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소컬(작고 소중한 컬렉션)’ 이야기
김예지 아트 디렉터의 작고 소중한 컬렉션을 소개합니다.
글ㆍ사진 김예지 (널위한문화예술 시니어 아트 디렉터)
2025.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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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사를 공부하고 미술품 경매회사의 신입으로 입사한 직후 컬렉팅을 시작했습니다. ‘컬렉터가 되어야지!’ 목적을 갖고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작가와 작업이 내뿜는 에너지에 매료되어 나의 세계에 들이다 보니 어느새 작고 소중한 컬렉션이 만들어졌더군요. 


이후 100% 재택근무를 하는 미국회사에 입사 이후 개인사업, 이직한 현 직장에서까지 집에서 근무하게 된 지 4년 차.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다보니, 일할 때도 밥 먹을 때도 나와 함께하는 이 작품들이 나의 단조로운 일상 속에 부어주는 이 상큼하고 따스한 에너지를 새삼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미술시장에 몸담고 있다 보니, 미술품을 시장 관점으로 바라보고 설명하고 구매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실제로 구매 후 가치가 올랐을 때 다시 재판매한 작품도 많고요. 그러나 한 두푼이 아니기에 투자를 생각하며 소장하게 된 작품이라도, 집에 걸어두게 된 작품들은 결국 제 일상 속에 스며들고 깊은 정이 들어버려 ‘내 새끼’가 되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희노애락을 조용히 다 바라보고 있는, 작가의 숨결이 담겨있는 그 작품들과 매번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 연재에서는, 나의 작고 소중한 컬렉션의 ‘내 새끼들’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제 ‘작소컬’의 시작과 현재를 사적이지만 누구나 쉽게 따라 해볼 수 있는 이야기들로 녹여 공유해보겠습니다. 


막대사탕 한 개 입에 물고 그냥 웃어보자, 김점선


이전 집에서는 머리맡에, 현재 집에서는 거실 쇼파뒤에 자리 잡고 우리 집의 중심 작품이 된 김점선의 작업. 사진 : 본인 제공


김점선(1946-2009), 점선의 세계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어른’의 쌉싸르한 맛을 느끼고 있을 즈음이었다. 미술품 경매회사 신입사원 시절. 경매 하나를 준비하려면, 꼬꼬마 신입으로서 작품 사이즈 책정, 캡션 작성, 수장고에서 뛰어다니며 작품 사진 촬영, 등 모든 뒷(?) 작업을 배우고 해야 하는 게 당연지사였던지라 긴장 딱, 하고 기라성같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핸들링했었다. 지금도 그렇듯, 그때에도 경매회사에서 가장 많이 다루었던 작가는 이우환, 박서보, 하종현 등 단색화 대가들의 작품들. 그들의 깊고 심오한 명상적 작품들을 수없이 마주하며 처음에는 “와, 내가 미술사 시간에 배운 작가들, 대작가들의 작품을 실제로 핸들링하고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할 수 있구나” 하며 감격했었다. 그러나 여느 신입사원이 그렇듯, 모든 것은 무뎌지는 법. 경매 시즌마다 야근과 육체노동(?)이 수시로 곁들여지자, 일곱 빛깔 무지갯빛이 펼쳐져 있는 것 같던 나의 첫 사회생활은 점점 삼색 무지개, 어느 때는 회색빛의 안개로 조금씩 무뎌져 갔다. 

 

그러던 중, 만난 것으로 기억한다. 상큼한 막대사탕 입에 딱 물고 굴려 가며 감상해야 할 것 같은 김점선의 천진무구한 작품들을. 어딘가 비대한 비율의 말과 입이 아주 툭 튀어나온 오리, 맨드라미, 수선화. 나를 어릴 적 순수한 세계로 데려다주는 그녀 작품 속 색과 도상들. 처음에는 작품 속 무지갯빛 기분 좋은 색감과 귀여운 말, 구름에 반했다가 작가에 대해 더 알게 된 이후에는 ‘팬걸’ 모드가 되어버렸다. 


김점선 '말과 백합'(위), '오리와 분홍 튤립'(아래). 사진 : 그림닷컴


1946년 개성 출신 김점선 작가. 이화여대 교육공학 학과를 졸업 후 홍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보수적’ 코스를 걸었다. 학생일 때 부터 실험적인 작업을 해오던 그는 졸업 후에 표현을 절제하고 무채색의 작품들이 주를 이루던 화단에서 자신만의 솔직하고 표현적인 원색 작업을 시작, 새로운 작업 세계를 개척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그림 그리기로 했는데 이게 안 되면 굶어 죽어야지 뭐’라는 생각으로 작업을 계속하다가, 3초 만에 반해 결혼을 결심한 가죽공예가 남편과 결혼한 후 돈이 없어서 풀을 뜯어 국을 끓여 먹는 시절을 거치기도 했다. 녹록지 않은 현실이었지만 작품 속에서만은 동화적인 세계를 끊임없이 추구했다. 작가는 당시 이러다 죽을 수 있겠다, 하는 시점이 되면 5만 원짜리 그림이 하나 팔리고, 그걸로 먹고 살길이 끊길 때즘 또 작품이 한 점 팔리는 시기였다 회상한다.


이후 80년대 중반쯤부터는 작가의 명료하고 경쾌한 ‘말’ 시리즈가 주목을 받게 되면서 2000년대 초반까지 “우리나라 여류화가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그림만 팔아서 먹고사는 전업  작가이자 가장 열심히 작업과 전람회를 한 여자 축에 속하는 보기 드문 여걸(김종근 미술평론가)”로 활동했는데, 2009년 암으로 별세하기 전 투병하며 몸이 따라주지 않자, 60대의 나이에 (!) 디지털 작업을 시작해서 수백 점의 디지털 작업을 남기기도 했다. 앙리 마티스가 작고 전 건강 악화로 캔버스와 붓을 사용할 수 없자 종이를 잘라 ‘컷아웃’ 시리즈를 탄생시켰듯, 자신의 존재와 그림이 동일시된 화가들은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영혼이 담긴 작업을 놓을 수 없나보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자신의 세계를 고수하고 행복하고 기쁜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잃지 않았던 김점선 작가의 작업은 사회생활 초창기의 내가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대신 해주는 듯했기에, 내 핸드폰의 대기화면은 한동안 김점선의 흰색 말 그림이 장식했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2022년, 매번 습관처럼 훑던 양대 경매회사의 웹사이트에서 온라인 경매 출품작들을 보던 어느 3월 날 나는 ‘바로 그 말’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쪽빛 에메랄드 초록의 색감, 작가의 도상 중 가장 좋아했던 흰 말, 그 위에 소담하지만, 존재감을 뽐내며 피어있는 동백인지 코스모스인지 모를 들꽃들. 이건 나를 위한 작품인데- 하며 100번을 고민했고, “3월 8일 여성의 날 전날 진행된 경매이니 나를 위해, 여성작가로 멋진 생을 살았던 그녀를 기억하기 위한 셀프 선물”이라는 기나긴 정당화를 하며 비딩을 결심했다. 다행히 당일 마지막까지 비딩이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고, 온라인 경매가 끝나는 날 직전에 비딩을 넣어 시작가로 낙찰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 집에 들인 작품은 첫날부터 나에게 큰 기쁨과 행복을 줬다. (특이하게도) 캔버스의 윗부분 양옆에 ‘점’ ‘선’ 이라고 소담하지만 당당하게 적혀있는 화가의 서명에서 느껴지는 에너지와, 모든 걸 다 이해한다는 듯 슬며시 웃고 있는 흰 말, 그 위를 포근히 감싸는 들꽃들은 매일매일 다른 얼굴로 날 맞이하며 기꺼이 ‘나의 말 그림’이 되어 주었다. 처음에는 액자를 하려고 했으나 며칠 두고 보니 이 작품은 액자를 하지 않고 맨얼굴로 들여다보고 싶단 생각이 들어 액자도 하지 않았다. 

 

작품을 소장하게 되면 그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의 삶과 그의 모든 이야기들이 작품과 함께 따라온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을 통해 영혼의 순례를 해왔던 김점선의 말이 ‘나만의 말’이 되어온 몇 년 간의 과정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집을 찾은 가족 친구들과 이 작품에 대해, 그녀의 삶과 우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며 더 깊은 이야기의 겹이 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화가’라는 업에 대한 깊은 고찰과 사랑을 보여주는 김점선의 시로 글을 마무리한다. 


김점선 작가


나는 해마다 전시회를 연다. 

전시회는 내가 먹고살 돈을 버는 길이면서 또한 그림을 보여주는 기회이다. 

그림은 경건한 예배다. 

자신의 영혼을 만나기 위한 순례다. 

내 영혼은 하늘이 내게 내린 숙제다. 

평생 풀어나가야 할 대상이다. 

내 영혼 속에는 가깝게는 나와 나의 부모의 경험이 축적되어 있다. 

 

멀리는 구석기시대의 내 조상의 경험까지도 흔적으로 남아있다. 

나는 내 영혼의 시각화에 몰두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 그린다. (김점선)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5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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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봄봄

2025.01.24

그림이 제 취향입니다.
산뜻하고 편안하고 아름다워요.

오명희 작가님(박지성 선수의 장모님)도 소개해 주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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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ydavid

2025.01.09

작가님을 알아가는 좋은글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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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5tb

2025.01.09

글을 읽는 동안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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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지 (널위한문화예술 시니어 아트 디렉터)

이화여대에서 사회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한 뒤 영국 런던대 SOAS에서 동양미술사학 석사과정을 마친 김예지 씨는 서울옥션 홍콩 경매팀과 글로벌 사업팀, 세계 최대 글로벌 온라인 미술작품 거래 플랫폼 ‘아트시(ARTSY)’의 아시아 비즈니스팀 서울 담당 디렉터로 재직하며 전시 기획, 국내외 갤러리, 기관, 작가들과 협업을 통해 글로벌 미술 시장에 대한 전문성을 쌓았다. 현재는 문화예술전문미디어 널위한문화예술에서 시니어 아트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