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상담을 마치고 진료실 문을 열어 드리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칠순을 훌쩍 넘긴 어르신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밖으로 모시려고 하는데 그분은 내 손을 잡은 채 “내가 매일 시를 써요. 벌써 4년째에요.”라고 했다. 그러고는 문 앞에 선 채로 말을 이어 나갔다. “뭐 대단한 건 아니지만… 일상에서 감동 받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매일 아침마다 써온 게 벌써 4 년이 되었네요. 세어 보니 1,400편이 넘더군요. 평생 공직에서 일하다 퇴직하고 나서부터 문학 공부를 시작했어요. 등단할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하고 있어요.”
어르신은 상담 내내 딸 걱정을 이야기 하면서 간간히 눈시울을 붉히다가 “내가 어떻게 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모든 일은 순리대로 흘러가겠지요.”라는 말로 울렁이는 마음을 애써 눌렀다. 그렇게 시간이 다 흐른 뒤에야 “서정시를 쓰고 있다”며 자기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내보이셨다. ‘아, 이 중요한 이야기를 이제야 하셨을까!’ 대기 환자들을 더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상황. 잠시 고민하다 나는 말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잖아요. 시인과 시인 아닌 사람. 아버님은 시인이시고 나는 시인 아닌 그저 그런 사람이니… 다음에는 제가 아버님께 한 수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일과가 끝나고 의자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보다가 ‘도대체 그 어르신은 왜 시를 쓰기 시작했을까?’ 하고 궁금해졌다. 미처 물어보지 못한 질문이 마음에 남아 그분의 삶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평생을 공직에서 일했다고 했으니,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출근하고, 비슷한 시간에 퇴근하고, 일이 많으면 야근도 하고, 바쁘면 휴가도 반납한 채 여름을 넘기기도 했을 테고, 비슷비슷한 일들을 끊임없이 반복하다가, 승진하면 잠시 기뻐도 했다가, 매달 나오는 월급으로 자녀 교육 시키고, 아이가 커가는 걸 제대로 볼 시간도 없이 일만 하고 보니 어느새 자녀는 서먹한 타인이 되어 있었고, 평생을 같이 산 아내는 남처럼 느껴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예순이 되고, 일흔이 되어 생의 끝자락에 와서야 놓쳐버린 인생을 아쉬워하게 되지 않았을까? 속절없이 흘러버린 시간과 놓쳐버린 기억들, 얼기설기 꼬여버린 감정들 때문에 괴로웠을 것이다. 열심히 살았지만 아무것도,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은 허무함을 느꼈으리라. 남은 생이라도 이전과는 다르게 보고, 다르게 느끼고, 매 순간을 소중하게 남겨야겠다고 다짐하지 않았을까. 이런 마음이 모여 매일 매일 한 편의 시를 쓰게 만들었던 게 아니었을까?
나는 시를 잘 모르고, 시인이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는 더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상상하는 시인은 세상의 본질과 그 안에 깊이 숨겨져서 쉽게 드러나지 않는 아름다움을 찾아낼 줄 아는 사람이다. 현실이 지루하고, 괴팍하고, 짜증나고, 불쾌하고, 불안하고, 한 줄기 희망조차 보이지 않더라도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해내는 이가 시인이라고 믿고 있다. 특출한 사람만 시인이 될 수 있는 건 아닐 거다. 그저 매 순간 ‘시인의 마음으로’ 충실히 산다면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인생에서 답을 구하거나 특정한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세밀하게 보고, 정교하게 보고, 다각도로 보고, 주의를 기울여서 보고, 보이는 것 너머를 보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다 보면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찬란하지 않더라도, 제 나름의 메타포로 자신을 뽐낼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시가 아닐까.
“가라앉는 난파선에 타고 있는 것 같아요.”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직장인이 상담실에서 한숨 쉬듯 내뱉었다. 매일 매일 열심히 일하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가라앉지 않게 버둥거리고 있는 것만 같다고 했다. 어차피 가라앉고 말 배 위에서 노를 젓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했다. 어떻게든 기운이 나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방도를 찾지 못했다. 딱히 틀린 말이 아닌 것 같기도 했고, 무슨 말을 한들 현실을 속이려 드는 것처럼 느낄 것 같았다. 더욱이 자기만 살겠다고 무작정 배 밖으로 뛰쳐나갈 수는 없는 상황. 꼼짝달싹 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를수록 가라앉는 배와 함께 머물러야만 하는 상황에서 희망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아무 준비 없이 무작정 바다로 뛰어들지는 마세요.”
저녁 늦은 시간 책상에 앉아 있으니 ‘가라앉는 배에서 노 젓는 일’이 생각났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 이 사람은 시인이 되어야 해!’ 허무하고 부질없다 느껴지더라도 그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면… 시를 쓰며 견뎌야 한다.
( 『인간욕구를 경영하라』 에이브러햄 H. 매슬로. 리더스북)
의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의미를 찾으려면 “우리는 시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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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욕구를 경영하라에이브러햄 H. 매슬로 저/데버러 콜린스 스티븐슨, 게리 헤일 편저/왕수민 역 | 리더스북
경영에서 창의성을 어떻게 발휘할 수 있는지에서부터 디지털 시대에 맞는 리더십에 이르기까지 핵심 주제에 대해 인터뷰를 통해 날카로운 논평을 해준다.
김병수(정신과의사)
정신과의사이고 몇 권의 책을 낸 저자다. 스트레스와 정서장애 분야에서 오랫동안 연구하고 진료했다. 서울아산병원에서 교수 생활을 9년 했고 지금은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의 원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