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1.
연초부터 또 부끄러운 고백으로 시작한다. 나는 아이를 낳기 전까지 나를 포함해 인간이라는 종에 대해 냉철한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존재가 조금 비효율적이라고 해야 할까, 뜬금없다고 해야 할까, 우주에 부담이 된다고 해야 할까. 인간이 싫은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좋다고 하기도 어려운, 아무튼 그 역사적 공과(功過)와 최근의 추세를 보면 긍정적으로만 평가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좋은 친구들도 많이 있고 존경할 만한 역사적인 인물들도 많이 있고 좋은 의미로건 나쁜 의미로건 호기심을 자극하는 흥미로운 존재들을 많이 알고 있지만, 그와 별개로, 인간이라는 종이 번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냐, 라고 누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면, 나는 회의(懷疑) 끝에 “글쎄, 뭐 바람직할 것까지야……”라고 답했을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인 차원으로 내려와서 말해보자면, 사실 이 복닥복닥한 초연결 한국 사회, 특히 메갈로폴리스 서울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즐거워하거나 사람들과 부대끼느라 괴로워하는 양쪽을 오가는 일이다. 개인차가 있을 텐데 내 경우에는 엎치락뒤치락 하는 와중에 후자의 경험이 조금 더 우세했던 것 같다.
SNS에서 꽤 많은 수의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이유로 상처받거나 분노하거나 기뻐하는 것을 볼 때, 현실에 대한 비슷한 문제의식과 미래에 대한 비슷한 이상을 가진 사람들이 날카롭게, 혹은 재기발랄하게 내 대신 표현해주는 것을 볼 때 매우 즐겁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나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어떤가. 내가 좋아하며 만든 책을 다른 사람들이 좋아해주면 어떤가. 아니면 나의 가치관이나 취향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더라도 오순도순 협력하며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는 것도 기분이 좋다.
반면에 SNS에서 꽤 많은 수의 나와 다른 사람들이 나와 다른 이유로 분노하며 몰려다니는 것을 볼 때, 현실에 대한 상이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시끄럽게 왁왁거리는 것을 볼 때 매우 괴롭다. 아침 출근길에 만원 전철에서 빽빽하게 뭉쳐 서 있는 사람들 사이를 나보다 더 잘 비집고 들어가는 뒷사람의 어깨, 나보다 더 피곤해 보이는 앞사람의 뒤통수에게서 느껴지는 감정, 떠오르는 생각은 어떤가. 내가 좋아하며 만든 책을 오랫동안 아무도 사 읽지 않아서 몇 천 부씩 폐기해야 할 때는 어떤가. 나와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더라도 서로 치사하게 협잡을 하고, 그러다가 또 금세 사소한 이익을 위해 야합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또 어떤가. 심지어 그들이 처벌받거나 단죄되지 않고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2.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이를 낳고 조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이 세상에 존재했고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내가 느끼는 것 같은 감동을 주었던 존재였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아마도 아이를 낳고 나서야 처음으로 사람을 제대로 자세히 오랫동안 들여다보게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아이를 낳고 얼마 안 되었을 때는 길에서 그 끝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놀랐다. 아니 이 사람들이 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귀한 존재였다니! 길에 널린 아저씨, 아주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막 태어났을 때에는 이렇게 작고 보드랍고 연약하고 신기한 존재였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실제로 아이들을 보는 눈도 생겼다. 이전이라면 그냥 미취학 아이들, 큰 가방에 위축되어 쪼그라들어 보이는 초등학생들, 화장이 진한 중학생들, 서로 구분 안 되는 고등학생과 대학생들 등의 집단으로 보였을 아이들이 조금 더 미세하게 구분되어 보이기 시작했고, 갓 태어난 신생아실의 빨간 아기들도 하나하나 다르게 보였다. 6개월 아기의 매력과 한 살 아기의 매력, 두 살 아기와 세 살 아기의 매력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기들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다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를 하나밖에, 그것도 딸 밖에 안 키워본 나로서는 정말 알 수 없는 경지지만, 아이를 둘 낳고, 셋 낳은 엄마들이 “아이들은 정말 다 달라, 너무 너무 달라!”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면 존경과 선망의 감정이 울컥 올라온다. 나는 그저 짐작해볼 수 없지만 그렇게 짐작만 할 때조차 이렇게 울컥하게 되는, 뭔가 아주 아주 커다란 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 나혜석 선생이 「이혼고백장」에서 “자식의 의미는 단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수에 있다.”고 한 것도 비슷한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막연히 내가 아이를 하나 더 키웠다면, 인간의 이해에 대한 스케일과 온도가 또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아무튼 내 주변의 아이들도 다 다르다. 자세히 볼수록 다르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같은 것을 보고 느끼는 감정, 그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도 모두 다르다. 어떻게 이렇게 다 다르게 재미있을 수 있는지 신기하다. 어떻게 세상에 이렇게 많고 많은 특별함이 있을 수 있는지 경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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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애초에 분류와 체계에 강한 사고를 타고나고, 그런 능력을 더더욱 함양하도록 교육받아온 나는 동서고금의 인간들을 신속하고 편리하게 범주화해서 이해하곤 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나서야 종으로 분류되는 인간이 아니라, 아주 고유하고 독특한 개별자들이라는, 인간에 대한 ‘상’이 생겨난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게 꼭 아이를 낳고 길러야 알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닐 것이다. 연애 한두 번만 제대로 해보면 얻게 되는 감이기도 하고, 연애 안 해보고 아이 안 길러보고도 원래부터 이런 지혜를 타고난 현인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 길러야 이런 지혜가 생긴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40년 동안 그런 눈이 없었던 사람도 아이를 낳고 기르는 와중에 그런 게 생기기도 하더라는 부끄러운 간증이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이전의 나에게도 그런 능력, 감각이 깊이 잠재되어 있었으리라 믿고 싶다. 환경에 의해 억압되어온 능력이 돌봄이라는 사회적으로 저평가되는 활동을 통해 표면화되고 드러난 것이 아닐까.
우리 딸이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물론 내가 자기 엄마라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유를 말해달라고 하면 딸은 “엄마 팔목에 있는 점이 너무 보들보들해!”라고 대답한다.(느낌표는 확신의 표현이다.) 롤랑 바르트가 사랑에 대해 말하면서, 그 사람의 ‘코에 난 작은 점’에 대해 이미 이야기한 바가 있다.(『사랑의 단상』)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는 고유하다. 누군가 오늘 다시 딸에게 엄마를 왜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딸은 또 다른 구체적이고도 고유한 이유를 댈 것이다. 그 답은 매일매일 달라질 수도 있고 수백 가지가 넘을지도 모른다. 물론 딸은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고유함을 발견하거나 만들어내면서 수많은 사랑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랑의 능력이 퇴화하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다.
4.
아이가 커가면서 ‘고유함에 대한 감각’이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가 있다. 여전히 나에게 고유한 의미를 지닌 아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 아이를 어떻게 판단하는가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이가 개성이 강하면 사회성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된다. 특히 학교 입학을 앞두고는 이 아이가 튀지 않고 무난하게 지낼 수 있기를 바라게 되기도 한다.
계량화할 수 없고 교환 불가능한 존재로서의 아이들이 사회의 본격적인 구성원이 되면서부터, 여러 객관적인 잣대에 노출되기 시작한다. 말이 얼마나 빠르냐, 학습능력이 얼마나 뛰어나냐 등은 시작일 뿐이고 나중에 이것이 점차 점수와 등수에 따라 내신 등급에 따라 또 대학에 따라 또 직장에 따라 심지어 가장 합리적으로는 이 아이들이 벌어들이는 금액에 따라 수치화되고 객관적으로 평가될 것이다.
객관적 평가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측정할 수 없는 가치를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측정해내는 경제학적인 작업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불필요하거나 그 자체로 해로울 리 만무하다. 서로 다른 가치들이 교환되고 소통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은 더 세련되어져야 하고 더 발전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다만 그런 객관화의 잣대가 단순히 과학적인 계량의 방식이 아니라 삶의 지배적인 잣대로 절대화 될 때가 문제일 것이다. 나의 가치와 너의 가치를 유통시키고 소통시키고 위해서, 그리하여 더 많은 가치들의 세계를 알기 위해서 만든 기준과 잣대가, 결국 가치들을 서열화하고 획일화 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객관적인 잣대가 고유함의 감각을 누르는 순간부터, 개관적인 잣대로 스스로를 판단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불안해진다. 그리고 불안할수록 남들이 모두 안전하다고 하는 길을 선택한다. 공부 잘하고 남들이 좋다고 하는 대학을 나와서 남들이 모두 좋다고 하는 직업을 가지고 남들이 모두 알고 있는 유명한 직장에서 일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점점 더 불안해진다. 남들이 다 사는 동네에 남들이 다 사는 집을 사서 남들이 다 다니는 학원에 아이를 보내고, 남들이 사는 차와 남들이 사는 옷을 사고, 남들이 가는 여행지에 가서 남들에게 사진을 찍어 인증한다. 남들이 비트코인을 사면 나도 산다. 최고로 불안해진다. 전혀 다른 길을 가더라도 어떤 방식으로 건 끊임없이 남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
5.
나는 아직 비트코인을 사지는 않았고, 살아온 궤적을 보면 모범답안에서 멀리 떨어진 선택을 해온 것처럼 보이지만, 나 역시 몹시 불안하다.(사실 조금 색다른 선택을 한 경우에조차, 그것이 어던 고유함의 감각에서 나온 결정이라기보다는 주변인들의 인정에 좌우된 결정이었던 경우들을 많이 본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아이를 볼 때 가장 확고하다. 나 자신에 대해서는, 내 가족에 대해서는, 남들의 시선, 남들의 평가가 어떤지 하는 감각에 휘둘리더라도 내 아이에 대해서는 가장 덜 그럴 자신이 있다. 나는 이런 감각과 태도가 확장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내 아이가 독특한 그 아이만의 가치로 귀하다고 느끼는 만큼, 나 자신도, 내 가족도, 내 친구들과 동료들도, 또 다른 사람들도 그 고유함으로 귀하다고 진심으로 느끼고 인정하게 되기를 바란다. 돌봄에서 회복한 이 감각을 다시 퇴화시키고 싶지 않다. 더 크게 사용하고 싶다.
김희진(인문서 편집자)
6세 여아를 키우는 엄마이자, 인문서를 만드는 편집자이다.
서누배
2018.12.03
글 잘 읽었습니다 :)
iuiu22
2018.01.17
아이가 커가면서 ‘고유함에 대한 감각’이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가 있다. 여전히 나에게 고유한 의미를 지닌 아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 아이를 어떻게 판단하는가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거 정말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