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스24][김해인의 만화 절경] 이거 읽고 그려
어느 날 만화의 신이 당신에게도 말을 건다면. 김해인 편집자가 만화를 그리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는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글 : 김해인
2025.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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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잘 안 봐요. 무슨 만화를 읽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라는 말을 듣고 당황했다. 당연히 만화를 안 보는 사람은 있다. 그러나 저 말을 한 사람은 만화를 그리는 분이셨다… 최근 만화 창작을 가르치는 강의자, 웹툰PD, 하여간 관련 업계에서 일하는 분들도 신인 만화가나 학생분들로부터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서 사뭇 놀랐다. 만약 작품을 감상하며 즐기기만 하면 되는 독자가 만화를 보고 싶은데 너무 많아서 어떤 것부터 보면 될지 모르겠다고 하면은 심혈을 기울여 추천해드린다. 평소에 뭘 좋아하시나요? 로맨스, 시트콤, 개그, 학원물… 아, 로맨스인데 주인공들이 사귀지는 않았음 좋겠다고요? 선생님 취향 참 고급스러우신걸… 애니메이션이 있어서 밥 친구로 볼 수 있으면 더 좋겠다고요? 그러면 선생님은 『월간순정 노자키 군』을 보면 됩니다. 재미없을 시 백퍼센트 환불해드립니다. (농담 아니라 위에 나열한 취향인데 『월간 순정 노자키군』 재미없으면 진짜 환불해드립니다.) 이러한 애프터서비스까지 하는 이유는 적극적으로 고객 유치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몸담고 있는 회사와는 아무 상관없다. 그냥 어느 날 만화의 신이 내게 말했다. “세상에 한 명이라도 더 만화 보게 만들어라.” “네.”) 


 

한편, 만화를 그리는 분들께는? 일단 누군가가 만화 잘 그리는 방법을 알려주면 사기꾼이니까 도망치시길 바란다. 그런 건 없다. 차라리 방이 조금 좁더라도 좋아하는 작품 전권을 책장에 꽂아두시길 바란다. (명작 만화에서는 방에 두기만 해도 만력이 높아지는 피톤치드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나도 만화를 잘 그리는 방법을 딱 잘라 이야기할 순 없지만 냅다 크로키를 하는 것보다 만화를 많이 보는 것이 몇 배는 도움된다고는 제법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겠다. 만약 도움 안 되면 환불해드리겠다. (근데 이 경우 뭘 환불해드려야 하지? 아무튼) 만화를 그리려면 만화를 많이 봐야 한다. 정말로 많이 봐야 한다. 어느 정도로 많이 보는 게 좋냐면 진짜 정말 엄청 열심히, 이 정도로 봐야 한다고? 싶을 정도로 보시면 좋다. (『바쿠만』에 나오는 천재 만화가 니즈마 에이지도 무려 두 작품을 연재하는 살인적인 스케줄 속에서 동료 만화가들이 어떤 걸 그리고 있는지 쫓으며 파악하고 있다. 얘 진짜 사랑스럽다.) 

 

어떤 거 볼지 고를 그 시간도 아까우니 그냥 아무거나 잡고 보셔야 한다. 뭘 보셔야 할지 모르겠다면, 보다보면 아시게 된다. 일단 그게 명작이든 똥만화든 직접 봐야 스스로가 뭘 좋아하는지 알게 되고, 내가 만들 창작물에 도움이 될 만화도 분간이 된다. 재밌을까? 없을까? 그건 그다음 문제다. 잘 만들어진 만화는 취향을 넘어선다. 절대 다수가 ‘ㅇㅈ’(인정)하는 만화는 취향에 안 맞더라도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는 알겠다’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납득시키는 힘이 있다. 오히려 그런 만화는 어떻게 설계되었는지, 컷과 대사는 어떻게 쓰는지, 주요 캐릭터들이 적절한 때에 등장하여 활약을 보여주는지, 늘어지는 부분은 없는지, 그런 걸 살피며 읽을수록 좋다. 물론 만화를 많이 안 보는데도 잘 그리는 사람이 있다. 믿기지 않지만 그런 신비로운 자가 존재하긴 하더라. 근데 그 사람이 본인일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 만화를 많이 보면 만화를 잘 그릴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이것만은 ‘절대’라는 말을 붙여도 될 만큼 꽤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잔혹한 현대사회는 꿈과 열정에 가득찬 인간에게 진득하게 만화책 볼 시간 같은 건 허락해주지 않는다. 시간은 금이라는 말만큼 이 미친 현대사회를 관통하는 말이 있을까?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하여튼 그 흘러가는 게 다 돈이랜다. 슬프게도 웬만한 사람들은 시간도 없고 진짜 돈도 없다. (왜냐면 만화 감상은 OTT를 보는 것에 비해 꽤 고가의 취미란 말이죠?) 그리고 이게 가장 큰 문제인데, 만화를 많이 봐야 하지만 만화 보는 데만 모든 시간과 공력을 꼬라박고 있으면 진짜 큰일난다… ‘작가’에겐 만화만이 아니라 세상을 두루 살피는 넓은 안목이 필수다. 잔인한 현대사회, 한정된 재화. 그러나 이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만화를 그리고 싶은 보석 같은 마음을 위하여 ‘이 만화는 꼭!’이라 할 수 있을 만한 작품을 몇 가지 소개해드리고자 한다.

 


『강철의 연금술사』는 만화를 가르치는 분, 만화 평론가, 웹툰PD, 현역 만화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 작품이었다. “이거 안 읽었는데 만화를 그리겠다고…? (이하 생략).” 만화를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모르겠으면 『강철의 연금술사』 1화를 보고(1권도 아니다. 1화만 봐도 된다.) 그대로 따라 그려보면 좋겠다. ‘소년만화’라는 교과서가 있다면 첫 장 첫 페이지에 실려도 괜찮을 만화다. ‘현자의 돌’이라는 수상한 물질로 마을을 조종하고 있는 사이비종교와 이를 좇는 에드워드라는 소년, 그리고 그들이 앞으로 하게 될 모험이 1화에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려져 있다. 적절한 유머를 섞어 캐릭터들의 성격과 사정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이고, 작품을 관통하는 ‘등가교환’이라는 (엄청 있어 보이는) 개념과 “당장 내려와, 삼류! 격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지!” 하는 폼 잡는 대사까지 완벽할 정도로 멋스럽다. 1화뿐만 아니라 전27권의 결말까지 완벽한 용두용미 만화다. 내가 이 만화에서 가장 매력을 느끼는 포인트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충실하게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악역이면 악역답게, 조력자면 조력자답게, 악역인가 조력자인가 헷갈리는 캐릭터도, 악역이었다가 조력자가 되는 캐릭터도, 모두가 자신의 역할에 맞게 움직인다. 잉여도 군더더기도 없이 캐릭터들이 자신에게 할당된 비중에 따라 밥값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정석이라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싶다. 최근 소년만화를 읽는다고 하면 『체인소 맨』을 접하던데, 『체인소 맨』은 『강철의 연금술사』의 안티테제 같은 만화다. 우리가 봐온 소년만화의 모든 것을 배반하기 위해 그려진 『체인소 맨』과 『강철의 연금술사』은 거의 모든 항이 반대인 관계일 수밖에. 그러니 안티테제만 보지 말고 그것이 어떤 상식과 도식을 부수며 태어났는지를 보는 것도 큰 재미다. (물론 『체인소 맨』에 더해 나가이 고의 『데빌맨』까지 보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데빌맨』은 누가 보라고 해서 봐지는 그런 만화라기엔 좀… 역시 어느 날 만화의 신이 말해야 한다. “『데빌맨』을 보아라.” “네.”) 

 


다음은 소위 ‘원나블’이라 불리는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다. 이를 두고는 꼭 봐야 한다, 아니다, 약간의 설전이 있었는데 나는 셋 중에 제일 본인 취향인 만화만 골라 봐도 될 것 같다. (세 만화는 합하면 총 258권이며 『원피스』는 하물며 아직 연재중이기 때문이다.) 꼭 세 가지를 다 봐야겠다면 각 만화에 가장 재밌는 부분까지만 봐도 되지 않나 싶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이를테면 『원피스』는 우솝이 고향의 친구가 마련해준 배를 지키기 위해, 로빈이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밀짚모자 해적단을 잠시 이탈했다가 다시 돌아와 고잉메리호를 떠나보내주는 워터세븐 편(단행본 약 40권 내외)까지는 꼭 보았으면 한다. 동료를 한 명씩 모으던 밀짚모자 해적단이 처음으로 이탈과 와해를 겪으며 더욱 단단해지는 모습이, 눈물샘이 있는 동물이라면 울 수밖에 없도록 그려져 있다.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주술회전』 등과 같은 만화들이 ‘원나블’을 이어 차세대 주자들이 되었지만, 이 만화들도 앞선 만화들을 일부 계승하는 면모가 있었기에 ‘원나블’ 중 하나는 읽어봄 직하다. 다만 구태여 완독에 너무 목 메지 않고 말이다. 사실 이 만화들이 연재되고 있는 만화 잡지 《주간소년 점프》의 전성기라 하면은 600만 부가 넘게 팔려 기네스북에도 올랐던 『드래곤볼』, 『슬램덩크』, 『유유백서』가 연재된 시절인데, 이 세 만화를 보기에는 세월이 좀 많이 흐른 느낌이다. 고전의 반열에 올라버렸다고 해야 할까? 작품도 작품이지만 세 작가의 ‘아우라’(‘오라’가 규범 표기지만 여기서는 ‘아우라’라고 쓴다.)가 너무 커진 느낌이다. 

 

이소라 노래 추천해준다면서 〈바람이 분다〉만 알려준 듯한데… 사실 위에 말한 만화들은 추천하기가 민망할 만큼 유명하고 어떤 이라면 어린 시절에 마치 숨쉬듯 읽었을 법한 만화다. (그런데도 안 읽은 사람들이 있긴 하다…) (이래서 조기교육이 진짜 중요한 거다. 나 진짜 4천 번째 말한다. 도서관에 만화책 들여놓으시길, 제발.) 그래서 사심을 담아서 최신 만화를 하나 추천하자면 『이거 그리고 죽어』다. 이거 그리고 죽으라니, 제목부터 결의가 넘친다. 하지만 이 만화는 터프한 제목에 비해 뜨거운 열정과 순수함으로 똘똘 뭉친 만화다. 만화를 너무 좋아하는 야스미가 소심한 미술부원 후지모리, 제법 냉철한 만화 감상자 아카후쿠, 뛰어난 센스를 가진 히카루와 함께 만화를 보는 것뿐만 아니라 그리기 시작하면서, 진지하고 때로는 냉혹한 창작의 세계로 나아가는 이야기다. 이들이 속한 만화부의 고문 선생님 테시마 레이는 야스미의 인생만화 『로보토와 포코타』를 그린 전前 만화가지만, 창작의 쓴맛을 본 후(그렇게 잘 팔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이들에게 절대 “이거 그리고 죽겠다는 마음으로 그리지 말라”는 조건으로 만화 창작을 가르쳐준다. 


 

이 만화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닌데, 일단 연출. 만화 그리는 만화답게 다양한 만화 연출이 등장한다. 페이지를 삼단 혹은 사단으로 분할하고 연결하여 각 캐릭터들이 수련하는 과정을 등치되도록 보여주는 방법이라든가, 시원시원한 양면 연출, 야스미와 후지모리가 작중에서 그린 만화는 그림체와 텍스쳐를 변주하여 실감나게 그려두었다. 그리고 최근에 본 만화 중에 의성어와 의태어를 가장 예쁘고 정성스럽게 쓴 만화다. 때로는 조금 과장한 면도 있긴 하지만, 그 부분마저도 아이들의 열정과 이 만화가 가진 열기와 잘 어울린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 작가 토요다 미노루는 대사를 정말 잘 쓴다. 우리가 모두 “너무 강한 말은 쓰지 마… 약해 보인다구.” “인생이 한 다섯 번 정도 있다면 말야! 그럼 난 다섯 번 모두 다른 마을에 태어나… 다섯 번 모두 다른 걸 배터지게 먹고… 다섯 번 모두 다른 일을 하고… 그리고 다섯 번 모두… 똑같은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거야.” (『블리치』) 같은 대사를 쓸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우리는 쿠보 타이토(『블리치』의 작가)가 아니고 아무래도 그것은 좀 어렵다. 

 

애초에 대사를 잘 쓴다는 게 무엇일까? 그 대사를 듣는 순간 그 대사가 나온 앞뒤 페이지가 모두 생각나며, 그 대사가 좌수에 적혀 있는지 우수에 적혀 있는지까지, 그런 것들이 눈을 감았을 때 선명하게 바로 재생되는 것이다. 정말로 이 세상 어딘가에 그 캐릭터가 살아 있어서 진심을 다해 건넸을 말처럼 느껴지면서 말이다. 토요다 미노루는 아마 나도 해본 적이 있고, 너도 해본 적이 있는 그런 평범한 일상어를 만화 속에서 너무나 특별한 대사로 만들어버린다. 인물의 표정으로, 상황으로, 그 모든 것에 서려 있는 순수한 진심으로. 내가 『이거 그리고 죽어』에서 좋아하는 대사는 수도 없이 많지만, 가장 좋아하는 장면 속 대사는 이것이다. “저는 어릴 때 친구가 없어서 만화만 봤어요. 하지만 이 만화를 읽으니까 포코타가 나도 격려해주는 것만 같고, 포코타 말대로 했더니 친구를 사귈 수 있었어요. 만화는 거짓이 아니에요.” 야스미의 이 대사를 쓰면서 깨달았다. 공미포 약 4,200자를 쓰는 동안 내가 나불댄 모든 말들이 고작 이 몇 줄의 대사 안에 다 들어 있다고. 젠장, 이 글을 읽는 시간도 아깝다. 만화의 신이 말합니다. “빨리 만화 보러 가라.” “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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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인

만화 편집자. 출판사 스위밍꿀에서 에세이 『펀치: 어떤 만화 편집자 이야기』(2024)를 냈다. 집 가서 만화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