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들은 상대적이고 만성적인 ‘빈곤감’에 시달린다. 씻어낼 수 없는 불안이 함께하는 이 사회에서 빈곤감은 언제나 늘 우리의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우아한 가난’은 그런 빈곤감이 디폴트인 사회에서 한 개인이 의연하게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만들어 낸 조어다. 동시에 세상의 기준이 아닌 자기만의 기준으로 삶을 정의한 사람이 빈곤감에 허덕이지 않고 보다 품위를 지키며 살아가기 위해 택한 방식이기도 하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흔들리지 않는 독자적인 삶의 양식을 가져야 하는 시간이다. 돈이 없어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을 지키기 위한 김지선 작가의 사사로운 투쟁의 기록을 들여다보자.
책의 여는 글에서 원고를 끝맺고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고 하셨는데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코로나로 인해 출간이 연기되면서 충분한 휴식 시간을 가졌어요. 특별한 일을 하지는 않았어요. 인터넷이나 SNS와는 조금 거리를 두고, 오프라인에서의 시간에 집중하는 것이 저의 동굴이에요. 예전에는 단절의 중요성을 잘 몰랐어요. 오히려 공포심이 있었죠. 회사를 그만두거나, 친하게 지내던 이들과 멀어지거나, 유행에 뒤처지거나 다양한 형태의 단절이 있잖아요. 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는 오히려 이런 시간을 즐기려고 하는 편이에요. 인생의 어느 시점이 되면 나는 어떤 일은 죽어도 싫고 어떤 일은 그럭저럭할 만한지, 어떤 자리에 있을 때 자연스러운지, 일과 후에는 어떤 시간을 보내고 싶은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동떨어져 있는 시간이 그런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주더라고요. 책 작업을 하는 시간도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책을 읽은 분들의 리뷰를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더라고요. ‘우아함’과 ‘가난’이라는 단어의 조합이 처음에는 이질적이었는데, 책을 덮고 난 뒤에는 ‘가난’을 바라보는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고요. 이런 반응을 예상하셨나요?
구체적인 반응을 상상하며 쓴 글들은 아니에요. 그보다는 스스로의 생활을 돌아보는 의미가 컸어요. 열심히 일해도 통장 잔고는 항상 바닥을 치고, 미래에 대한 그림이 도무지 그려지지 않는 상황에 대한 만성적인 불안감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당장의 저녁 메뉴는 호기롭게 고르고, 가끔은 과감한 소비를 하며, 퇴직금을 탈탈 털어 여행을 가기도 하죠. 미래를 두려워하면서도 눈앞에 놓인 케이크를 탐닉하는 동 세대의 삶에 아이러니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우아한 가난의 시대’라는 제목은 어떤 설파나 제안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삶에 존재하는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의미였어요. 이런 상황에서 의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 또한 외부에서보다는 내부에서 찾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제한된 상황에서도 자신만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는 친구들의 생활이 귀감이 됐어요. 좋아하는 물건들로 작은 원룸을 채우고, 자신만을 위한 요리를 할 때도 담음새를 정갈히 하고, 적은 보증금으로 마음에 드는 전망을 갖기 위해 발품을 파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죠. 이런 일화들을 나누며 포기할 수 있는 것과 포기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각자의 리스트를 만들어 보는 일은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많은 독자분들이 공감하신 문장 중에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흔들리지 않는 독자적인 삶의 양식을 가져야 한다는 거다”라는 구절이 있어요. 하지만 당장 인스타그램만 봐도 남들 잘 먹고 잘사는 모습이 줄줄이 나오는 세상이라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출근을 앞둔 일요일 저녁에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면 극심한 우울감을 느낀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 마음이 뭔지 너무 알겠더라고요. ‘나 빼고 다들 행복한 것 같다’는 박탈감이나 빈곤감이 요즘 우리 사회에 떠다니는 주된 정서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사실 사회가 권하는 객관적인 행복의 요건을 갖추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요. 취할 건 취하고 포기할 건 포기하며 주관적인 행복을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분명히 가지고 있지만, 저 역시 시시때때로 흔들려요. 책의 말미에 “유행이 아닌, 나만의 무언가를 찾아야 할 때라고 진심으로 생각하지만, 잘 되지 않고 있다”고 적었는데, 이게 솔직한 심정이에요. 유행, 다른 사람의 시선, 세상의 기준에 의해 매일매일 흔들리면서도 계속해서 ‘찾으려 한다’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최근 작가님의 삶에 우아함을 가져다주는 것들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야외에서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하는데, 회사에 다닐 때는 그런 시간을 많이 가지질 못했어요. 일하는 시간을 조율할 수 있는 프리랜서이자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요즘은 하루에 두 번씩 산책을 해요. 아이가 활동량이 많아지면서 살기 위해서 시작한 산책인데, ‘좋다’고 느끼는 순간 일상이 환기가 되더라고요. 가끔 큰 돈을 쓰지 않고도 호사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그런 순간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해 두려 해요. 마음에 드는 책을 아껴 가며 읽거나, 도시에 있는 한 뼘 크기의 자연을 즐기거나, 사람 없는 미술관에서 혼자 작품을 독차지하며 보내는 시간이 대표적이죠. 소비자로서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얻을 수 있는 우아함이 아닌, 한 명의 자연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좋은 시간들을 계속해서 찾고 싶어요.
책을 읽으며 매거진 에디터의 일을 엿볼 수 있는 점도 흥미로웠어요. 11년이면 초중고를 다니고 대학에 입학할 정도의 시간이잖아요. 에디터라는 직업이 김지선이라는 사람에게 끼친 영향이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겠지만, 저 역시 직업으로부터 정말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온갖 아름다운 물건들과 진귀한 경험들, 화려한 사람들이 모이는 패션 매거진을 만들며 틈틈이 ‘정말 좋은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죠. 좋은 것들은 넘쳐나지만 다 가질 수 없기에, 선택의 기준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그 기준은 결국 나라는 사람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더라고요. 일하며 만난 사람들에게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일부에서는 사치스러운 사람들이라는 인식도 있지만, 저의 동료들은 대부분 진지한 직업 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저는 패션 매거진 에디터야말로 그 어떤 학자보다 근거리에서 럭셔리 산업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로 인해 얻은 통찰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며 사적인 의미의 럭셔리를 정립해 가고 있는 사람들이죠. 인터뷰를 통해 만난 사람들에게도 좋은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어요. 그중 어떤 말들은 그냥 흘러가지 않고 머릿속에 박혀 있어요. 이를테면 철학자 백상현은 인터뷰에서 “세상이 좋다고 말하는 것들을 포기했을 때,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삶을 모색해 볼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다. 그렇다면 더 이상 포기가 아닌 저항이 된다”고 말했는데, 이 책의 주제와도 맞닿아 있는 이야기라서 책 속에 기록해 두었어요.
책에는 ‘망각’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우리 세대가 집단적으로 망각하고 있는 것은 가난”이며, 현재 “망각이 제공하는 일시적인 풍요와 자유를 사랑한다”고요. “그다음 단계인 망각에 저항하는 방법도 배워야 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망각에 저항한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요?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아직 나이가 어리니까, 혹은 나이를 너무 먹었으니까, 직장이 안정적이니까, 혹은 직장이 불안정하니까, 현재 월세방에 살고 있으니까, 혹은 몇 살에는 집을 사야 하니까 등등 현 상황을 망각하지 않고 다음을 기약했다면 할 수 없었던 경험들이 많아요.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간다거나, 무모한 연애를 한다거나, 무용하지만 아름다운 물건을 사 보는 경험들이 그렇죠. 망각은 저를 강력하게 추동하는 힘 중 하나였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런 시간들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죠.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지 않고 회피하는 것은 저의 나쁜 습관이기도 해요. 문제를 잊어버리는 건 달콤하고 손쉬운 방법이기도 하잖아요. ‘망각에 저항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은 ‘현실을 인식하고, 문제를 인정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나만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해서 쓴 문장이었어요.
‘매거진 에디터’에서 ‘작가’라는 새로운 직업이 추가로 생기셨어요. 작가로서 첫 책을 쓰고, 비로소 독자분들과 만나기까지의 과정에서 특별히 기억나는 순간이 있으셨는지 궁금하네요.
한 권의 책의 저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작가는 저와 잘 맞지 않는 옷인 것 같아요. 책을 쓰면서 느낀 점 중 하나는 저는 편집자형 인간이라는 것이에요. 글을 쓰는 방식이나 타인과 교류하는 방법, 세상을 보는 관점 모두 작가보다는 편집자에 가까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점에서 이 책을 기획하고 엮은 ‘진짜 편집자’님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간 이후에 종종 보게 되는 책에 대한 리뷰는 무척 흥미로워요. 사실 그동안 소통에 적극적인 편은 아니었어요. 기회가 되면 구석으로만 들어가고 싶어 했죠. 그런데 책을 낸다는 것 자체가 구석에서 잠시 나오는 것이더라고요. 저의 사사로운 생각과 부끄러운 면면을 세상에 드러내 본 것, 그리고 그 생각의 행간까지 읽어 준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저에게 매우 중요한 경험으로 남을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지금 현재 작가님만의 우아함을 지키기 위해 포기할 수 없는 것 세 가지를 꼽으신다면 무엇인가요.
첫 번째는 생계를 유지해 주는 동시에 스스로 몰두할 수 있는 일. 저는 그러지 못할 때가 많지만, 강도 1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에도 10의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어요. 흔히 직장 생활을 할 때는 돈을 받은 만큼만 일하면 된다고 하잖아요. 이 말에 동의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10의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있어요. 현대판 장인들이죠. 이런 사람들의 모습이 무척 우아하다고 생각하고, 저도 그런 태도로 대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어요. 두 번째는 좋은 친구와의 대화. 물론 절대로 우아한 이야기가 오가진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죠. 그러나 우아하지 못한 농담을 늘어놓고 낄낄대는 시간에서 얻을 수 있는 생활의 영감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세 번째는 혼자만의 시간. 앞서 이야기했던 동굴의 시간과 비슷하겠네요. 촘촘하게 엮여 있는 많은 관계들 사이에서 홀로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려고 해요.
* 김지선 198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영화지 《프리미어》와 패션지 《마리끌레르》, 《하퍼스 바자》에서 에디터로 일했다. 퇴사 후 가난해도 풍요롭게 살고 싶어 하는 세대에 대한 책을 썼다. 현재 남편과 태어난 지 7개월 된 아이,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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