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대상 강의를 할 때 꽤 자주 나오는 질문이 있다. 아이들이 규칙을 따르게 하기 너무 어려운데 비법이 없겠냐는 거다. 한번은 중학생 아빠가 자신은 친구 같은 아빠가 되려고 노력했고, 실제로 아이들과 친구처럼 편하고 친근한 사이가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뭔가를 알려주려고 할 때, 특히 규범을 지키게 할 때 말을 안 듣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친해도 자기는 아빠인데 아이들 행동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런 어려움은 어디서부터 연유하는 것일까?
프랑스 철학자, 질 리포베츠키가 『가벼움의 시대』에서 초기 현대사회의 부모를 묘사한 내용이다. 이처럼 부모 역할의 전통에는 규율과 엄격한 복종을 요구하는 면모가 있다. “이 권위적인 모델은 자식들의 미래와 그들이 하게 될 공부, 그들이 갖게 될 직업을 결정할 권리를 인정받는 부모들의 힘에서 표현된다. 체벌은 용인되고, 자주 이루어진다. 많은 사회집단에서 결혼은 가족에 의해 결정되었다. 부모는 자식들의 우편물과 책을 잘 살펴보아야 했고, 그들이 입을 옷과 사귀게 될 친구들을 대신 골랐다.”
한편, 시대가 변하면서 아이의 뜻을 알아주는 다정하고 친근한 부모의 면모가 발달하였다. “아이를 즉시 행복하게 해주고, 자율성을 촉진하는 것이 최종 목표인 교육 체계가 등장했다.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규제를 가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어떤 욕망을 갖고 있는지를 들어주고 아이의 특징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아이가 자율성을 발달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이전의 강압적인 부모상에 비하면 자유롭고 너그러운 현시대의 부모상이 좀더 바람직해 보이기는 한다. 그렇다면 이런 부모상을 이상적인 모델로 삼을 수 있을까?
질 리포베츠키는 현대의 자유로운 교육의 결과로 “뭔가 들떠 있고, 지나치게 활동적이고,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고, 쉽게 상처받는 존재들”이 발달했다고 본다. “쿨한 교육 논리는 심리적 불안감과 인격의 탈구조화를 야기하고, 욕망과 충동을 다스릴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사회에서 아이들의 과잉행동장애, 충동조절장애, 불안, 우울, 자해, 자살 등의 정신병리적 증상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통계들은 이런 시각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런 현상들 때문에 과거의 교육 방식을 옹호하는 부모도 간혹 생겨난다. 하지만 과거의 권위적인 교육방식으로의 회귀는 옳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실제 우리 사회에서 부모의 태도는 이 두 가지 면모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듯이 보인다. 물론 한편으로 기울어져 있는 부모도 있지만 대략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맞추려고 노력한다. 보통은 후자를 우위에 두고, 필요한 경우 권위를 발휘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부모의 이상이 그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유연하고 개방적이고 쿨한 교환과 속박 없는 성숙’을 아이들에게 제공한 부모는 다정한 자신들의 요구에 아이들이 응답할 거라고 믿지만 아이들은 쉽게 따라주지 않는다. 그러면 부모는 아이들이 배은망덕하거나 힘에 부친다고 느끼고 조금 더 강도 높은 권위를 내세우는데, 그런 권위가 통하기는커녕 오히려 부모자식 간의 힘겨루기나 갈등으로 번지곤 한다.
문제는 이처럼 부모에게 주어진다고 여겨지는 두 가지 면모에 대한 오해에서 나온다. 강의에서 어려움을 호소한 아빠의 어려움도 이런 오해 속에 있다. 그런 두 가지의 면모를 다 실현할 수 있고, 그렇게 하면 된다는 오해다. 다정하고 친근한 부모로서 아이에게 규율과 가치를 요구할 수 있다는 생각. 이런 부모의 바람과는 반대로 이 두 가지의 면모는 서로 배타적이고, 또 그것이 다 이루어진다고 해서 아이가 정말로 제대로 된 규칙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이런 오해에서 벗어나려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들이 있다.
우선 부모는 아이에게 무엇을 전수하려는 것인가?
아이에게 기존 사회의 가치를 전달하려는 것일 테다. 명분은 그러한데 실제 현실을 잘 들여다보면 그 안에 부모 개인의 취향, 소망, 요구 등이 섞여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아이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닌 자율적인 한 사람임을 인정한다면 이런 식의 개인적인 욕심을 아이에게 직접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규율을 제대로 전수하기 위해서 부모의 사적인 욕심을 포기해야 한다면, 객관적인 가치나 관점은 그대로 복종하라고 요구해도 되는 걸까? 그렇진 않다. 그렇다면 억압적인 행태가 그대로 반복되는 것이고, 게다가 이제는 그런 부모의 요구는 힘을 발휘하지도 못한다.
부모의 요구가 힘을 못 쓰는 건, 부모와 아이들의 지식이 말 그대로 평등해진 사회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힘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든 더 알고 있어야 한다. 그는 모르고 나는 알고 있을 때 내가 그보다 우위를 점하게 된다. 신이 우리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이유가 그러하고, 높은 곳에 있는 자가 낮은 곳에 있는 자에게 힘을 발휘하는 이유가 그렇다. 과거에 부모가 자식에게 힘이 있었던 것은 부모의 삶이 자식의 삶과 분리되어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현대의 ‘친구 같은 부모’가 규칙의 준수를 주장하는 부모와 양립하지 못하고 충돌하게 된다. 부모가 아이와 친근해지면 부모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의 모습 역시 아이에게 전부 노출된다. 부모의 성격, 버릇, 습관, 취향 등등. 부모도 아이를 알지만, 아이도 부모를 알게 되는 것이다. 또한, 과거엔 어른인 부모가 아이보다 아는 것들이 더 많았지만, 모든 지식이 오픈된 지금은 그런 특혜가 없다. 부모가 아는 것을 아이들도 알고, 부모의 모습이 아이들에게 노출된 현대사회에서 부모는 이전처럼 높은 사람 노릇을 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부모는 규칙의 복종을 강요하는 대신 어떤 역할을 수임해야 할까?
생애 초기 아이들의 삶은 몸의 상태나, 기분, 느낌, 행동이 항상 먼저 있다. 사회적인 삶은 그런 것보다 생각이 앞서 있는 것이다. 생각에 의해 결정되고 통제된 표현과 행동을 하는 것이다. 사회적인 규율이나 예의, 가치 등도 모두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몸 상태나 기분, 느낌 등과 달리 생각은 한 개인의 것이 아닌 사회문화적인 세계의 것이다. 아이가 규율을 따르고 사회적인 삶의 테두리로 들어가게 된다는 건, 자신의 상태나 행동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생각에서 출발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존재 양식의 순서가 바뀌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삶에서 생각이라는 매개가 먼저 작동하는 삶으로의 변화, 그것이 아이가 사회적인 존재가 될 때 가장 중요한 열쇠다.
그렇게 순서를 바꾸는 작업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생각이 어떤 행동이나 결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반복해서 경험하고 익히면서 이루어진다. 물론 생각으로부터 나온 행동이나 결과가 자신을 해치거나 나약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다. 그냥 있는 상태나, 그냥 하는 행동보다 생각으로부터 나온 결과가 나에게 더 유리해야 생각에 나를 맡길 수 있다.
그렇다면 부모는 어떻게 아이를 그런 존재 양식으로 이끌 수 있을까? 가장 처음해야 할 것은 약속의 이행이다. 약속이란 무엇인가? 말을 먼저 던지는 것이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 순수하게 생각만으로 이루어진 말을 던지고 지키면 그것이 예견했던 결과가 행동이나 상태로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 아이의 변화는 부모가 아이가 바라는 것을 먼저 말로 던지고,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약속을 지켜주면서 시작될 수 있다. “엄마가 금방 나갔다 올게.” 그냥 나갔다고 오는 게 아니라 약속하고 나갔다고 오는 것. 신호등 앞에서 “기다리면 파란불이 켜질 거야”라고 예견하고 정말로 파란불이 켜지고, “이제 건너면 자동차가 우리를 기다려줄 거야”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는 현실을 경험해야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면 무엇이 이루어지는지, 바르게 앉아서 먹으면 무엇이 이루어지는지 등을 약속하고 그런 말이 현실화되는 것을 계속 확인하면, 아이는 원래는 아무것도 아닌 말을 믿고 자신을 맡길 수 있게 된다.
각 개인이 지키고 따라야 하는 사회적인 가치와 규칙이라면 그렇게 각 개인에게 힘이 되고 유리한 지점을 갖고 있어야 하고, 부모가 아이를 그 영향 속으로 이끌고자 한다면 그런 가치와 규칙에 대한 생각이 현실 속에서 어떤 결과와 행동을 만들어내는지를 경험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런 부모의 역할은 권위를 갖고 규칙을 강조하거나 아이와 친해져서 서로를 기쁘게 하는 축에서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이의 사회화, 아이의 규율화를 안내하고 싶은 부모라면 무엇보다 먼저 약속할 줄 알고, 그것을 지킬 줄 아는 부모로서, 아이에게 말의 선행이 어떻게 구체적인 현실을 만들어내고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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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련(정신분석학 박사)
한스아동청소년상담센터에서 정신분석 임상을 실천하고 있다. 『잃어버리지 못하는 아이들』을 썼고, 『자크 라캉 세미나 11』, 『정신분석』 등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