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다들 아직도 MBTI 이야기를 하십니까?
스몰토크의 주제로서 아직까진 MBTI가 근근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듯하다. 나의 경우 스몰토크로 MBTI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빅토크, 거대 담론, 인류학 어젠다로서 이야기한다. 내게(=일반화와 색안경을 경계해야 함을 앎에도 상대방을 평면적으로 보고 태그를 달아서 나만의 카테고리에 집어넣는 범주화의 즐거움을 놓지 못하는 ‘내게’) MBTI란 너무나 흥미로운 주제이기 때문이다. 처음엔 나도 MBTI를 크게 믿지 않았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아주 많지는 않다는 INFP와 INTP가 출판계에 유달리 많다는 것을 알게 된 후(물어보면 80%는 둘 중 하나다) 그 경향성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인정하게 되었다.
물론 인간의 성격을 열여섯 가지로 분류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고(죄송합니다. 거짓말이에요. 인간의 성격은 충분히 열여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열여섯 가지로 분류하는 게 솔직히 너무 재밌어요. 그치만) 살아 있는 사람의 성격에는 썩 큰 흥미가 없다. 다만 좋아하는 만화와 캐릭터의 MBTI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중대 사안이다. 어느 정도로 중대 사안이냐면 최근 오랜 시간 대기업에서 임직원 정신과 마음 건강 관리를 해오신 임상 심리 전문가와 『데스노트』 주인공들을 두고 MBTI 토크를 했는데 처음엔 의견이 맞지 않았으나 끝내 엘의 MBTI가 ISTP라는 것을 설득했을 때, 근래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 (고작 이런 걸로 근래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정신 상태에 대해서 심리 상담을 받고 오면 좋았을 텐데…) (아니 근데 일반적으론 ‘살아 있는 사람’의 반대 개념은 ‘죽어 있는 사람’이겠구나. 만화 캐릭터가 아니라…)
‘너 T야?’라는 물음이 밈이 될 만큼 MBTI에서도 가장 크게 두드러진 성향 차이를 보이는 것이 T와 F인 것 같다. 이성과 합리에 따른 추론으로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하는 방법론적 사고에 능한 T와, 감성과 관계 중심적 사고로 공동체적 조화와 문제를 겪는 이의 심정에 공감하는 F의 특성을 사람들은 거칠게 요약한다. 감정 없는 로봇 T와 툭하면 우는 수도꼭지 F. 다소의 과장이 있고 일반화한 경향이 있지만 T와 F가 주로 선호하는 만화들이 있는데, 이를테면 T라면 아래의 만화들을 ‘같이’ 좋아하거나, 아직 안 봤다면 다른 것들도 재밌게 읽을 가능성이 크다.
『아인』, 『던전밥』, 『지.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 T만화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만화의 메시지와 주인공들의 목표(목적 의식)가 분명한 점이다. 주인공들이 어떠한 정연명령 아래서 충실하게 움직이고 있으며 만화는 대주제를 전달하는 데 집중한다. 그래서 이 유형의 만화들은 “그래서 이 작품이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주인공들의 목표가 뭔데?”와 같은 질문에 비교적 깔끔하게 대답이 가능하다. 『아인』의 경우 죽지만 않을 뿐 너무도 불완전하고, 죽지 않는 것만 같을 뿐 서로 다른 가치관과 목표를 가진 주인공들이 각개전투를 펼치며 죽지 못하는 불사의 인간이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야기를 한다. 던전이라는 독특한 무대와 조건 속에서 밥을 해 먹으며 여동생을 찾는 『던전밥』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에게 해당하는, ‘먹는 것과 사는 것’에 대해 새삼스럽고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지.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는 천동설과 가톨릭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던 역사를 통해 지동설을 증명하고 관철하기 위해 죽어 나간 인간 각각의 의지가 긴 세월 동안 어떻게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준다. (『지.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 속 주인공들의 모든 대사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 이 한마디로 다 수렴된다.) (갈릴레이: 난 실제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도…) 말만 들어도 이런 만화는… 시쳇말로 ‘가슴이 웅장’해진다. 작가라면 독자를 얼마나 만화의 원초적인 대주제에 공명할 수 있게 만드는지가 중요하다.
F만화는 장르로서 이야기할 수 있는데 대다수의 순정만화와 스포츠만화들이 해당하고, 알려진 작품으로는 『피의 흔적』, 『스킵과 로퍼』, 『아오노군에게 닿고 싶으니까 죽고 싶어』 같은 만화들이 떠오른다. F만화가 집중하는 것은 만화 속 인물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혹은 목표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인물들이 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F만화를 그리는 작가들에겐 독자를 얼마나 만화 속에서 묘사되는 감정에 공감을 시킬지, 희로애락을 어떻게 새롭고 충격적으로 표현할지가 관건이다. 마찬가지로 시쳇말을 써보자면 ‘가슴이 룽’1해지는 만화라고 해야 할까? 앞서 T만화에서 언급한 세 만화가 불사신, 던전, 지동설 같은 특수한 설정이나 배경이 만화에 깔려 있는 반면, F만화들은 보통의 사건이나 일상적 배경 속에서 관계의 동태, 독자와 비슷한 등신대의 주인공이 겪는 성장과 변화에 초점이 맞춰진다. 『피의 흔적』 『스킵과 로퍼』 『아오노군에게 닿고 싶으니까 죽고 싶어』 모두 가정, 학교, 마을 등 현실이 무대다. 그리고 그 속에서 보편의 등장인물이 등장해 엄마, 친구들, 연인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사건을 거쳐 성장 혹은 변화하는지가 그려진다.
바로 방금까지 대다수의 순정만화와 스포츠만화들이 해당한다고 했지만 T만화와 F만화를 비교해 보기 위해 같은 야구만화 『다이아몬드 에이스』와 『크게 휘두르며』를 선상에 놓고 본다면, 『다이아몬드 에이스』는 주인공들이 ‘야구를 하는 것’이 중요하고, 『크게 휘두르며』는 야구를 하며 겪는 ‘주인공들의 감정’이 포커스라고 해야 할까? 만화 그리는 만화로 한번 더 비교해보자면 『바쿠만』은 경쟁적인 시장 속에서 2인조 만화가 소년들이 어떻게 성공적으로 만화를 연재할 수 있는지를 조명하는데, 『울어라, 펜』은 악랄한 업계 속에서 편집자, 동료 작가, 어시스턴트, 독자 등 눈치 보고(?) 고려해야 할 것도 많은 이해관계와 사정을 뒤로 하고 하여튼 ‘내 만화’ 그리기에 뜨겁게 투지를 태우는 이야기다. (보다보면 만화를 그리다 보면 사람이 정말 이렇게… 열혈이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 T는 순정만화 취향이 아닌 거냐? 당연히 그렇지 않다. 많은 순정만화가 인물의 감정을 묘사하고 표현하는 데 집중하고 있지만 T를 위한 순정만화가 없을 리가? 요시나가 후미와 TONO 작가의 만화는 순정만화지만 확신의 T, 쌉T, 대문자T의 만화다. 요시나가 후미 만화 속 등장인물들이 무슨 일이 있든 간에 제철 재료로 레시피에 따른 정확한 개량, 조리 시간에 맞추어 밥 해 먹는 모습을 보면 감정 없는 로봇이 아니면 ‘살면 살아진다’라는 평등한 삶의 규칙 아래 충실히 생활(특히 식생활)을 가꿀 줄 아는 생활력 있는 번듯한 사람이 보인다. (‘나 어제 엄청 힘든 일 있었어ㅠㅠ’라고 하면 요시나가 후미 만화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제 뭐 먹었어?'2) 반면 미워하고 혐오하고 동정해도 괜찮다고 판단되는 존재에겐 피도 눈물도 없이 잔인하고 서늘한 TONO 작가의 『아델라이트의 꽃』 같은 만화를 보면 순정만화를 보고도 인간 군상에 넌더리와 염세를 느끼는 독특한 경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F라고 해서 F만화로 언급된 모든 만화를 재밌게 보는 건 아니다. (그 반대도 당연히 마찬가지다.) 요시나가 후미는 좋아해도 TONO 작가는 취향이 아닐 수도 있고 두 만화 사이에는 어떠한 우열도 없다. 언급된 모든 만화들이 훌륭한 만화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이럴 때, 그러니까 방금 모 인터넷 서점에서 『가라오케 가자!』를 검색하니 연관 추천 도서로 이기호 작가님의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이 떴는데 적어도 『가라오케 가자!』와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사이의 연관성보다는 『아인』과 『지.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 사이의 연관성이 훨씬 더 높고 재밌게 볼 확률 또한 높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니 베스트셀러 중심의 기계적 알고리즘에 지쳤다면 자신의 MBTI에 따라서 작품을 찾아 읽어보는 것을 나름대로 그럴듯한 방법으로 권해본다.
T만화, F만화로 실컷 이분법 이분법 아 신나는 노래 나도 한번 불러보자 해놓고 괜히 마지막에 반드시 그렇진 않고요… 비교적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하며 거짓 인류학을 믿지 않는다는 해명을 하느라 혓바닥이 길어지고 있군요. 그럼에도 여러분이 망망대해 같은 취향의 바닷속에서 자신만의 재미를 찾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다른 사람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 일에서 깊은 만족감을 느끼는 옹호자” INFJ입니다. (이래도 MBTI가 유사 과학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 “가슴이 벅차오르다”, “가슴이 뭉클해진다”는 뜻으로 주로 SNS에서 사용하는 표현.
2 요시니가 후미가 연재중인 BL만화이자 요리만화의 제목.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DEATH NOTE 데스 노트 1
출판사 | 대원
던전밥 1
출판사 | 소미미디어
피의 흔적 1
출판사 | 학산문화사
스킵과 로퍼 1
출판사 | YNKMEDIA
아오노 군에게 닿고 싶으니까 죽고 싶어 1
출판사 | 대원
다이아몬드 A(에이스) 1
출판사 | 학산문화사
크게 휘두르며 1
출판사 | 학산문화사
바쿠만 BAKUMAN 1
출판사 | 대원
울어라, 펜 1
출판사 | 미우(대원)
아델라이트의 꽃 1
출판사 | 길찾기
가라오케 가자!
출판사 | 문학동네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출판사 | 문학동네

김해인
만화 편집자. 출판사 스위밍꿀에서 에세이 『펀치: 어떤 만화 편집자 이야기』(2024)를 냈다. 집 가서 만화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