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포 2024, 『돈 덴』(문학동네)
옛날에 나는 통풍이 잘되는 가족, 혈연의 가능성이 원천 차단된 가족을 원했다. 혼자 살기는 싫었다.
시간이 흐르며 점차 누군가 한 사람을 독점하길 바라게 되었다.
남자가 죽으면 어떡하지?
작년 여름. 아침에 내린 비가 지하철 플랫폼 안까지 들이쳐 바닥에 사람만 한 물웅덩이를 만들고 있다. 나는 그 위를 지나며 모로 누운 사람을 타넘는 기분을 느끼고, 남자가 어디선가 그렇게 쓰러져 있을까 봐 전화를 건다. 그리고 더 이상 이렇게 전전긍긍하기 싫다, 남자의 애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다. 심장이 약한 남자가 갑자기 쓰러져 죽는다면 나는 막대한 슬픔을 어쩌지 못하고 빈 자궁을 채우려 할 것이고, 죽은 남자를 낳아주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힐 것이다. 이 충동은 시간이 갈수록 구체성을 띠며 진짜 계획으로 변했다. 그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특정한 아이를 갖고 싶다는 욕구를 일으켰다.
좀 친해지고 나면 머뭇거리다가 어릴 때 누가 만진 적 있어? 물어봤던 사람들. 특히 남자들은 위스키, 수상스키, 캠핑과 재즈가 취미인 여자는 전남친들 작품이라는 말을 믿길 좋아하는 데다, 아저씨가 여자애의 인생을 들쑤셔놓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접해서 나 또한 인생의 전반기에 만난 누군가에 의해 영구적으로 훼손됐다고 생각했다. 네가 너를 주무른 사람들에 의해 주조되었다고 상정해야 비로소 네 성질이 납득된다는 거였다.
나에게 성적인 트라우마가 없는 건 아니지만 심층 심리의 판게아가 쪼개질 만한 대사건은 없었다. 삶의 타임라인 모든 구간에 작은 닻이 내려져 있고, 한두 개 없앤다고 해서 BDSM이 나에게 휴식이 된다는 사실이 달라지진 않는다.
『섹스할 권리』의 저자 아미아 스리니바산은 팟캐스트 인터뷰1에서 자기 책을 소개하며 말한다. ‘여자들이 정상적인 섹스는 하되 도착적인 섹스는 거부해야 한다는 주장은 보수적인 가치체계가 주장해 온 바와 궤가 같다. 그러나 성해방 독트린이 20세 전후의 여자애들로 하여금 성적으로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압력을 느끼도록 만들고 있기도 하다.’
스리니바산은 일반론을 언급했을 뿐이지만, 이 어린 여자애들 운운은 귀에 익다. 여자들은 성적으로 실수하는 순간 인생이 마감되니까, 자라나는 여자애들이 도착적 섹스에 솔깃하지 않도록 보호하자. 숱하게 들어온 얘기다. 여자들의 인생이 왜 마감되나? 자기가 허락했던 애정 없는 섹스를 모두 실수 혹은 피해로 수렴시키지 않으면 조롱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여자가 겨우 자기의 실수를 인정하고 나면 여자의 씻을 수 없는 불명예에 대해 누구나가 떠들고, 비로소 여자를 연민할 수 있게 된 것에 후련해하며 떠나간다.
또 ‘합의 아래의 섹스라면 어떤 섹스라도 허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칵테일 속의 교묘한 위계를 간과하므로, 여자의 합의는 얼마간 밀어붙여진 것이며 본질적인 합의라고 볼 수 없다-마치 노사 합의에서 노동자가 불리하듯이-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도 있다. 여자의 비규범적 섹스를 터부시하는 지금, 법정에서 여자가 합의한 섹스라고 우기는 일이 안 일어나기라도 한다는 듯이. 합의된 섹스의 규칙을 촘촘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터부시를 벗겨내야 한다.
터부시 안으로 잠겨 드는 여자들. 이해한다는 듯이, 자기의 섹스도 자해였다고 한 여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나와 행실이 비슷하여 경계를 풀게 만들었으나 알고 보면 기제가 달랐다. 자기들을 파괴하고 싶었다고 한다. 난 자기파괴를 하는 게 아니고 나와 화해를 하는 것에 가깝다고 하면 알 수 없는 프로세스를 통해 내가 아무 남자나 환영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면 당신들의 표면에 자리한 욕망. 온기에 대한 욕망은?
나는 온기를 위해서 산다. 집에 돌아가 익숙한 냄새가 나는 살갗에 막 화장을 지운 얼굴을 부비며 잠든다. 어린애를 카트에 태운 채 식재료를 고른다. 과일이든 치즈 세트든 거침없이 담는다. 요가 매트부터 에어 프라이어까지 보기 좋게 수납된 공간이 마침내 갖춰진다. 더 모으면 휴가철에 가장 편한 교통수단을 타고 놀러 가, 3성급, 4성급, 5성급 호텔에 머물 수 있을지도. 나이 든 부모님을 방문해 핵가족 모드를 해제하고. 땀 흘리고, 투자하고, 나들이 가는 삶. 휴대폰 없이는 일을 분배받을 수 없는 지금 일꾼이 되고자 하면 어느새 손에 휴대폰이 들려 있는 것처럼, 두 명이 꽉 끌어안고 늙길 원하다 보면 어느새 이런 온기 모델 속으로 유인된다. 이런 온기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애를 기른대도 질문받지 않는다.
이희주 작가의 단편 「최애의 아이」의 우미는 최애 아이돌 유리의 아이를 낳아 어떻게 잘 기르고 싶었을까. 아빠의 후광을 두르고 범부들 가운데서 떠오르도록?
유리의 아이는 스타가 될 것이니 무리로부터 격리되어도 상관없다. 우미는 유난이다, 학대다 같은 말을 고스란히 들으면서 지내겠지만 아이의 출처가 우미를 견디게 할 것이다.
부모는 아이를 위해서라도 정상 궤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애가 다른 애들과 어울리며 무리 짓기를 배울 수 있도록 주류의견을 흉내 내게 둬야 한다. 삶을 차렷시켜야 한다. 거부한다면 애가 무리로부터 내쫓기는 모습을 볼 각오를 해야 한다.
대안적인 관계를 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하는 섹스가 자해라고 일컬어지는 상황에서, 내 선택은 선택보다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발현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내 생활이 자해가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방법은 사랑받기 뿐이다. 즉 내게 실은 권한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결혼하고, 남자의 유언장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면 된다. 온기 모델 속으로 초대받는 것이다. 나도 그걸 원한다. 남자로부터 사랑을 증명받을 모델이 그것 말고 안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보수적인 남자에게서는. 결혼을 안 하고 애만 낳으면, 사람들이 쏴대는 넌 헐값에 팔렸어 라는 신호를 받아내야 한다. 아직 자궁이 썰렁한 지금도 이미 충분히 많은 여자친구들이 기습적으로 나를 업신여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에겐 그게 없다는 듯이, ‘난 자존심이 있어서.’
나로 말하자면, 아버지 손을 잡고 버진 로드에 등장해 남편에게 넘겨지는 결혼식을 하는 편이 자존심이 상할 것 같다.
사랑하는 상대의 행복을 빌어 주는 것이 사랑, 닿을 수 없어도 뿌듯한 게 사랑, 드잡이하지 않고 희생해야 사랑이라고. 나는 조언을 이끌어내는 체질이기 때문에 그런 말도 들은 적이 있다. 어떻게든 더 연결되려고 하는 건 자기애라고. 그런 사랑도 있지. 그렇게 운치 있는 사랑보다는 인생을 2인용으로 확장시키는 사랑이 하고 싶을 뿐이다.
우미는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아이돌의 애를 낳는 여자이기 때문에 국가에 의해 막 다뤄도 되는 인생으로 찍힌다. 2인용으로 확장 공사를 마친 우미의 인생은 파일럿판 인생인 걸로 협의가 돼 버렸다. 유리는 자기 이름이 쓰이는 저출산 정책에 얼마만큼 관여했을까? 그냥 사인만 하고 잊어버렸을까. 우미는 태어난 아이가 자기 아이일지라도 사랑할 수 없다. 우미의 사랑은 헐값이라니까, 그까짓 걸로 아이를 기를 순 없다.
우미는 유리의 아이만을 원한다. 다른 애는 안 된다. 여자가 애를 낳으면 아빠가 누군지 따지고, 아빠가 누군지 몰라선 안 되는 것이 가부장제의 척추이기 때문에 ’바로 그 정자‘, ‘바로 이 몸의 정자’에 집착하는 것은 언뜻 가부장제를 흠뻑 수용한 태도처럼 보인다. 여자의 섹스를 어디까지 허용하느냐 하는 갑론을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여자를 임신시킨 건 누구냐는 질문에 도착한다.
가부장제에 저항하려면 아빠를 따져선 안 될 것만 같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빠를 찾는 주체다. 가부장제의 폐해는 남들까지 아빠를 찾아다니고 외간 남자의 애가 아닌지 따지게 만든다는 점이다. 아빠를 따져도 되는 건 우미 뿐이다. 아빠가 누구라도 상관없다? 우미가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 우미의 아이이니까.
내가 오로지 남자의 애를 낳아 기르고자 하는 열망으로 외국인 싱글맘이 된다면, 설령 사실혼 관계에 있다고 해도 나는 실수한 여자로 낙인찍힌다. 거기에 ‘결혼해 주지 않은’ 남자를 원망하지도 않는다면 위신이 위태로워진다. 만일 애가 나처럼 ‘자해 섹스를 하는’ 애로 자란다면 그건 기질이 아니라 결핍 문제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피해밖에 몰라서 피해를 동냥하러 돌아다닌다고. 그러나 당신들이 걔의 합의를 믿지 않으면 걔도 당신들의 합의를 믿지 못한다.
세상에 수긍하기 때문에 전혀 진보적이지 않은 남자, 같은 이유로 애국자도 아닌 남자, 물살에 몸을 맡긴 남자를 찾아 그 손에 목을 갖다 댈 때 가슴 속의 공이치기가 뇌관을 때리며 뉴스와 공익광고가 다루지 않는 온기가 온몸에 퍼진다.
반골 남자가 목을 조르게 둠으로써 그가 여자 목조르기를 통해 구조적 억압을 저주하거나 자기 격 떨어뜨리기를 만끽하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다. 요컨대 역할이 겹치는 게 싫다. 애국자들의 자기 연민도 참을 수 없다. 순응적인 남자의 손아귀에 있을 때 나는 그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누명을 쓰진 않는다.
『토니오 크뢰거』에 남아 있는 엄마의 메모를 발견했을 때, 나는 엄마가 딸을 그렇게 음침한 모습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데에 충격을 받았다. 토니오 크뢰거의 기질을 보여주는 대목에 밑줄을 긋고, 여백에 내 이름을 적어둔 것이다.
딸의 어느 구석에서 토니오 크뢰거를 발견한 건지 돌아가신 엄마한테 물어볼 수는 없다. 작중 예술가 떡잎인 토니오 크뢰거는 둔한 미남 한스 한젠을 동경하며 경멸하고, 나름의 성공을 거둔 후에도 한스 생각에 뒤척인다. 어쩌면 엄마는 한스 한젠에 대한 내 애증을 알아본 걸지도 모른다. 토니오 크뢰거가 감정하는 한스의 미덕은 지배자의 미덕이 아닌 순응자의 미덕이다.
그런 남자가 돌연사할까 두려웠다. 지금도 두렵다.
우미의 말에 의하면 좋아하는 남자의 애를 낳고 싶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당연한 일에 나는 자꾸 설명을 요구받고, 그럴 때마다 너를 고칠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을 떠올린다. 나를 고쳐? 그는 못 했지만 누군가는 했다. 바로 그 아이만을 낳고 싶다는 열망이 최초의 충동을 씨앗으로 멋대로 자라나, 날 앞질러 간다.
난 초등학교를 자퇴했다. 내가 낳은 애가 무리생활에 잘 적응할 것 같지 않다. 반대로 유순하다면 그걸 못마땅해하지 않을 자신도 없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걸 겪지 못하면 나는 어린 토니오 크뢰거인 채로 남게 된다. 한스 한젠을 핥듯이 지켜보는 창작자가 된다. 그러는 대신 한스의 내부에 나를 쭉 짜 넣고 싶다. 한스의 일부를 만들고 싶다. 한스의 아이는 한젠을 미들네임으로 가진 크뢰거가 된다. 당신이 새것 같은 소년을 원하듯 나는 엎어진 모래시계처럼 맹렬하게 나이 드는 남자를 원하고, 내가 만나지 못한 젊은 시절을 만나보고 싶어진다...모래가 다 쏟아지기 전에.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만리포
메뉴 하나를 자주 먹는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만들며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