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래의 만화절경] 몸과 몸뚱이와 몸짓
김미래 편집자가 소개하는 앨리슨 백델의 『초인적 힘의 비밀』.
글 : 김미래
2025.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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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갈색 책상에 놓인 노트 위로 몸을 굽히고 혀를 문 채 만년필로 무언가 쓰는 중이었다. (……) 아이는 쓰기를 끝내고 낭송하기 시작한다. 


“내가 상상하는 보다 멋진 생활. 너무 춥지도, 너무 덥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항상 미풍이 불고 그것이 어느 때는 폭풍으로 돌변해 웅크리고 앉게 되면 좋겠다. 집들은 빨간색이고 숲은 황금색이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이든 모르는 것이 없어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었으면 한다. 섬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거리에는 자동차들이 언제나 문이 열린 채 세워져 있어 피곤하면 아무 때라도 탈 수가 있지만 도대체 피곤하다는 일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자동차는 주인이 없다. 자고 싶을 때 자고, 비는 절대로 내리지 않는다. 친구들은 경우에 따라 그때마다 네 명이면 된다. 그 밖의 모르는 사람들은 없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이든 모르는 것은 사라져라.” 


— 페터 한트케, 홍경호 옮김, 『왼손잡이 여인』(범우사, 1977)

 


글이 안 써질 때는 누군가 무엇이든 열심히 쓰고 있는 장면을 찾아 읽는다. 이런 장면을, 그것도 책 안에서 찾기란 어렵지 않다. 거의 대부분의 소설, 적지 않은 산문집, 절대 다수의 논픽션에서 ‘쓰는 자기’는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며, 그 모습은 쓰기를 완성했다는 증거(책)로서 독자 손에 쥐인다. 이때 읽는 사람은 적어도 이입이라는 독서의 가장 자연스러운 작용을 통해서 쓰는 사람 되는 리허설을 할 수 있다. 그렇게 오늘은 왼손잡이 여인의 작은 소년이 되어 글을 쓰고자 시도한다. 마침 내가 쓰려는 것이 거의 내가 모르는 것이기에. 모르면서도 내 안에 있다고 하는 내 것이기에 이번 작문에 약간의 아이러니와 약간의 도전의식을 느낀다.   


사실 이 작문은 한참 늦었다. 마감이 정해져 있는데도. 아니, 마감이 정해져 있기에 늦은 것일까? 마감이 없다면 애초에 늦을 수도 없었을 테니. 마감에 늦으면서도 아침을 거르지 않는 뻔뻔함.(저작운동이 뇌의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던데?) 인절미 몇 조각과 두유 한 잔. 마트에서 산 1리터짜리 두유 겉면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모든 일이 잘되고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씨리얼에 타 먹으면 충분한 한 끼 식사가 된다고 광고하는 이 고소한 음료는, 무균포장으로 위생적이고, 실온에서 보관 가능하다. 무균, 포장, 위생, 실온, 보관. 어떨 때는 지극히 일상적인 단어들이 모두 굉장히 전문적이며 특수한 상태와 상황을 기술하는 것처럼 읽힐 수도 있구나. 


‘모든 일이 잘된다’와 ‘건강하다’, 이 두 가지 병렬된 희망은 어떻게 연관되어 있나. (1) 모든 일이 잘되려면 우선 건강해야 할 것이다. 건강을 우선적으로 지켜서 모든 일을 잘 해내보자. (2) 잘되는 모든 일 안에는 분명 ‘건강’이라는 카테고리가 포함되어 있다. 모든 일이 잘된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말이므로, 둘은 소속관계다. (3) 드물지만 모든 일이 잘 돌아가야만 ‘건강’할 수 있는 상황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유병자의 관점? 이는 내가 최근 획득한 관점이기도 하다. 모든 조건이 도와주면 비교적 건강할 수 있고, 이러한 양호한 상태를 덜 잃거나 천천히 잃을 수 있다. 웰빙은 모든 것이 제자리에(well) 있어줌(being)으로써 가능하다. 제 기능을 하는 모든 컴포넌트가 팀플레이어가 되어주기를.


 

본래 나는 건강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힘’에 관해서는? 힘에 기반한 수행에 있어서는? 지나칠 정도로 동경이 가득했다. 그러니  앨리슨 벡델의 『초인적 힘의 비밀(The Secret to Superhuman Strength)』(2021)에 눈길을 뺏기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이 책이 국내에 출간된 이후 나는 이 책을 적어도 대여섯 번 읽었다. 읽을 때마다 질리지 않았고, 읽을 때마다 새로운 독서를 선물받았다. 이상하게도 이 만화책은 다른 만화책을 읽고 싶게 하기보다 다른 시를, 소설을, 철학을 읽고 싶게 만들거나 다른 유용하고 실질적인 스포츠 서적을 찾아 읽도록 유도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는, 다른 연쇄적인 독서가 불가피함을 받아들이고, 며칠의 여유를 잡고서, 마치 내 방 안을 작은 안식공간처럼 꾸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던 것이다. 더불어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기지개를 펴고 여러 가지 동사(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 출판사의 이름이 ‘움직씨’인 것도 놀랍지 않다.)에 몸을 맡길 수 있게 된다.  


『초인적 힘의 비밀』은 보디빌딩부터 피트니스, 아웃도어 스포츠, 주짓수와 같은 아시아 무술, 요가와 같은 치유성 수련의 대중적인 유행을 연대순으로 훑으며, 자신이 거친 시대와 시대에 맞게 형성해나간 자기의 몸을 보고하는 책이다. 만약 이 책을 읽지 않고 여기까지만 설명을 들었다면 당신은 만화가 특유의 냉소적이고 솔직한 태도로 대중유행을 질타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상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사실은 더한층 만화답게도, 이 책은 유행하는 스포츠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진화하는 스포츠웨어에 깊이 감사하며, 시대별 스포츠에 푹 몸을 담그며 살아온 덕에, 몸의 변화, 즉 노화와 질병, 에이징커브를 맞으며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재정립해나가는 아마추어 스포츠인의 끝없는 열정을 보여준다. 평생에 걸친 신체적 건강에 관한 열정, 평생에 걸친 ‘영혼 담는 바구니’의 단련을.       


베이비 붐 세대 끝자락에 태어난 앨리슨은 “텔레비전 다이얼을 돌리려고 일어나는 것 말고는 운동하지 않았”고 “지칠 정도로 근육을 쓰지도, 극한을 느낄 때까지 몸을 단련하지도, 스키나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울퉁불퉁한 길을 기가 막히게 달리지도 않”던 편안한 시기를 지나 “지난 60년간 새로 생겨난 운동이란 운동은 거의 다 해”본 사람이 된다. “육체의 고행 없이 나는 껍데기에 불과해.”라고 단언하는 사람이 된다. 


이 책의 제목인 “초인적 힘의 비밀”은 체구가 작은 꼬마 앨리슨이 속아서 산 엉터리 주짓수 교본의 제목이기도 하다. 인간을 넘어선 힘을 갖고 싶다는 허무맹랑한 욕망은, 한순간이나마 자아를 벗고 싶다는 보편적인 소망이기에. 60년간 겪은 ‘자기초월’의 역사를 담은 회고록의 제목은 그때 그 엉터리 교본을 따를 수밖에.


앨리슨의 이전 두 회고록(『펀 홈(Fun Home)』(2006), 『당신 엄마 맞아?(Are You My Mother)』(2012))을 읽은 독자라면 알 수 있는 사실들: 그의 아버지는 스스로 죽음을 택했고, 그의 아버지와 그는 퀴어 정체성을 공유하며, 그는 뉴욕에서 만화가로 살다가 버몬트의 자연으로 삶의 터를 옮겼다. 그의 끝없는 신체적, 정신적 계발(과 그 욕구)의 배경이 되는 사실들이다. 『초인적 힘의 비밀』의 각 장은 인생 10년을 담고 있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세상을 궁금해하던 어린이가 스스로를 누를 정도로 자의식이 압도적인 청소년을 거쳐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규정받는 성인기를 통과하고, 운동상의 기량은 줄어들었을지라도 상상력과 직관을 따를 수 있는 자유의 노년에 드디어 이르게 된다. 직업적인 면에서 레벨업한 앨리슨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집필하고, 여러 대중강연에 초청받는 인사가 되었지만, 아직 해야 하고 그려야 하고 쳐내야 할 과제가 많다. 늘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 과제의 롤이다. 얼마 전에 어머니는 대장암 진단을 받았고, 어머니를 돌보고 그와의 험난한 관계를 이해할 새로운 힘이 요구된다. 인간을 벗어나는 힘, 무엇보다 자아의 감옥에서 스스로를 해방해줄 힘이.


아직도 내 눈은 두유 포장지에 머물러 있다. 두유에는 내게 필수적이라고 하는 비타민D가 풍부하다. 비타민D의 섭취만 충분했어도 걸리지 않았을 병이라는 말도 들었다. 이전의 나라면 신경도 안 썼을 ‘고형분’이라는 말도 눈에 들어온다. 고형성분이 늘어나면 위험하다. 줄어들거나 없어질 확률은 희박하지만,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대두고형분 7% 이상, 원액두유는 94.5%. 대두는 외국산이고 여기 든 기름은 채종유이지만, 일단은 밀가루가 들어 있지 않아서 알러지 반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에는 알려져 있다시피 ‘초인(Übermensch)’이 등장한다. 벡델의 초인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원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초인을 이야기하는 그 책에 얼마나 많은 ‘몸’과 ‘몸뚱이’와 ‘몸짓’이 등장하는지! 시를 짓고 몽상하고 부러진 날개를 퍼덕일 때도 우리가 원하는 것은 몸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병든 자들에게 온화하다는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이 병에서 낫고 극복하여 더 높은 몸을 만들기를 바란다. 도구가 되는 것은 몸이 아니라 정신이라면서. 우리의 영혼을 쥐고 있는 것은 우리의 몸이라고? 의심할 여지없이 역사를, 삶을 통과해가는 것은 형성 중인, 싸움 중인 몸일 것이다. 점점 이기기 힘든 싸움을 치러나가는 것은 영혼보다는 몸인 것 같다고 느끼는 정신이, 느끼게 하는 몸이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소년의 정신을 따라 나의 손으로 써본다. 

 

내가 상상하는 보다 멋진 생활. 너무 춥지도, 너무 덥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이든 모르는 것이 없어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었으면 한다. 

 

그리고 무엇이든 모르는 것은 사라져라.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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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적 힘의 비밀

<앨리슨 벡델> 글그림/<안서진>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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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엄마 맞아? : 웃기는 연극

<앨리슨 벡델> 글,그림/<송섬별>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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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 홈

<앨리슨 벡델> 글,그림/<이현> 역

출판사 | 움직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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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래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한 후 2010년 문학교과서 만드는 일로 경력을 시작했고, 해외문학 전집을 꾸리는 팀에서 일하면서 새로운 총서를 기획해 선보였다. 책을 둘러싼 색다른 환경을 탐험하고 싶어져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의 출판 분야에서 매니저로 지냈고, 현재 다양한 교실에서 글쓰기와 출판을 가르친다. 출판사뿐만 아니라 출판사 아닌 곳에서도 교정·교열을 본다. 편집자는 일정한 방침 아래 여러 재료를 모아 책을 만드는 사람이다. 다만 방침을 만들고 따르는 일에 힘쓰면서도, 방침으로 포섭되지 않는 것의 생명력을 소홀히 여기지 않으려고 한다. 직접 레이블(쪽프레스)을 만들어 한 쪽도 책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낱장책을 소개한 것도, 스펙트럼오브젝트에 소속되어 창작 활동을 지속해 온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창작자, 기획자, 교육자 등 복수의 정체성을 경유하면서도 이 모든 것은 편집이므로 스스로를 한 우물 파는 사람이라 자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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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슨 벡델

앨리슨 벡델은 타임즈, USA투데이, 슬레이트, 반즈&노블 베스트북, 아마존 스테디셀러 그래픽 노블 작가이자 전 세계에서 공연되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펀 홈]의 원작자이다. 람다 문학상, 스톤월 문학상, 버몬트 최고 만화가상, 전미비평가상 최종 후보 선정을 포함해 여러 상을 휩쓴 여성 퀴어 서사 분야의 자랑스러운 개척자이다. 2015년 7월 동료 화가이자 동성 배우자인 홀리 래 테일러와 결혼해 현재 버몬트주 치튼던 카운티의 볼톤에 살고 있다. 1983년부터 25년에 걸쳐 신문에 연재한[주목할 만한 레즈비언들(DYKES TO WATCH OUT FOR)]은 현대 레즈비언의 삶을 시각적으로 그려 낸 연대기로 ‘만화계에서 흔치 않은 탁월한 대작’이라 평가받았다.[펀 홈 FUN HOME]은 그의 첫 베스트셀러 그래픽 노블이자 영문학사에서 대단히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획득한, ‘아버지’에 관한 회고록이다. 출판되자마자 주요 언론 매체에서 주목할 만한 올해의 책으로 꼽았다. [당신 엄마 맞아? ARE YOU MY MOTHER?]는[펀 홈]의 연속선상에 있는 자전적 서사이자 현대 여성의 표본인 ‘어머니’에 관한 회고록이다. 클로짓 게이인 아버지 브루스 벡델의 비밀과 희비극에 가리어진 어머니 헬렌 오거스타와 레즈비언 딸 앨리슨 벡델의 삶과 냉소적인 태도, 은밀한 열정의 교차점에 대해 쓴다. 버지니아 울프, 에이드리언 리치, 실비아 플라스 등의 문학 작품과 수전노, 소야곡, 로얄 패밀리 등의 연극을 비롯해 도널드 위니캇과 앨리스 밀러, 프로이트, 라캉 등의 정신 분석학 개념까지 솜씨 좋게 다룬 유쾌한 문제작이다. 그는 현재 여러 매체에 활발하게 만화를 실으며 다음 작품을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