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뮤지컬] 비인간의 죽음이 던지는 질문
현수정 공연 평론가가 뮤지컬 속 '비인간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글 : 현수정(공연평론가·중앙대 연극학과 겸임교수)
2025.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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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공연 장면. 사진: CJ ENM


SF 장르에서 죽음은 중요한 요소로 다뤄진다. 상상 속 세상에서의 죽음은 현실에 대한 불안이나 염원을 담는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로 삶과 죽음이 통제되는 디스토피아 사회, 기계와 결합해 가까스로 되살아난 트랜스휴먼, 유전자 조작이나 환경 파괴로 인한 동식물의 치명적 역습 등. 그런데 대부분 인간의 죽음을 중심으로 주제를 전달해 왔다면, 이제 죽음 서사가 인간만의 특권(?)은 아닌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한국 창작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천 개의 파랑>, <라이카>가 그러한 예다. 이 작품들은 비인간인 로봇과 동물의 죽음을 조명하며, 세상과 삶에 대한 새로운 결의 관점을 보여준다.

 

사라지지 않아, 계속 공명하니까

<어쩌면 해피엔딩>에서 휴머노이드인 클레어와 올리버는 버려진 ‘헬퍼봇’들의 아파트에서 루틴을 살고 있다. 사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죽어가고 있다. 최신 모델인 클레어는 내구성이 약하다. 올리버와 만나게 된 것도 충전기 고장 때문에 복도에 멈춰 있었기 때문이다. 올리버는 그런 클레어에게 충전기를 빌려주지만, 너무 구모델이라 정작 자신의 부품들은 구하기 어려운 상황. 엄밀히는 ‘망가져 간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두 로봇은 분명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고 죽어가는 존재’로서 정서적인 울림을 준다.

 

그렇다고 인간의 생각과 감정의 매너리즘을 소환하지는 않는다. 낯선 감각으로 세상을 경험하며 순간들을 진실하게 살아낼 뿐. 이들의 사랑이 그토록 안타깝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도 계산적인 이해관계나 소유욕, 제도권에서의 안정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일 것이다. 지독히도 외로운 개체들이 서로를 돌보고 위하는 방법을 터득해 나가는, 모든 것이 두려운 가운데 진정으로 ‘함께 하는’ 의미의 사랑이다. 첫 곡인 ‘우린 왜 사랑했을까’에서의 “왜 끝이 분명한 그 길을 함께 걷기 시작했을까”라는 가사처럼.

 

두 로봇의 사랑은 시간의 반복과 흐름, 그리고 죽음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클레어와 올리버는 제주도를 여행하는 일탈을 감행한 후, 다시금 반복되는 일상에 복귀할 수밖에 없다. 여전히 미래는 불확실하고 몸은 망가져 간다. 그렇지만 이제 시간은 고립되어 있지 않으며, 의미 있게 흐른다. 언제든 종이컵 전화기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재즈의 변주가 그러하듯, 일상의 루틴이 차이를 포함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반복된 순간들은 둘의 시간 속에 아로새겨진 채 영원히 공명할 것이다. 브로드웨이 공연에 첨가된 넘버인 ‘메이비 해피엔딩’의 가사처럼, 그들이 “함께 보낸 햇살 가득한 그 오후들은 지금도 과거 어딘가에서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클레어와 올리버에게 남은 미래는 길지 않아 보인다. 더 이상 쓰임새가 없는 로봇에게는 도움의 손길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은 화분과 반딧불이에게 마음을 다해 반응하고, 자신의 소멸보다 상대방의 상실을 더욱 걱정하는 존재들이 ‘효율성’의 논리로 다뤄지는 모습은 근미래가 아닌 지금 우리 사회의 단면을 떠올리게 한다.


뮤지컬 <천 개의 파랑> 공연 장면. 사진=서울예술단

 

타자들을 연결하는 죽음

동명 소설이 원작인 <천 개의 파랑>에도 쓰이고 버려진 채 죽음으로 내몰리는 비인간 인물들이 등장한다. 경마장의 기수 로봇인 콜리와 경주마 투데이는 인간의 물욕을 위한 속도 경쟁에 이용되어 왔다. 투데이가 준마로 활약하자, 신이 난 경마장 측에서는 콜리에게 투데이를 채찍질해서 더욱 좋은 결과를 내라고 명령한다. 그러자 콜리는 경기 중 말에서 뛰어내려 버린다.

 

콜리는 몸의 진동으로 상대방의 감정을 가늠할 수 있다. 투데이가 자의로 달리면 행복하지만 억지로 속력을 낼 때는 고통스럽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투데이를 구하려는 마음으로 낙마를 감행한다. 이후 또 한 번 같은 행동을 보여주는데, 이번에는 다리 부상으로 안락사를 앞둔 투데이가 무게감 없이 마음껏 달리게 하고 싶어서다. 이 뮤지컬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땅에 떨어지기 직전 삶의 마지막 순간에 콜리가 떠올린 아름다운 기억이다.

 

콜리는 칩이 잘못 삽입되어 다른 기수 로봇에게는 없는 학습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천 개의 단어를 알고 있을 뿐 아니라 호기심도 많다. 그렇지만 인간의 이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알아간다. 느끼고 공감하려 노력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처음에 그는 파란 하늘을 보며 “찬란하다”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기억 속 인물들에게 “천 개의 파랑은 당신들이에요”라고 노래한다. 그에게 ‘파랑’은 ‘사랑’과 같은 의미가 된 것이다. 하늘색처럼 수많은 ‘차이’를 섬세하게 포함하는.

 

마지막 경주인 ‘천천히 달리기’는 콜리의 아이디어다. 그는 관절이 상한 투데이가 최대한 느리게 달리도록 훈련시킨다. 이때 불리는 ‘천천히’는 빠르지 않은 왈츠풍으로 숨 고르듯 부드럽게 시작하며 여운을 남긴다. 광적으로 속도를 추구하는 경마장은 이윤에 집착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상징한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우린 모두 달리지 않는 연습이 필요해”라는 가사는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게 한다.

 

콜리가 떠나기 전 도움을 준 것이 투데이만은 아니다. 첫 번째 낙마로 망가졌던 콜리를 수리해 준 고등학생 연재와 그녀의 가족은, 그와 함께 지내며 유대관계를 회복한다. 연재의 어머니는 말로 꺼내기도 힘든 상실의 기억을 간직한 채 경마장 근처에서 식당을 운영하며 어렵게 자매를 키웠다. 그리고 연재의 언니는 소아마비로 인해 이동의 어려움을 겪어 왔다. 과학기술이 발전한 2035년이지만 돈이 되지 않으면 방치되는 상황은 여전하다. 콜리는 그렇게 각자의 슬픔을 눌러 담은 채 살아가던 연재의 가족에게 질문을 던진다. “대화하지 않고 어떻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나요?”

 

이 뮤지컬은 콜리와 연재, 투데이의 관계를 통해 공생의 윤리를 잘 보여준다. 사실 연재는 오래 전 세찬 비를 만나 곤경에 처했을 때 강아지 모양의 재난구조용 로봇 덕분에 집에 올 수 있었다. 당시 자신을 태우고 달리는 로봇의 등에서 느낀 열기와 박동을 기억한다. 마치 콜리가 모든 종을 횡단하며 진동으로 감응하듯. 그런데 그 로봇이 태풍에 떠내려가 버렸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후 로봇들을 수리해 왔다.

 

콜리가 죽기 직전에 부르는 ‘천개의 파랑 part2’는 장조지만 단조의 느낌을 포함하며 낙관도 절망도 아닌 복합적인 감성을 담는다. 언제든 장조로도 단조로도 변할 수 있는 예측 불가의 삶 속에서, 서로를 살리는 관심과 공감이 절실함을 떠올리게 하듯.


뮤지컬 <라이카> 공연 장면. 사진=라이브러리컴퍼니

 

공생을 위한 애도와 돌봄

그런가 하면, <라이카>는 인류의 과학적 진보라는 명목으로 희생된 동물의 이야기를 다룬다. 1957년 소련에서 스푸트니크 2호기에 홀로 탑승시킨 ‘우주 탐사견’ 라이카가 바로 그 주인공. 로켓에는 애초에 귀환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사망 원인도 사료를 통한 안락사라는 발표와 달리 고온에서의 질식사로 추정된다. 극에서는 라이카의 죽음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기다려’ 넘버의 종지 부분에서 비치는 ‘삐’ 소리가 심장이 멈췄음을 추측하게 할 뿐. 뜨겁고 머리 아프지만 칭찬받을 생각에 참고 견디는 라이카의 노래여서 안타까움을 더한다.

 

그런데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후부터 전개된다. 라이카가 도착한 곳은 어른이 된 어린 왕자가 장미, 바오밥들과 함께 살고 있는 B612 행성. 미국 황금기 작품들 같은 고전 뮤지컬이라면 이러한 판타지를 통해 앞선 슬픔을 상쇄하고 화합하는 모습을 그렸을 것이다. 리처드 로저스와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의 <회전목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빌리가 15년 만에 하루 동안 지상으로 내려와 가족들과 화해하는 것처럼. 그러나 <라이카>에서는 이제부터 현실의 부조리와 절망적인 진실이 가감 없이 폭로된다.

 

라이카는 왕자에게서 자신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듣는다. 사실 왕자는 라이카를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 함께 진행하고자 하는 일이 있어서인데, 그것은 바로 지구 멸망 프로젝트다. 그는 이미 소행성의 궤도를 돌리는 방법을 연구해 두었다. 그가 이러는 것은 생텍쥐페리가 전쟁으로 희생당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들이 끊임없이 서로를 죽고 죽이다 못해, 지구의 생태를 총체적으로 망치는 상황에 분노하게 된 것이다. 가사에서처럼 “잘려나간 나무들, 죽어가는 동물들, 쏟아지는 비명들”이 없게 하려면 인간이 사라져야 한다고 결론 내린 것.

 

이러한 왕자의 행동은 인간이 지구 전체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는, 소위 ‘인류세’의 재난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지금의 상황을 자초한 ‘인간’을 뭉뚱그려 생각할 수는 없다. 가뭄 때문에 먼 거리를 걸어서 물동이를 나르는 아프리카의 어린 소녀와 세계 최대의 석유 재벌이 같지는 않으니까.1) 여기서는 “조금 더 많이 갖기 위해, 조금 더 편해지기 위해” 생태 위기를 불러일으킨 인간의 폭력과 오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드디어 왕자가 지구 멸망 프로젝트를 시행하려는 순간, B612의 존재들은 빙글빙글 춤을 추며 ‘기다려2’를 함께 부른다. 앞서 나왔던 넘버들의 멜로디가 뒤섞이며 웅성대는 모습은 마치 온 우주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움직이는 느낌을 준다. 인류에게는 위기지만, 자연의 입장에서는 균형을 잡으려는 흐름이다.

 

그런데 라이카가 이들을 중단시킨다. 인간들에 대한 배신감으로 왕자에게 동조하려고도 했지만,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이라며 설득한다. “그렇게 시간 끄는 사이에 너 같은 피해자는 계속 늘어날 텐데?”라는 왕자의 말에 “소행성 충돌로 죽는 숫자보다는 적을 테니까”라고 답하면서. 왕자는 모든 것을 관리하려 든다는 점에서 매우 ‘인간적’이다. 이와 달리 라이카는 조금 느리고 불확실하지만 상생하는 방향을 추구한다.

 

라이카 이후에도 미국과 소련은 경쟁적으로 개와 원숭이 등을 태운 로켓을 쏘아 올린다. 그리하여 B612 행성이 수많은 동물로 붐비게 된다. 장미의 대사처럼 흡사 ‘우주 동물 보호소’를 연상케도 한다. 풍자적으로 그렸지만, 인간 문명이 희생시키고 있는 존재들에 대한 애도와 돌봄의 윤리를 진지하게 실천하는 모습이다.

 

낙관도 비관도 아닌, 감응과 응답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인생에서 가장 명료하면서도 불가사의한 사실일 것이다.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는 지구에서 고군분투하며 살다가 떠나간 이들에 대한 애도를 담고 있다. 필멸성 만큼 공감과 연대감을 일깨우는 것이 또 있을까. 이야기 속 동물과 로봇의 죽음은 이러한 감각을 모든 존재로 확장해 준다. 또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며, 새로운 생각의 길을 터준다. 인간을 포함한 지구의 모든 존재는 여러 무기질의 집합체2)이고, 입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실체3)라는 점에서 같지 않은가. 혹은 동시대 일부 철학이 주장하듯 생기(生氣)를 인간에 국한하지 않는다면, 죽음 또한 그러할 것이다.

 

클레어와 올리버, 콜리, 라이카의 죽음은 지금 우리가 처한 위기와 관련이 있다. 이들을 쓰고 버리는 효율성과 속도의 논리는 지구의 재난 시계도 앞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뮤지컬들이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지구에서 어떻게 ‘함께’ 살아가고 죽어갈 것인지에 대한 절박한 질문이다. 한편, 작품들은 극적인 해결에 치중하지 않는다. 완벽한 해피엔딩으로도, 절망적인 파국으로도 끝나지 않는다. 대신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연결”4)을 통해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상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성적인 논리보다 따뜻한 감응과 정동, 그리고 사소한 것도 감각적으로 느끼고 반응하는 ‘상호작용’임을 새삼 일깨운다.

 


[1] 이송희일, 『기후 위기 시대에 춤을 추어라』, 삼인, 2024, 33쪽.

[2] 심귀연, 『이 책은 신유물론이다』, 날, 2024, 111쪽.

[3] 김상욱, 『떨림과 울림』, 동아시아, 2021, 117쪽.

[4] 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 최유미 옮김, 마농지, 2025,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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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정(공연평론가·중앙대 연극학과 겸임교수)

공연평론가·중앙대 연극학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