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살면서 한 번은 겪는다는 ‘인생 노잼 시기.’ 뭘 해도 재미없고 내 인생만 특별하지 않은 것 같은 바로 그 시기 말이다. 그럴 땐, 『송아람 생활만화』 가 특효약이다. 이 유쾌한 만화는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 경쟁부문에 진출한 『두 여자 이야기』 를 그린 송아람 만화가의 일상을 보여준다. 작가의 이야기라니 뭔가 특별할 것 같지만 우리와 다를 바 없다. 일하기 싫어 ‘멍 때리고’ 친구를 만나면 잠시 기분이 좋아졌다가 오늘 아무것도 안 했다는 기분에 한없이 가라앉기도 한다. 그러나 반복되는 일상이기에 느낄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이 있다. 문득 들려온 기분 좋은 음악, 가족과 나누는 대화, 커피 한 잔의 여유 등 사소한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누군가 이 한심하고 게으른 생활만화를 보면서 기꺼이 자기만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송아람 저자를 서면으로 만났다.
스케치북과 달력 뒷면에 그린 만화
2019년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 경쟁부문에 진출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송아람 생활만화』 에서도 앙굴렘에 다녀오신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당시의 기분이 어떠셨는지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현재의 소감도 궁금합니다.
관련 소식은 공식 발표 20일 전쯤 『두 여자 이야기』 를 프랑스 출판사에 소개해 준 에이전시 대표님을 통해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얼떨떨했어요. 제 책이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된 것도 처음이고, 출간된 지 1달여밖에 안 됐거든요.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을 앞두고 인터뷰와 강연 자료를 준비하면서 조금씩 실감 나기 시작했어요. 반면 앙굴렘 가기도 전에 축하를 너무 많이 받아서 정작 앙굴렘 가서는 감흥이 없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현지 분위기는 제 생각과 전혀 달랐고, 현지 독자들의 만화에 대한 관심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자면, 프랑스에서는 만화라는 장르가 그 자체만으로 방탄소년단 못지않게 대접받고 있다고 할까요. 게다가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주목받는 작품은 주류 상업 만화도 있지만, 대부분 제 만화처럼 개인적인 이야기들이었어요. 결과적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벌써 1년 가까이 지나 다시 2020년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 기간이 돌아왔는데, 덕분에 바쁘고 설렜던 그 무렵을 함께 여행했던 식구들과 추억 삼아 얘기하곤 합니다.
앙굴렘에서 해외 독자들을 만나셨어요. 사인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을 옮겨놓은 페이지가 인상적이었는데요. 외국 독자들은 『두 여자 이야기』 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시다면요?
행사장의 인파와 소음 때문에 일일이 이름을 물어보기 힘들었어요. 좀 더 효율적으로 사인을 하기 위해 공책에 이름을 적어달라고 했는데, 그게 결국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이 되었죠. 외국은 독자층이 정말 다양해요. 특히 나이가 지긋한 독자들이 많았어요. 남, 녀 가릴 것 없이요. 젊은 두 여자를 앞세운 표지 때문에 당연히 젊은 여성 독자가 많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노년의 독자들이 제 책을 꼼꼼히 살펴보고 이것저것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사인도 더 정성스럽게 하게 되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음속 이야기도 나누게 되었어요. 책에 대한 소감을 나누기도 했고요.
특히 강연이나 북토크 할 때 『두 여자 이야기』 의 주제인 여성의 삶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프랑스도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진 않더라고요. 페미니즘은 프랑스에서도 과거의 지나간 이슈가 아니라 현재의 뜨거운 이슈였고, 그래서 강연이나 북토크가 갑자기 성토의 장이 되기도 했어요. 각 나라의 불합리한 가부장적 전통 따위를 비판하면서요. 그들과 언어와 문화는 달랐지만, 그때만큼은 그런 것들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첫 책 『자꾸 생각나』가 출간되었을 때, 이상하게도 슬픈 감정이 들기도 하셨다고요. 이번 『송아람 생활만화』 이 출간되고 나서 어떤 느낌이 드셨나요?
아쉬움이 컸어요. 모니터로 수없이 확인했지만, 막상 책으로 접하면 느낌이 다르더라고요. 이전에 두 권의 책을 출간하면서 내용뿐만 아니라 만듦새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여기 여백을 더 줬으면 어땠을까, 이 그림의 배치는 좀 다르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 등의 아쉬움이 생겼죠. 물론 마냥 아쉽진 않아요. 부족한 만듦새에도 재밌다며 내용부터 봐주는 독자를 만나면 새삼 깨닫거든요. 알맹이가 있어야 그럴싸한 껍데기도 있을 수 있는 거니까요.
바쁘신 와중에 ‘생활만화’를 그리시는데요. 보통 언제, 어떤 기분일 때 ‘생활만화’를 그리시나요?
너무 바쁘거나 심적으로 여유가 없을 때에는 생활만화를 그리지 않아요. 주로 일하는 도중 딴짓하고 싶을 때, 혼술하다 외로울 때, 일하기 전 손부터 풀고 싶을 때 그렸어요. 약속 시간에 일부러 일찍 나가서 카페에 앉아 그리기도 하고요.
작가님은 주로 손으로 작업하시나요? (왼손잡이시지요?) 여행이나 산책할 때도 스케치북을 가지고 가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나오는데요. 주로 어떤 작업 과정을 거치시는지 소개 부탁드려요.
외출할 때 스케치북을 항상 들고 다니지만 펼쳐 보지도 않을 때가 더 많아요. 하지만 여행 다닐 때는 꼭 혼자 있는 시간을 따로 만들어서 그림을 그리려고 해요. 색다른 장소에서 그림 그리는 게 재밌으니까요. 작업실은 집 바로 아래층이라 수시로 드나들어요. 장편 작업할 때는 작업실에서 살다시피 하지만 생활만화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집이나 카페, 도서관에서 그리기도 해요. 요즘처럼 장편 작업이 손에 안 잡힐 때는 작업실을 아예 며칠씩 비워두기도 하고요. 규칙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죠. 손으로 종이에 그리는 작업을 선호하지만, 최근에는 아이패드 사용법을 익히고 있어요. 외주 작업할 때 너무 유용하더라고요. 참, 저는 그림은 왼손으로 그리고 글씨는 오른손으로 쓰는 양손잡이입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책을 만드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다고 하셨어요. 낙서처럼 그린 그림을 새로 다듬고 순서도 다시 배열하셨다고요. 어떤 점이 어려우셨고, 고민을 많이 하셨는지요?
스케치북에만 그림을 그렸다면 스케치북을 통째로 옮기면 되니까 어렵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A4용지, 달력 뒷면, 아이의 연습장 등 아무 데나 그려 놓은 그림을 모으다 보니 책 판형에 맞게 그림을 재배치해야 했어요. 너무 막 그린 그림은 다듬을 부분도 많았고요. 무엇보다 가독성을 위해 글씨를 정리하는 일이 손이 많이 가고 시간도 오래 걸렸어요. 책을 이미 보신 분이라면 대체 어디를 다듬고 정리했냐고 하시겠지만요.
『송아람 생활만화』 에는 너무 사소해서 기록할 생각조차 못 했던 일상의 순간들이 있어요. 이를테면, 아침에 일어난 직후 부은 내 얼굴이 너무 못생겼다고 느껴질 때, 하루 종일 뭔가를 했지만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은 찝찝함 등이요. 이런 순간을 만화로 그리는 건 작가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심심해서 뭔가를 끄적이고 싶은데 각 잡고 내용 있는 만화를 그리긴 귀찮고, 한마디로 '아무말 대잔치' 같은 만화를 그리는 거죠. SNS에 별 의미 없는 포스팅이나 하고 싶은데 글보다 그림이 '좋아요'를 많이 받으니까 휘리릭 그려서 올리기도 하고요. 실제로 내용 없는 만화를 올렸을 때 반응이 좋더라고요. 넵, 관종입니다. 하지만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그리는 모든 순간이 즐거웠다
대구에 사는 친구를 방문하는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육아하는 친구를 만날 때,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요?
그 친구가 『두 여자 이야기』 의 '서공주'라는 인물의 모티브가 된 친구예요. 그 친구와는 서로 미혼일 때 서울 홍대나 친구 자취방에서 밤늦게까지 술 마시면서 놀았다면, 현재는 제가 시댁(경북 왜관)에 내려갈 때마다 하루 정도 시간을 내서 대구로 친구를 만나러 가요. 그 친구도 결혼해서 지금은 대구에 살거든요. 각자 아이를 데리고 만날 때도 있고 둘만 만날 때도 있는데, 화제가 육아나 결혼생활로 많이 바뀌었죠. 자주 만나는 편도 아니고, 지금은 만나도 서로 돌아가야 할 가정이 있다 보니 늘 시간에 쫓기는 편이에요. 못다 한 이야기는 문자로 주고받고요. 항상 다음에 만나면 끝장을 보자는 말뿐인 약속을 하지만, 이렇게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여행지에서 작가님은 누구나 아는 화려한 건물 보다, 조용한 방의 모습이나 공연, 지하철역, 카페 등의 풍경을 담아내셨어요. 여행하실 때, 어떤 순간을 좋아하시고, 또 그림으로 남기고 싶다고 생각하시나요?
여행을 계획해서 가는 편은 아니에요. 미국에 사는 친언니의 결혼식에 참석하거나, 앙굴렘 만화축제에 초대를 받는 등 기회가 생겨서 갔다가 겸사겸사 가족 여행까지 하고 오는 거죠. 해외에 사는 친구나 친척을 만나기도 하고요. 여행도 생활의 일부라고 생각해서 특별히 꼭 어딜 가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은 없어요. 숙소 주변을 가볍게 산책할 때도 있고, 발길 닿는 대로 최대한 멀리까지 무작정 걷기도 하고요. 유명한 장소보다는 도시의 골목을 헤매고 다니는 걸 좋아해요. 식당도 소문난 맛집보다 눈에 띄는 조용한 곳이 좋고요. 가장 중요한 건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거예요. 저는 물론 남편도, 아이도 혼자만의 시간이 없으면 안 돼요. 각자 쉬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등 충분히 자기만의 시간을 가져야 해요. 그래야 함께 있는 시간이 더 즐거워지거든요.
‘인생 노잼 시기’를 그린 에피소드가 너무 공감됐어요. ‘인생 노잼 시기’가 찾아올 때, 작가님은 무엇을 하나요?
저는 행동반경이 좁은 편이에요. 우울감은 수시로 찾아오는데, 그럴 때마다 사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이가 학교에 있는 동안에는 눈치 안 보고 마음껏 늘어져 있어요. 아이가 집으로 돌아오면 억지로 몸을 일으켜 저녁을 먹고, 일하는 척하기도 하죠. 술을 마시기도 하고요. 술 마시고 기분이 조금 괜찮아지면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막춤을 추기도 해요. 하지만 이런 감정이 오래 지속되면 위험하니까 얼른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스스로를 닦달하는 편이에요. 요가도 저를 닦달하는 방법 중 하나예요. 딱히 요가를 좋아해서가 아니라요.
이 책은 작가님의 가족 이야기이기도 해요. 가족끼리 친밀하면서도 서로의 시간을 존중해주는 것이 느껴집니다. 남편, 아이와 소통하며 새롭게 느낀 것이 있다면요?
우리 집 세 식구가 함께한 지 올해로 11년째예요. 남편과 저는 이제야 조금 서로를 알 것 같지만, 아직도 예고 없이 싸움이 터질 때가 있어요. 같이 사는 동안은 계속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 아닌가 싶어요. 서로에 대해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면, 그만큼 재미없는 관계도 없겠지요. 같이 있으면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면서도 혼자만의 시간을 간절히 원해요. 그건 아이도 마찬가지고요. 아이에게도 존중받아야 할 사생활이 있고, 남편이나 저는 아이의 그 사생활을 최대한 지켜주려고 해요.
그런데 아이가 학년이 점점 올라갈수록 그것도 말처럼 쉽지 않아요. 아이에게 본격적인 사춘기가 찾아오면 우리 관계도 지금과는 많이 달라지겠죠. 또 저는 늘 걱정을 앞세우는 편이라 크고 작은 불안을 떠안고 살아요. 남편도 속으로는 저와 같을 수 있겠지만,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희망적인 말을 해요. 저를 안심시키려고. 그럼 저는 남편의 그 한마디에 의지하기도 해요.
이 책을 덮을 때쯤 독자가 ‘송아람’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느꼈으면 좋겠나요?
저를 판단하는 건 독자들 몫 아닐까요. 저는 이 만화를 그리는 모든 순간이 즐거웠어요. 제 스케치북 안에만 존재하던 만화가 책으로 만들어진 건 덤이라고 생각해요. 책을 반쯤 읽다 덮을 수도 있고, 화장실에 두고 스마트폰 대용으로 삼아도 좋아요. 책을 다 읽은 후 아무것도 남지 않아도 좋아요. 하지만 이 책으로 제게 어떤 고정된 이미지가 생긴다면, 그건 좀 무서울 것 같아요.
* 송아람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술을 마시는 걸 좋아한다. 어렸을 때부터 만화가가 되길 꿈꿨으나 법대생이 되었다. 재학 중 우연히 출판 만화 강좌를 듣게 되었고, 수료 후 곧장 만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07년부터 자전적 내용의 만화를 꾸준히 발표하고 있으며, 대표작으로 『자꾸 생각나』와 『두 여자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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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생만송아람 글그림 | 북레시피
별다를 것 없는 하루하루, 온갖 일들이 벌어지는 그 안에서 자연스레 만들어지는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작가 자신의 마음과 행동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솔직한 만화다. 마치 우리네가 매일 살아가는 일상처럼 말이다.
김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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