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 몸이 근질근질하고 갑갑해서 창문을 활짝 열어보니 봄입니다. 보고 싶은 얼굴이 아른거려 그에게 무작정 전화 건 날, 아직 추워도 화분을 엎어 묵은 흙에서 화초 뿌리를 골라낸 날, 문득 봄이 왔습니다. 봄의 독서는 머리보다 몸이 이끄는대로 하게 됩니다. 최근에는 『버지니아 울프의 정원』(캐럴라인 줍 지음, 메이 옮김, 봄날의책)에 푹 빠져 남의 집 구경을 샅샅이 했습니다. 아, 얼마나 재미있던지요. 그후 다시 읽는 버지니아 울프의 글은 훨씬 생기가 돌고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좋은 기운을 받아 집 구석구석에 놓인 화분들도 잘 돌보려 애써봅니다. 요며칠 가재발 선인장에서 돋아나는 깨알만한 신엽들이 큰 기쁨을 줍니다. 저 작은 것들이 전해오는 활력이 대단합니다. 곧 초록이 세상을 뒤덮는 여름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무얼 봐도 무감하고 덤덤해지겠습니다만, 그렇기에 이 짧은 호들갑의 순간이 소중해집니다. 작고 작은 것을 더 눈여겨보게 하는 계절, 아름다운 봄이 왔습니다. 오늘은 봄이 이끌어주는 대로 골라본 시집들을 소개합니다.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
박연준 저 | 문학동네
봄이 되면
봄 아닌 걸 치워야 한다
아지랑이를 먹으면 죽는다,
누가 말하는데
작은 인간은 천천히 그것을 먹는다
(「작은 인간」,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 49쪽)
우리는 작은 것을 참 쉽게 귀여워합니다. 작은 잎, 작은 꽃, 작은 곤충, 작은 동물, 작은 사람…… 내가 귀여워하는 대상은 이처럼 대개 나보다 약해서 훼손할 수 있는 이들입니다. 나보다 훨씬 크고 힘세고, 권력이 있는 존재를 맞닥뜨렸을 때 아, 귀여워! 소리가 툭 튀어나오긴 힘들겠지요. 그런데 시인의 ‘작은 인간’도 무시무시한 거인만큼이나 귀여워하기 어렵습니다. 큰 몸, 큰 목소리, 큰 행동은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자기가 할 만큼의 일을 하거나 존재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묵묵하고 고요한 모습이 고결해보이기까지 합니다. 하나의 존재를 존재 그 자체로 온전히 들여다보는 시인의 시선 덕분이겠지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식의 찬양이나 온정은 아닙니다. 시인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작은 인간들과 살아가는지 둘러보게도 만들지만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작은 인간들을 손으로 꾹 눌러 죽여왔는지도 생각하게 하니까요. 세상에 이렇게 다정 아닌 다정도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요.
『우리가 길이라 부르는 망설임』
프란츠 카프카 저/편영수 역 | 민음사
이 책은 ‘카프카 드로잉 시전집’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책을 감싼, 또 책에 삽입된 카프카의 그림을 보면서…… 솔직히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면 고인에게 너무 실례일까요. 하지만 과연 카프카 자신도 이 개성적인 그림들을 끼적거렸을 때 이것들이 100년 뒤 세계를 돌고 돌아 한국 독자에게까지 책으로 보여질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는…… 알 수 없겠지요. 아무튼 사람이 모든 일에서 다 뛰어날 순 없다는 점까지 모여 이 책의 장점을 이룹니다. 카프카가 남긴 수많은 기록 중에서 골라낸 시의 파편들을 묶은 책에 생생함을 부여하는 것은 카프카의 손이 직접 닿은 흔적들, 그가 그은 활달한 선의 인덱스이니까요. 같은 손으로 쓴 짧은 시들은 우리를 카프카의 짙은 안개 속으로 잡아당기는 작은 고리들입니다. 우리들은 그의 우중충한 세계 속 미아가 되는 일을 또 얼마나 사랑하는가요.
나는 내용을 알지 못한다.
나는 열쇠를 갖고 있지 않다.
나는 풍문을 믿지 않는다.
모든 것이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70, 『우리가 길이라 부르는 망설임』, 123쪽)
『나도 기다리고 있어』
이새해 저 | 아침달
시인의 작은 낭독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다녀왔습니다. 시인의 목소리, 모습과 그 떨리는 공기에 푹 잠기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코로나 유행 시절 지독하게 깨달았지요. 동료 작가의 낭독회에 오고 가는 일은 격려를 주고받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제가 받은 격려와 환대를 동료들에게 돌려주고 싶어 일정과 컨디션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가서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합니다. 얼었던 몸을 일으켜 이새해 시인의 낭독회에 가는 걸음은 특히 가벼웠습니다. 시집 귀퉁이를 여러 곳 꼭꼭 접어가며 읽었더랬습니다.
차갑게 굳은 그의 머리칼을
검은 비단으로 감싸며
귀하다는 멜론을 떠올렸다
말갈기에 묻은 핏자국을 씻어내면서도
달고 부드럽다는 과육 생각을 했다
더위를 뚫고 보부상이 오면
나는 그들의 보따리를 엄정하게 검사하는 자였다가
활짝 웃는 자가 되었다
향신료와 육포 사이에 숨겨진
터키석 목걸이와 찻잔
굳은 손가락에서 빼냈을 반지들을
하나씩 꺼냈다
너희는 도둑이다
나의 친구들이다
(「파수」, 『나도 기다리고 있어』, 14-15쪽)
예전에 저도 귀한 친구들을 생각하며 도둑이 나오는 시를 쓴 적이 있습니다. 뭔가 나쁜 짓을 함께 한 친구는 오래 잊히지 않습니다. 새봄에는 아주 나쁜 짓은 말고, 조금 나쁜 짓을 함께 할 친구가 더 많이 생기면 좋겠습니다.
『마이라 칼만, 우리가 인생에서 가진 것들』
마이라 칼만 저/진은영 역 | 윌북(willbook)
엄연히 시집으로 분류되진 않겠지만, 시집이 아니지도 않은(?) 책을 마지막으로 소개합니다. 눈이 밝은 분께 선물 받아 읽게 된 책인데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작가인 1949년생 미국인 마이라 칼만이 그리고 썼습니다. 책을 열면 무언가 가진 사람들의 감각적이고 친밀한 초상화가 이어집니다. 그중엔 컵, 꽃, 풍선을 가진 사람도 있고 기억이나 감정, 고통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수많은 알레고리가 펼쳐진 그림 곁의 단순한 문장은 그림 속 인물이 가진 것 외에 가지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면밀하게 들여다보도록 이끕니다.
우리는 숱한 시간 동안
서로 이야기해왔다.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그리고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
그리고 정말이지 때로는
물이 손가락을 타고 흐른다.
그리고 정말이지 때로는
케이크들이 구워지고
침대들이 정돈된다.
그리고 책들이 써진다.
침대와
책들과
케이크들.
내 경우엔, 다 갖는 편이 좋다.
(『우리가 인생에서 가진 것들』 중에서)
번역자인 진은영 시인은 “의심으로 마음이 출렁일 때,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썼습니다. 많은 것이 시작되는 봄, 설렘보다 두려운 마음이 더 커질 때 펼쳐보면 힘이 되겠습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
출판사 | 문학동네
우리가 길이라 부르는 망설임
출판사 | 민음사
나도 기다리고 있어
출판사 | 아침달
마이라 칼만, 우리가 인생에서 가진 것들
출판사 | 윌북(willbook)

임유영 (시인)
2020년 문학동네신인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오믈렛』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