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만난 친구가 박사 공부를 위해 7월부턴 미국에서 생활할 거란 이야길 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드디어 가는구나 싶었는데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다름 아닌 “너 영어 잘해?”였다. 영어로 시험 보고 영어로 지원해서 영어로 면접 보고 미국 대학원 간다는 애한테 무슨 이딴 질문을… 아니 근데 그렇지 않아? 미국 가면 모든 글자들이 알파벳으로 적혀 있고 다들 영어로 말할 텐데 그거 다 알아들어? 영어로 니 생각 다 말할 수 있어?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는 말 영어로 할 수 있어? 영어가 그렇게 가능해?? 친구는 무슨 그런 걸 묻냐는 얼굴을 하더니 “너는 한국에서 한국말로 대화하면 모든 사람이랑 다 말이 통하는 것 같니?”라고 되물었다. 아니. 안 통하지. 미안. 내가 멍청한 질문을 했다. I’m sorry… 비슷하게 벌써 10년 넘게 도쿄에 살고 있는 다른 친구가 회사랑 거래처 사람들과 일하는 거 너무 힘들다는 이야길 하길래 “일본어로 일하려니 답답하지”라고 위로해 주는데, 그 친구도 어이없다는 듯 “야, 나 일본 10년 살았어(무슨 말이 안 통해;;;).” 라고 한 적이 있다. ごめん。私、バカだよね…
나에겐 언어와 소통이 중요한 문제인가 보다. 좀 더 생각을 해봤는데 친구의 말마따나 말이 통하고 안 통하고가 결정적인 건 아닌 것 같다. 이미 한국에서 한국말로 듣고 말하고 있지만 아 뭐라는 거야 진짜(속으로) 와아 그렇군요 대박(육성) 하면서 고개를 끄덕일 때가 많다. 나한테 중요한 건 한국어다. 그러니까, 한국어를 안 쓰고 살 수 있어? 한국어를 안 쓴다는 게 아깝지 않아?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는 말 같은 걸 안 하고 살 수 있어?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순간이 없는 인생이 가장 좋은 인생입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평생을 듣고 말하고 사용하고 있는 언어. 그 언어로 적힌 책, 그 언어로 들리는 노래, 하다못해 그 언어로 적힌 간판, 설명서, 식품성분… 그런 걸 안 보고 안 쓰고 사는 건 너무 아쉽고 아까운 일 아닌가. 묻고 더블로 가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 저 대사에 담긴 맥락, 발음, 어조, 약간의 성대모사… 그런 걸 못 하는 건 너무 재미없는 일 아닌가. (영화 <타짜>는 정말로 한국어의 묘미가 담긴 대사가 많이 나오는 영화다.) 나와 평생을 함께한 언어와 잠시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걸 상상만 해도 서운하고 아쉬운 걸 보면 나한테는 한국어가 말 그대로 ‘모국어’인 듯하다.
일본만화를 주로 편집하고 읽어서 종종 일본만화만 보냐는 이야길 듣지만 내가 한국만화를 좋아하는 건 두말할 것 없는 이야기고 매년 한두 작품은 꼭 새로운 한국만화를 출간하려고 한다. 한국에 사는 작가님과 직접 만나 한국어로 소통하고 한국어 대사를 읽고 고치며(한국만화 편집할 땐 사전을 하나만 키면 되지롱) 07810의 ISBN(일본만화는 07830)을 발번받는 일이 나한테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왜? Why?なんで? 이유라 하면은 신토불이라는, 요즘 같은 세상엔 다소 낡고 촌스럽게 들리는 사자성어가 떠오른다. 신토불이는 몸과 땅은 둘이 아니고 하나며 자기가 사는 땅에서 수확한 농산물이 체질에 맞음을 뜻하는 말이다. 나에겐 언어와 몸과 땅은 셋이 아니라 하나며 ‘내’가 사는 땅에서 그려진 만화가 체질에 잘 맞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겠다.
그렇게나 좋아하는 한국어 만화를 소개해 보자면, 가장 먼저 한혜연 작가님의 『자오선을 지나다』 속 단편 「시안의 오후」가 떠오른다. 평생 착해 빠졌다는 이야길 들은 주인공 시안은 자신을 힘들게 했던 학창 시절 친구 미주를 찾아간다. 불의의 사고로 거동은 물론 말조차 할 수 없게 된 미주의 어머니를 뵙고 달래며 식사부터 샤워까지 살뜰히 도와준다. 시안은 무슨 연유로 자신을 괴롭혔던 아이를 위해주는 걸까. 사고의 진실과 가난과 무능한 아버지에 시달리며 부유했던 미주를 부러워했던 시안의 과거, 그리고 미주의 정체가 모두 밝혀지면서 「시안의 오후」는 저지른 사람보다 당한 사람이 더욱 병들어버리는 슬픔, 복수가 낳는 허무, 그리고 이 모든 아이러니 속에서 결국은 손가락질할 방향조차 잃어버린 인간의 마음 같은 것들이 아름다운 그림체로 그려져 있다.
양여진 작가님의 「소녀」도 몇 번씩 다시 읽는 단편 중 하나다. 안 팔리는 만화를 그리느라 마감에 쫓기고 있는 주인공은 동네에서 길을 잃은 소녀를 집에 잠시 보호해 준다. 한데 이 소녀가 하는 말과 행동들, 그리고 이 소녀가 앞으로 우리 집에서 겪게 될 일들이 어딘가 익숙하다. 주인공은 언젠가 길을 잃고 낯선 집에 갔던 기억을 떠올리고, 이 소녀가 어린 시절 길을 잃었던 자신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 순간 주인공이 무구한 어린 아이에게 품는 감정, 그림을 그리고 싶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 하루만이라도 이 언니처럼 살아보고 싶”다고 느꼈던 어린 자신에게 건네는 말들… 그런 것들은 사실 어린 나뿐만 아니라 지금의 나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다. “이만큼 살아오며 난 또 일상 속에서 미래의 나와 만났을지도 모른다. 스쳐 갔던… 내가 지금 기억해 내지 못하는 누군가가 나의 모습이었을 수도 있다.” 언젠가 낯설지 않은 아이가 길을 잃었다며 찾아왔을 때 나는 무슨 말을 해줄까. 이 만화의 배경이 어릴 때 내가 살았던 홍제동이라는 점에서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많이 추천하는 만화로 고형주 작가님의 『여름방학의 끝에서』가 있다. 삐약삐약북스의 『지역의 사생활99』 시리즈 충주 편이기도 한 이 만화는, 주인공 경원이 충주라는 타 지역에 사는 몸이 아픈 지현과 여름방학을 보내는 이야기다. 아파서 학교생활도 못 하고 친구도 없는 지현에게 잠시 놀러 온 경원은 너무나 소중하다. 하지만 방학이 끝나고 빨리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었던 경원은 좀만 더 머물러달라는 지현의 말에 고민하지만 조금은 냉정히 돌아와 버린다. 만약에 딱 하루만 그 아이의 곁에 더 머물러주었다면 무언가가 변했을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루 더 머무른다고 해서 지현이 건강해지는 것도 아닐 테니. 그렇지만 어차피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면 왜 고작 하루도 그 아이의 곁에 더 머물러주지 못했을까. 10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짧은 이야기이지만 내 가치관을 가장 많이 바꿔준 만화다.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내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의 곁에 머물러주는 것. 그 간절하고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시간보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없다고 말이다. 일본만화처럼 ‘여름방학’과 ‘청춘’이 딱히 연결되지 않는 나에게는 이 센티한 여름방학이 더 나다운 이야기로 느껴진다.
마지막으로는 『그 길로 갈 바엔』에 실린 하양지 작가님의 「추억의 왕」을 소개하고 싶다. 앤솔러지 기획 후 작가님을 섭외했을 때 ‘일탈’을 주제로 어떤 이야길 그리고 싶냐고 여쭈었다. 작가님은 지루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주인공이 평소 가지 않았던 길로 가게 되면서 낯설고 묘한 풍경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라고 답하셨다. 줄거리만 들었을 땐 어떤 만화일까 바로 와닿진 않았고, 완성된 원고를 편집할 때도 낯선 샛길에서 새로운 풍경을 발견한다는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몇 년 뒤 이 만화를 보고 뒤늦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친구 장희가 죽은 후 쉽게 잠들지 못하게 된 주인공 종림은 모처럼 들어서 본 평소와 다른 길에서 익숙한 빵집을 발견한다. 그곳은 장희의 언니가 하는 빵집. 종림은 오랜만에 장희를 떠올리기 시작한다. “장희가 떠난 날, 마지막으로 연락한 사람은 나였다. 거실에서 미국 드라마를 보느라 전화가 온 줄도 몰랐다. 내 핸드폰은 방구석에서 조용히 떨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3년간 긴 잠을 잘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장마가 막 끝난 어느 여름날, 길거리에서 패랭이꽃을 구경한 그날. 그날부터 나는 다시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그것 또한 이상한 일이었다.” 이 말과 장면이 무슨 말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아서 눈물이 나왔다. 그사이 나에게 어떤 일이 있었고 그 덕에 조금 변해버렸지만 이 만화는 그런 나를 처음부터 계속 기다려주고 있던 것 같았다. 모두가 살아가는 동안 상실을 겪고 나 또한 그것을 피할 수 없었는데, 그 슬픔을 알게 된 채로 이 만화를 다시 만나니 꼭 이야기가 나를 안아주는 듯한 기분이었다. 종림은 진열된 빵들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한다. “가판대 위의 작은 빵들이 귀엽다. 강보에 싸인 아기들이 떠오른다.” 나는 이 대사에서 ‘강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됐는데, 발음도 뜻도 무척 좋았다. 슬플 땐 이 만화가 강보처럼 나를 감싸주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한국을 배경으로 하고 한국어로 쓰인 대사들을 읽을 때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이 만화는 내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난 여기에 살았고 살고 있고, 여기 적힌 말들과 언어로 평생을 누군가와 진심을 주고받았으니까. 그리고 어떤 만화들은 정말로 그렇다. 여기 아닌 다른 곳과 언어가 주는 이국성과 재미도 분명 크지만, 어딘가를 거치지 않고 나에게 곧바로 도착한 이야기들은 좀 더 나를 나답게 채워준다. 내가 살아온 무대와 보내온 시간을 통틀어, 너무 당연하고 편안한 나의 언어로, 온 정신으로 감각하게 되는 만화들. 그런 만화들을 볼 때면 배운다. 아무 말도 할 줄 몰라서 배고프고 쓰라리고 찝찝한 것을 전부 울면서 버둥거리고 있는데 이것은 배고픈 거고, 쓰라린 거고, 찝찝한 거라고, 앞으로 평생을 기억하고 쓰게 될 말들의 생명과 얼굴들을 배우는 것이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지역의 사생활99 충청북도 충주
출판사 | 삐약삐약북스
그 길로 갈 바엔
출판사 | 문학동네

김해인
만화 편집자. 출판사 스위밍꿀에서 에세이 『펀치: 어떤 만화 편집자 이야기』(2024)를 냈다. 집 가서 만화 보고 싶다.
시월Shiwol
2025.06.04
mrstudent
2025.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