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 시가 잘 안 써질 때 읽은 신간들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만들고, 넓혀 가는 작가들을 만날 수 있는 세 편의 신간.
글 : 임유영 (시인)
2025.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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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좋아하는 사람들이 신기합니다. 저는 등산로 입구에서 화살표가 여러 개 붙은 표지판, 교차하고 멀어지는 길들이 복잡하게 표시된 지도를 보면 금방 마음이 식어버립니다. 하지만 시를 쓸 때면 걱정 없이 용감해집니다. 여기와는 다른 곳에, 더 멀리, 더 높고 더 낮은 곳에, 가본 적 없는 곳에 가고 싶은 마음으로 쓰게 되니까요. 그런 마음으로 써도 정말 먼 곳에 잘 도착한 시는 자주 만나기 어렵습니다. 마음도, 생각도, 가봤던 쪽으로 자꾸만 기울어지는 관성이 있어서요.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일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자신만의 샛길을 묵묵히 만들고 넓혀가는 작가들을 만나보겠습니다. 이들이 닿은 곳을 보세요! 멀리서도 빛납니다.

 

 

『그해 여름 문어 모자를 다시 쓰다』

서호준 저 | 열림원

 

서호준 시인은 2016년 독립 문예 잡지 〈더 멀리〉(강성은, 김현, 박시하 시인이 2015년 창간)를 통해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보다 넓고 다양한 발표 공간에 대한 시도로 온라인 문학 플랫폼 〈던전〉을 직접 운영하기도 하였고요. 이런 이력이 보여주듯이 그는 문학에 애정이 깊은 시인입니다. “나만의 언덕에는 / 글쎄 / 아무도 안 올랐으면 좋겠다 / 그러니까 나만의 언덕이고” 라며 사랑하고요. 하지만 그 사랑은 시인으로 하여금 보기 좋게 정돈된 자리보다 그 사이의 빈 곳을 더 보게 만드는 무겁고 또 무서운 것이네요. 천사가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는 길을 아”는 것처럼(「어깨 위의 천사」) 시인은 작고 환한 랜턴 같은 시를 들고 우리를 부릅니다. 던전의 이세계(異世界)는 조금 어둡고 복잡합니다. 이 세계와 꼭 닮았습니다. 

 

요즘에는 다녀온 뒤 또 다녀오고 또 다녀온 사람도 많고,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꼭 전해 달라고 쓴 수기도 유통되어 만만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모험이라는 건 죽음을 옆구리에 끼고 다음 기수에게 전달하는 것이라는 말은 꼭 해야겠다. 죽음이 무섭다기보다는 죽어서 돌아가는 게 무서웠으니까. 내 모험의 마지막 순간은 미늘 밭에 보라색 아지랑이가 피었을 때였다. 눈물이 흘렀고 눈물에서 눈물이 흘렀고 눈물에서 눈물이……(까지였다) 기회가 또 생긴다면 나는 반드시 죽지 않을 것이다.  (「아울베어·예티」 부분, 『그해 여름 문어 모자를 다시 쓰다』 21쪽)

 

문어 모자, 감귤 같은 귀엽고 단순한 모티프들로 감싸고 있지만 씁쓸함이나 매캐한 냄새가 감춰지진 않습니다. 시와 쓰기, 시인으로 살기에 대한 애증이 너무나 와닿는 「악령」, 「(부록) 거개의 시」 같은 시를 읽으면서는 저도 함께 울고 웃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 솔직함이 참 힘이 되기도 해서, 그래, 안되면 말라지 뭐, 무릎 한번 털어봅니다. 반복하다 보면 다음엔 더 빨리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용기를 손에 쥐고 계속해봅니다. 

 

그는 시인이다. 그는 시를 읽지 않는다. 그는 아무것도 읽지 않는다. 사람들이 읽기 전에 자리를 비킨다.

 

너는 시인도 아냐. 응. 그가 답한다. 그에게는 좋아하는 시가 없다. 외우는 시도 없고 추울 때 생각나는 시도 없다.

 

너는. 그가 말한다. 무언가 가슴을 조여요. 답답해. 그가 말한다.

 

그는 시 속에 산다. 암자가 있고, 새벽부터 물을 길어 온다. 시를 읽어 볼까. 그러나 그는 시를 읽지 않고 시가 보이면. 사랑해. 머리만 내놓고 말하는 것이다.

 

물이 넘치고 있다.

 

너는 네가 쓴 시를 읽는다. 좋아. 그가 머뭇거린다. (「(부록) 거개의 시」 전문, 『그해 여름 문어 모자를 다시 쓰다』 97쪽)

 

 


『우리의 이방인들』

리디아 데이비스 지음/강경이 옮김 | 봄날의책

 

프랑스 영화감독 아녜스 바르다는

한 인터뷰에서

바느질을 조금 하고, 요리를 조금 하고, 정원 가꾸기를 조금 하고,

아이 돌보기를 조금 하길 좋아한다고,

하지만 조금만 하길 좋아한다고 말했다. (「조금만」 전문, 『우리의 이방인들』 18쪽)

 

일상을 관찰해 쓴 짧은 글로 이루어진 이 책은 시, 산문, 소설이라는 분류를 거부하는 작품집입니다. 리디아 데이비스에 대한 대부분의 소개에서 ‘자신이 고안한 형식의 대가’란 표현이 빠지지 않습니다. 어떤 글은 행갈이, 연갈이도 되어 있고, 어떤 글은 산문처럼 쭉 이어져 쓰이는데, 이들 글의 내용이 형식과 어떻게 결합하는지 관찰하는 재미도 큽니다. 어쩌면 글의 첫 줄을 쓰면서, 첫 줄의 운명을 결정하는 순간에 그 글의 형식도 정해지지 않았을지, 즐겁게 추측해봅니다. 그런 순간에는 작가의 거의 모든 의식과 무의식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폭발하지 않았을까요. 소탈하고 통찰력 있는 이야기들이 풍요로운 독서의 기쁨을 안겨줍니다.

 

전쟁 때, 한동안 그는 먹을 것이 순무밖에 없었다.

이제 그는 순무는 먹지 않는다. 순무는 그가 먹지 않는 유일한 음식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캐나다에서 사는 옛 친구들은 이 점을 오해했다. 그들은 그가 순무를 좋아한다고, 어쩌면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두 가족이 함께 추수감사절을 기념할 때마다 그들은 그를 위해 순무를 요리한다. 그래서 추수감사절마다 그는 순무를 먹는다. (「되풀이되는 순무 문제」 전문, 『우리의 이방인들』 215쪽)

 


『재능이란 뭘까?』

유진목 저 | 난다

 

자, 언제나 글을 쓸 시간이 있어야 하고 기력과 정신이 있어야 하고 엎드려 누워 글을 쓸 집이 있어야 한다. 거기서 먹기도 하고 잠도 자는 거다. 돈은 어디서 어떻게 무슨 짓을 해야 충분히 벌 수 있지? 지금도 이 지경인데 더 늙으면 어디서 어떻게 먹고 자고 숨쉬어야 하지?

 

나는 거의 미쳐버린다.  (『재능이란 뭘까?』 39쪽)

 

최근까지 관찰한 바로, 많은 예술가들이 골방에서 쥐죽은 듯 자기 일이나 하느라 조금 지쳐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동안 유행했던 ‘자의식 과잉 예방하기’ 밈과 꼭 딴판 같죠. 그들의 겉모습처럼 곱고 내성적인 세계를 보는 것도 좋지만, 저는 그 와중에 내면의 살풍경을 칼날처럼 드러내는 시인에게 늘 이끌립니다. 

 

유진목은 그렇게 고요히 배수진을 치는 시인입니다. 그의 새 책 제목이 『재능이란 뭘까?』라니 궁금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시인은 삶과 죽음, 불행과 행복 같은 주제 앞에서 섣불리 반응하지 않습니다. 오랜 생각의 가닥을 문장으로 엮어 내밀 뿐입니다. 무연합니다. 응, 나에게는 재능이 있어. 시인은 뒤로 빼지 않고, 비비꼬지 않고, 뻐기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질문을 직시합니다. 그 단단해지기로 한 결심이 미덥습니다. 

 

『재능이란 뭘까?』는 산문집으로 명시되어 출간되었지만 저는 이 책이 왜 시집이 아닌가를 여태 곰곰이 생각 중입니다. 저는 일단 이 책을 시인이 시 쓰는 마음에 달아둔 조그맣고 무거운 추 같은 걸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너무 멀리 날아 가버리지 말라고.

 

쓰는 행위는 시간을 보내는 고통스러운 방법 중 하나다. 글을 쓸 때면 자꾸만 손목시계의 초침을 바라보게 된다. 나는 모든 것을 흘려 보낼 수 있으면서도 글을 쓴다. 심지어 그것을 타인에게 공개한다. 그 역시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다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벌인 일로부터 태연해지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온갖 괴로운 일들을 책에 쓰고서 태연하게 살아간다. 마치 나의 일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한다.  (『재능이란 뭘까?』 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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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문어 모자를 다시 쓰다

<서호준>

출판사 | 열림원

우리의 이방인들

<리디아 데이비스> 저/<강경이> 역

출판사 | 봄날의책

재능이란 뭘까?

<유진목>

출판사 |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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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유영 (시인)

2020년 문학동네신인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오믈렛』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