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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련의 엇갈린 관계] 울분, 분명하고 투명한 삶의 균열

<월간 채널예스> 202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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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정한 모델이 되기를 열렬히 추구하는 사람. 하지만 애초에 그런 모델이 정해진 사연에는 스스로가 강하게 부인하고 방어해야만 하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2020.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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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유학 시절, 교수님에게 들었던 사례가 있다. 어린 시절부터 무난하게 성장하여 소위 사회적인 성공을 이룬 30대 중반 남성. 이전까지 별 문제없이 안정된 생활을 하던 그의 삶이 같은 부서에 새로 들어온 동료직원과의 관계 때문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엔 큰 문제가 없었다. 그저 사는 방식이나 가치관이 자기와는 조금씩 다를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작은 차이가 자꾸 신경이 쓰이고 거슬리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삶을 좀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자기와 다른 사회에 대한 시선, 종교관, 연애에 대한 의견 등 처음엔 별 것 아닌 것 같았는데 어느새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그러면서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 충동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필자에게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사회규범에 어긋난 사고나 행동을 하지 않았고, 미래에 대한 전망도 잘 세워두었고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상담자였는데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가 불쑥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두 사례 모두 그런 식의 감정 폭발로 본인과 주변 사람들이 점점 혼란스럽고 힘들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화를 내는 사람은 어떤 일이나 사람에 대해 충동적으로 반응하는 이성적이지 않은 사람처럼 보인다. 물론 그런 경우들이 있다. 자신이 받은 내적, 외적 자극에 사유나 사회적인 의례를 거치지 않고 매우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야생적인 사람들. 그런데 사례 속 상담자들은 이와 달리 매우 이성적이며 사회적인 규범도 잘 따랐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교양있는 문화인이면서도 종종 폭발적으로 화를 내는 사람들. 필립 로스의 『울분』 을 읽은 사람이라면 주인공 마커스 메스너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마커스는 “교양있고 성숙하고 독립적인 어른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살아간다. 정육점을 하는 아버지의 일을 성실히 도왔고, 착실히 공부해서 대학생이 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일탈을 의심하고 걱정하는 아버지를 도저히 참지 못하고 떠난다. “집을 떠남으로써 나는 내 목숨을 구했으니까. 아버지 목숨을 구했으니까. 그냥 있었으면 아버지 입을 막으려고 아버지를 쏘았을 테니까.” 평일엔 공부하고 주말엔 용돈을 버는 착실한 학생이었고 성적도 매우 우수했다. 하지만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행동이나 말을 하는 룸메이트들에게는 심한 욕을 하며 바로 방을 바꿔 버렸다. 대학 학생과장과의 대화 역시 마찬가지로 흘러간다. 마커스는 평소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영리한 학생처럼 지냈지만 무언가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요소가 생기면 마치 방아쇠가 당겨지듯 앞뒤 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격분한다.

 

위에서 언급한 상담자들과 마커스는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삶의 모델과 계획이 분명했던 사람들이다. 사회가 제시한 틀 속에서 자신의 모델을 찾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행동해서 이루어냈으며 앞으로의 미래도 자신이 세운 계획 속에서라면 창창하게 펼쳐질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범적이라고 흠모하는 삶의 형태이기도 하다.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삶, 결과로 가늠되는 삶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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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안을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런 반듯하고 계획적인 삶을 이루려면 사실은 많은 것들을 억압하고 방어해야 한다. 사례 속 상담자들은 특정한 사람들과 특정한 대화를 할 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 특정한 것들이 무언가 자신의 은밀한 곳을 건드렸던 것이다.  『울분』  에서의 마커스가 욕을 내뱉으며 평소의 태도를 잃는 때도 그렇다. 사실은 자신이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것들이 건드려질 때인 것이다.

 

자신이 정한 모델이 되기를 열렬히 추구하는 사람. 하지만 애초에 그런 모델이 정해진 사연에는 스스로가 강하게 부인하고 방어해야만 하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법률가가 되는 것에 관해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것이 피가 잔뜩 묻어 악취를 풍기는 앞치마를 두르고 일을 하며 보내는 삶에서 가장 멀어질 수 있는 길이라는 것뿐이었다....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피를 좋아하도록 가르치지는 못했다. 아니, 나는 피 앞에서 무심해지지도 못했다.” 

 

정해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외면하고 억압했던 것들이 어떤 계기를 통해 건드려지면 수치심이 폭발하면서 격한 반응이 일어난다.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자끄 라깡은 격노하는 것에 대해서 법, 질서, 자신의 미덕, 자신의 의지 등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을 때, 모든 것이 매우 아름다운 조화의 틀을 이루어갈 때 불현듯 끼어든 이질적인 것 때문에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이질적인 것은 그런 조화로운 틀을 망가뜨리는 방해물 같은 것인데 그와 동시에 자신이 감추고 싶은 비밀을 건드리는 가장 내밀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폭발하는 분노에 수치심이나 억울함이 더해져 농밀해진다. 이 소설의 제목처럼 울분이 되는 것이다.

 

단지 자신의 기준을 벗어난 다른 것일 뿐이라면 그런 강렬한 반응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갈등은 집에서 아버지와 시작되었다. 거기서부터 여기까지 끈질기게 쫓아왔다. 처음에는 플러서, 다음에는 엘윈, 다음에는 코드웰. 누구의 잘못일까? 그들의 잘못일까, 아니면 나의 잘못일까? 전에는 문제라고는 한 번도 일으켜본 적이 없는 내가 어쩌다 이렇게 빠르게 문제투성이가 되었을까? 그러면서 왜 불과 일년 전에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한 여자애한테 알랑거리는 편지를 써서 더 큰 문제를 자초하고 있을까?” 마커스는 사람들과 대립하는 지점의 핵심과도 같은 부분에 이미 휩싸여가고 있다. 자신이 도망치고 외면했던 것인 만큼 더 크게 몰려오는 소용돌이 속에서. 

 

질서가 안 잡히고 혼란스러운 삶은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때로는 너무 질서정연하고 안정된 삶도 문제를 일으킨다.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이 분명하고 정확히 그것을 하고 있을 때, 투명해 보이는 미래를 향해 순풍을 단 듯 흘러간다고 느낄 때 갑자기 끼어든 작은 먼지 같은 것이 온 시야를 흐리며 나를 흔들어놓을 수 있다. 고유한 체험을 통해 얻은 특별한 자신만의 기억, 생각, 취향, 습관, 욕망 그리고 극복하기 어려운 사적인 문제들이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너무 쉽게 억압되어 정리되면 그런 미세한 먼지만으로도 쉽게 폭발할 수 있는 잔여물이 남게 된다. 너무 강한 억압은 진짜 억압의 구실을 못하고, 오히려 더 큰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역설적인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런 면에서 마커스가 학생과장 코드웰을 만난 것은 진짜 비극적이라고 할 만하다. 코드웰의 입장에서 마커스의 일탈이라고 여겨진 행위들은 규범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강하게 작동해서 나타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또 다른 규범의 이름으로 강압적으로 누르려고 한 코드웰의 태도는 마커스의 울분을 점점 더 부풀릴 뿐이었다.

 

문제가 말끔히 정리된 것처럼 보이는 정갈한 현실과 계획대로 나아가면 투명하게 열릴 것만 같은 미래는 스스로 해결되었다고 믿고 외면했던 자신의 내밀한 것으로부터 발목을 잡힐 소지가 크다. 나의 복잡한 면모와 사연들이 조금은 남아있는 현실이 필요하다. 그래야 우연히 이질적인 것이 끼어들어도 발작하듯 폭발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는 실마리를 손에 쥘 수 있다. 너무 투명하지 않고 어느 정도는 가려져 뚜렷이 알 수 없는 미래가 더 견고한 삶의 길을 열어줄 수도 있다. 그래야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도 방향을 조정할 가능성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정해진대로만 가야 하는 길이라면 조금만 어긋나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인생이란 그런 거야, 발을 아주 조금만 잘못 디뎌도 영원한 비극의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거!” 그저 발을 조금 잘못 디뎠을 뿐인데 비극의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건 우리가 걷고 있는 인생의 길이 너무 좁기 때문이 아닐까.

 


 

 

울분 필립 로스 저/정영목 역 | 문학동네
주인공 청년 마커스가 결국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삶의 선택들이 결과적으로 얼마나 끔찍한 상황을 초래하게 되는지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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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수련(정신분석학 박사)

한스아동청소년상담센터에서 정신분석 임상을 실천하고 있다. 『잃어버리지 못하는 아이들』을 썼고, 『자크 라캉 세미나 11』, 『정신분석』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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