20p.
나 역시 마찬가지다. 만일 누군가가 과거의 나에게 당신은 언젠가 한 손으로 반려견을 쓰다듬으며 또 다른 한 손으로 개 키우기에 관한 글을 쓰는 새벽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별 기이한 소리를 다 들었다는 표정으로, 아마도 이렇게 물었을 가능성이 크다.
"설마 지금 진짜 살아 있는 개 말씀이신가요? 인형이 아니라?"
사실 인형일 리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지금껏 동물이라면 인형조차 원해본 적 없는 인간이 바로 나였으니까. 재지 토드는 영국에서 만든 '브람벨 보고서'를 설명하면서 거기에 반려동물이 행복하려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다섯 가지 자유가 명기되어 있다고 말한다.
1. 갈증과 배고픔으로 고통받지 않고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을 자유 2. 신체적 불편함과 더위 및 추위로부터 안전할 자유 3. 통증, 부상, 질병에서 안전할 자유 4. 두려움과 괴로움에서 벗어날 자유 5. 정상적인 행동 표현의 자유 |
5번에는 '충분한 공간, 적합한 시설 그리고 동물이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라는 부연이 있다. 생략된 주어는 '보호자는'이다. 그것이 나를 지칭하는 것임을 언제쯤 0.1초의 지체도 없이 받아들이게 될까? 무엇보다 이 책이 내게 준 가장 큰 깨달음은 개는 개이며, 모든 개는 개별적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의 인간이 이 세상의 어떤 인간들과도 다른 개별적 존재인 것처럼, 바둑이 역시 이 세상의 어떤 개들과도 다른 개별적인 개이다. 그래서 나와 바둑이의 관계를 다른 각도로 전환해보기로 했다. 우리가 '인간 대표-개 대표'가 아니라 '개별적 존재 1-개별적 존재 2'라고.
그날은 대수롭지 않은 겨울 아침이었다. E는 늘 그렇듯 아침 7시가 넘자마자 부랴부랴 출근했고, 아이들은 평소보다 조금 늦잠을 잤다. 나는 정신없이 등교 준비를 도왔다. 한 손엔 밥숟가락, 또 한 손엔 머리빗을 들고서 물통을 챙기랴 양말을 꺼내랴 집 안 곳곳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따라 바둑이도 같이 뛰었다.
이윽고 아이들이 나간 집, 나와 바둑이만이 덩그러니 남겨졌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아이들을 배웅하고 현관 앞에 어지러이 널린 신발을 정리한 후, 마루와 연결된 중문을 열었다. 바깥 날씨는 영하였지만,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차갑지 않았다. 바둑이는 나를 발견하고 마루의 저쪽 끝에서 총총 달려왔다. 내 앞에서 멈췄다. 갑자기 자세를 낮추더니 제 몸을 발랑 뒤집었다.
내가 아무리 반려견의 정서와 행동에 일자 무식자라고 해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주춤주춤 손바닥을 뻗었다. 바둑이의 통통한 연분홍색 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강아지는 일어나려는 기척을 보이지 않고, 네 다리를 살짝씩 버둥거리기만 했다. 더 하라는 것 같았다. 부디 손짓을 그만두지 말라는 듯했다. 나는 아까보다 조금 더 천천히 바둑이를 쓰다듬었다.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순간이 이렇게 드러났음을 알았다.
내가 거실 테이블에 노트북을 펴고 작업을 하는 동안 어린 개는 30센티미터가량 떨어진 마룻바닥에 배를 보인 채 누운 자세로 혼곤한 아침잠에 빠졌다. 일하는 틈틈이 나는 곁눈질로 바둑이의 배가 규칙적으로 미약하게 들썩이는 모습을 보았다. 나로서는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바둑이는 이 집에서 누구보다 나를 가장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왜 하필 나일까? 내가 유난히 강아지 세계에서 통하는 외모의 소유자여서 그럴 리 없다. 열렬하고 요란하게 사랑을 표현하는 다른 세 명이 아니라,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모르는 나. 밥과 물을 주고 배변 패드를 갈아주는 나. 가장 오랜 시간 제 옆에 머무는 나를.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정이현(소설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수상작품집)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풍선』『작별』 등이 있다.
wanss77
2023.05.08
아! 격주 연재가 아쉬울만큼 또 2주를 어떻게 기다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