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서] 서윤후X최다정 – 내 방 창문
서윤후 시인과 최다정 한문학자가 ‘내 방’을 주제로 서로 에세이를 주고 받습니다. 나를 길러내고 사랑하게 하는, 방 안의 잡동사니들.
글ㆍ사진 서윤후, 최다정
202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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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최세운




서윤후




학부모 참관 수업이 있던 날이면 교실 아이들은 득달같이 손을 들고 자기 뽐내기에 바빴다. 물론 나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그날 집에 돌아왔을 때 근사한 외출 복장도 벗지 않은 엄마가 나를 붙잡고 물어보았다. 너는 왜 창문만 가만히 보고 있어? 창가에 앉은 나는 누군가 까마득히 잊어버린 실과 시간의 양파처럼, 축 늘어져 가만히 시간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시간을 바라본다는 것이 지금도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운동장의 모래 생김새, 가끔 뛰어다니는 아이들, 펄럭이는 태극기, 쓸쓸한 조회대, 수돗가에서 대걸레를 빨다가 혼나는 아이들 그런 것들만 보였을 테지만……. 창문에는 그 밖에도 아른거리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만큼은 확실하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첫 시집에 수록한 시에는 <나는 창문의 취미가 된다>라는 구절을 적기도 했다. 창문의 취미가 된 나는, 창문에 대한 갈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집도 방도 내 것이 아니니 창문도 내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게 문제가 아니다. 창문이 없는 방이 기본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었던 대학 시절의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 그때 나는 등단을 하고 <대학생 시인>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그 말은 꽤나 이상했다. 대학을 졸업하면 시인이 아닐 것처럼. 퍽 불안하고 쓸쓸한 날들 속에서 한 대외 활동의 하나로 인터뷰할 기회가 주어졌었다. 그때 나는 주저 없이 김소연 시인을 만나고 싶었다. 김소연 시인을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던 날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그의 시가 오래된 양파에 물을 주는 것처럼, 갈증을 지워 준 적이 있었다. 물고기 다방에서 만난 김소연 시인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에게 창문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신도 창문이 없는 곳에 살 때가 있었는데, 창문이 그려진 엽서 하나를 벽에 붙여 놓았었다고. 그게 창문이 될 순 없었겠지만, 창문이라고 믿으며 견뎌 온 날의 이야기. 그 이야기가 좋았다. 창을 낼 수 없어 종이 한 칸에 인쇄된 이름 모를 창문을 빈 벽에 붙여 놓고 창문으로 믿는 것은 창문이 아닌 것일까? 나는 그 이야기를 오랫동안 좋아해 왔다. 마치 창문에 아른거리는 게 있는 일처럼 내 삶에 이따금 아른거리던 이야기.


몇몇 집에 살 적에도 창문이 큰 집을 골랐다. 복층 구조의 집이 구조상 가장 큰 창문을 지닌 곳이었다. 특히 눈 내리던 날에는 창밖으로 보이던 유흥가와 구청 식으로 조성된 엉성한 공원도 아름다운 설경이 되어 있었다. 창문 앞에 앉아 수면 양말 신은 발을 꼼지락거리며 따뜻한 것을 마셨다. 그리고 하염없이 그것들을 보았다. 더는 아른거리는 게 없더라도, 개미만 한 사람들, 개미만 한 자동차, 개미만 한 불빛들이 돌아갈 더 좁은 길들을 상상하며, 너무 늦지 않게 창문을 꼭 닫았다.


창문은 내게 연결감을 준다. 동시에 분리감을 선사한다. 연결되어 있지만 혼재되어 있지 않고 나의 실내를 규정하는 좋은 장치 중 하나이다. 그것이 내가 꿈꾸는 삶의 문법과도 같다. 가까이 있으나 닿아 있지는 않고, 멀리 있으나 지켜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감을 만드는 일이 내가 삶을 살아가는 처세술이기 때문이다. 시를 쓰면서 이런 거리감이 삶에 불쑥 끼어들었다는 생각도 든다. 없는 것을 있다고 믿기도 하고, 있는 것을 없애 버리기도 하며 망각과 기억이 서로를 복제하는 난삽한 삶의 수많은 경계 속에서, 창문은 언제나 내게 좋은 건널목이 되었다. 집에서 가장 아픈 곳을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창문을 꼽을 것이다. 지나치게 투명하고, 이미 마음속에서 몇 번씩이나 깨져 버린 자리들. 아른거린 게 많아 애틋한 장소이기도 하니까.


태풍이 온다고 하면 청 테이프를 찢어 X자로 붙여 놓던 미신 같은 날들에도, 말 걸어오는 이 없어도 쭈뼛거리지 않도록 내게 얼굴의 정면을 내주었던 곁에도, 버스나 기차에서 입김을 내어 난데없이 스마일을 그리는 재간 속에서도 창문이 있었다. 사람처럼, 사람보다 더 사람이었으면 하는 창문이 가까이 있던 날엔 내가 나와 화목하게 지낼 수 있었다. 부끄러움이 많던 날에도, 용서를 구하고 싶은 날에도 일단 창문 앞에 서면 심판을 시작할 수도 있었다. 창문은 내게 그만두게 한 것 없이, 나의 주저앉은 것들을 자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내가 살아온 반경 속에 몰래 그려 둔 창문들이 여기저기서 열리고 닫히는 것을 본다.  




최다정

 



내 방 창문과 우정을 쌓으며 나는 여러 번 세상과 화해할 수 있었다.


세상의 움직임에 관여하지 않은 채, 나 없는 세상을 지켜만 보게 해주는 창문. 외부의 위험 요소가 사라진 나만의 방 안에서 유리창 밖으로 동요하는 세상을 내다보았다. 열고 싶을 때 활짝 열어젖혀도 창문을 통해서 방 쪽으로 유입되는 것은 모두 나에게 해롭지 않았다. 해와 달의 그림자, 바람에 스민 공기의 내음, 또 어떤 계절의 운이 좋은 날에는 조금의 빗방울이나 눈송이, 꽃잎이나 나뭇잎 조각 같은 것이 창문으로 들어왔다. 창문이 데려다주는 건 오직 말 없는 자연뿐이었다. 창가에 놓인 서넛의 식물 화분들은 빛과 공기를 양분 삼아 쑥쑥 자라났다. 창문 앞에 걸어 둔 말간 푸른빛 돌고래 모빌이 반짝이고 흔들리는 걸 보며 매일 아침 햇살과 바람을 헤아렸다. 그 방에 사는 사람에게 창문이 주는 선물들 같았다. 안심하고 평온의 순간에 착지하는 걸 일종의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나의 행복은 통계상 창문 바깥에서보다 창문 안쪽에 있을 때 찾아올 확률이 높았다. 좋아하는 창문이 있는 방 안에서 종종 완벽하게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지나온 방의 역사는 곧 창문들의 역사와도 같다. 무해한 아름다움을 담아 주는 가지각색의 창문을 수집해 왔다. 창문은 놓인 위치와 방향에 따라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테두리 모양과 크기, 색감과 선명도까지 정해 주었다. 동그랗고 네모지고 금이 가고 먼지가 낀 각종 창문들. 창문 앞에 선 나는 창문의 형태와 상태에 따라 창문이 보여 주는 만큼만 세상을 구경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아득히 넓고 복잡해서 발생한 피로와 흥분은 크고 난삽한 세상의 한 귀퉁이, 한 단편에 의해 위로받아 침착해질 수도 있다. 방 안에서 창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는 건 세상의 퍼즐 한 조각을 벽에 걸어 두고 차분히, 마치 작품처럼 감상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을 테다. 벽의 고정된 위치에 걸려 나날이 조금씩 변화하는 창문의 순간들을 포착하는 사이 그 방, 그 동네, 그 시절만의 깊은 심상이 형성된다.


과거 어느 한 시기의 나를 돌이켜 보면 어김없이 제일 먼저 그때 내가 살던 방의 창문 장면부터 떠오른다. 네모의 장면 전체가 벚나무로 가득 찼던 창문은 내가 가져 본 제일 황홀한 창문이었다. 창문을 열면 바람에 벚꽃잎들이 화르르 날려 들어오곤 했다. 오피스텔의 한 뼘 정도만 열렸던 여닫이창은, 겨울이 되면 김이 잘 서려서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비 오는 날처럼 울먹이는 듯 보였다. 손으로 대강 김을 닦아 내고 나면 이내 유리에선 물방울들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상하게 비 오는 날엔 모든 걸 멈추고 가만히 있어도 용서받는 느낌인데, 물방울이 흐르는 창문을 보면서 잠깐 비슷한 기분이 되는 게 좋았다. 대학원 기숙사 1층 방 창문에는 사생활 보호를 위해 시트지가 덧붙어 있었다. 여름밤 창문을 열면 커다란 나방들이 날아와 방충망에 달라붙었기에, 밖이 보이지 않아 답답해도 대체로 창문을 닫고 지내야 했다. 방 앞의 가로등은 밤이 되면 창문을 주황빛으로 물들였고, 가로등 곁 커다란 나무의 잎사귀 그림자가 불투명한 창문 표면에 맺혀 아른거렸다. 바깥 나무의 실루엣만 어렴풋하게 그려 주는 창문 장면을 또 만나고 싶어 매일 밤이 기다려졌다. 잎이 주렁주렁 매달렸던 그림자에서 잎들이 사라지고 나뭇가지만 앙상해질 때까지 그 방에 살았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집 내 방 침대 머리맡에는 작은 미닫이창이 있었고, 나는 자주 침대 아래쪽으로 머리가 가도록 거꾸로 누워 한참 동안 창문을 바라보았다. 쨍한 하늘에 구름이 둥둥 느리게 떠가는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면서, 천천히 흐르는 낮이 무척 아름답고 또 몹시 무료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으로 그런 장면을 감상하게 될 시간이 앞으로 나의 생에 아주 길게 늘어뜨려져 있음을 직감했던 걸지도 모른다. 지금 사는 방 창문은 길가의 감나무와 키가 얼추 비슷하다. 이 방을 처음 만났을 때 창밖 나무에 달린 감들은 초록이었는데, 점점 붉어지던 감이 얼마 전 모두 떨어졌다. 이제는 머지않아 감나무 가지들 위로 눈송이가 나풀거릴 겨울 창문 풍경을 그려 본다.


직접 심은 꽃들이 자라는 알록달록한 정원이 담긴 창문, 바다의 파도가 밤낮으로 끝없이 상영되는 창문. 살면서 언젠가 내 방 창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창문들이다. 창문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은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다.




 

*필자 | 서윤후


1990년에 태어나 전주에서 성장했다. 2009년 《현대시》로 등단했으며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 『소소소 小小小』,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와 산문집 『햇빛세입자』,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 『쓰기 일기』 등을 펴냈다. 제19회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2022년생 코리안 숏헤어 고양이 ‘희동’이와 함께 살고 있다. 



*필자 | 최다정


한자와 만주문자를 단서로 삼아 옛날을 탐구하고 있다. 여기 너머에 있는 옛 문자의 세계를 동경한다. 고려대학교 고전번역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한자 줍기』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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