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의 집에서 최소한의 것들만 가지고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는 스타들.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사소한 행복을 발견하기 위해 여러 미션들(빗방울을 찍어보세요. 3시간 동안 직접 밥을 만들어 먹어보세요 등)을 충실히 수행하는 그들의 모습을 담은 프로그램이 인기리에 방영 중이다.
번거롭게 굳이 160년 전의 데이비드 소로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격무에 찌든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던 삶이 아닐까. 조용한 숲 속의 작은 집에서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연과 함께하는 평화로운 시간. 급한 대로 컴퓨터 바탕 화면에 ‘도심 속 월든’ 폴더를 생성해 전 세계의 아름다운 숲을 모으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짙은 녹음의 이미지를 화면 가득 열어두고 보고 있다 보면, 그럴 리 없겠지만 꽉 막혔던 콧속이 뻥 뚫리고 갑자기 시야가 환해지는 기분이 든다. 잠시지만 작은 위안이 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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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숲 속으로 뛰어 들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어김없이 오늘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면, 사무실 속 가상의 작은 집을 찾아 들어가는 것으로 일단은 위안을 삼는다. 폴더를 열어 그날 가장 마음에 드는 숲 사진을 보면서 한 잔의 따뜻한 차를 마실 때, ‘나의 월든’은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 차는 마시는 시간에 따라 조금씩 느낌이 다른데, 공복에 마시는 차는 특히 달고 향기로워 일부러 몸 속을 비우고 나서 마실 때가 많다. 빈 속에 한 모금, 두 모금, 차를 머금으면 입 천장에서는 향긋한 꽃 향이, 목 뒤에서는 달큰하고 고소한 코코넛과 아몬드의 맛이, 운이 좋은 날에는 혀 밑에서 올라오는 (있을 리 없는) 우유의 부드러움 까지도 느낄 수 있다.
동양에선 찻잔에 손잡이 달기를 주저했다. 찻잔은 차탁과 함께 두 손으로 받들어 올려졌다. 그것은 찻잔을 예우하는 방식이었다. 시간은 물이나 술을 마실 때보다 천천히 흘렀다. 이 한 잔의 차는 무엇인가. 평소와는 다른 질문이 떠올랐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대개가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침묵이 이어졌고, 간혹 시를 지어 화답했다.
-김인, 『차의 기분』 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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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시면서 가장 마음에 든 건 차를 마시는 속도다. 차를 마실 때는 행동 하나 하나가 느려진다. 마음이 조급할 때 따뜻한 차를 마시면 온 몸이 누그러지면서 알 수 없는 평안함이 온다. 마음을 바쁘게 만들었던 이유가 잘 생각나지 않고, 커피나 물, 술을 마실 때는 절대 떠오르지 않는 생각들이 떠오른다. 차를 마시는 동안에는 정신 없이 흘러가는 현실의 속도를 잊고, 나에게 정말 중요한 물음들에만 집중하게 된다. 십 년 넘게 차를 만들고 마셔온 저자의 의문처럼 대체 이 한 잔의 차가 뭐길래, 평소에 하지 않는 질문들을 하게 만들고, 기어이 그 질문에 대답하게 하는 것일까.
저는 종종 지인들을 집에서 가까운 공원으로 부릅니다. 공원에 캠핑 의자와 테이블을 펼치고 집에서 가져온 과자와 캔맥주를 꺼내 놓고요. 준비한 것은 이것뿐인데 사람들은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온 것 같다며 좋아합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저도 너무나 즐겁습니다.
수없이 왔던 공원인데 왜 멀리 온 것처럼 느껴질까요? 아마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품들 때문일 겁니다. 캠핑에서 쓰는 의자, 테이블, 랜턴 같은 것들. 혹은 피크닉 갈 때 쓰는 돗자리, 좋아하는 영화가 담겨 있는 노트북, 이국적인 여행지 느낌이 나는 패브릭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행을 떠올리게 하는 소품들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힘이 있어서 우리의 일상을 특별하게 만들어줍니다.
-최재원, 『작은 여행, 다녀오겠습니다』 124쪽
당장 여행을 떠날 수 없다면 여행을 떠올리게 하는 소품들로 일상을 특별하게 만들어보자는 저자처럼, 숲 속에서 살 수 없다면 ‘상상력’을 발휘하는 수밖에 없다. 컴퓨터 가득 숲 이미지를 채우고, 오늘의 첫 차를 마실 준비를 시작한다. 단 한 잔의 차를 마시더라도 정성을 다해야 한다. 홍차는 펄펄 끓는 물로 우려내야 맛있기 때문에 꼭 물을 끓여 차를 우리고, 차가 우려지는 동안 예쁜 찻잔을 고른다. 진짜 숲 속의 작은 집에 들어가야만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금의 정성과 상상력이 있다면,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나만의 월든으로 ‘작은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살아가는 것에 지쳐 너덜거리는 마음을 어찌 할 수 없다면, 일단 물을 끓이는 것에서 시작해보자.
최지혜
좋은 건 좋다고 꼭 말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