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긴 식탁을 사고 싶었다. 몇 년 전 뚝딱뚝딱 직접 만든 식탁은 이제 색이 바래 볼품없다. 예전만큼 예쁜 인디언핑크빛이 나질 않는다. 페인팅을 네 번도 넘게 한 건데. 그래서 나는 아주 긴 새 식탁이 갖고 싶었던 거다. 단출한 가족에 긴 식탁이 필요할 리 없어서 나는 엉뚱하게도 북클럽을 만들었다.
내가 사는 동네는 중소형 아파트 단지라서 젊은 아기 엄마들이 많았다. 입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뿐 아니라 그녀들도 동네 친구가 필요했고 이왕이면 아기들을 어린이집에 보낸 뒤 함께 조곤조곤 책을 읽을 수 있다면야 꽤나 괜찮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모두 여덟 명이 모였다. 처음에는 일곱 명이 적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우리 집 찬장 속 찻잔이 딱 여덟 개였다. 그래서 여덟 명이 되었다.
몇 년 전 나는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강 머리 앤』을 번역했다. 내가 아는 최고의 수다쟁이 소녀 앤 셜리가 사는 동네 이름이 ‘에이번리 마을’이다. 마릴라와 매슈는 물론이고 참견쟁이 린드 부인과 우아한 앨런 사모님, 다정한 스테이시 선생님과 앤의 친구들인 다이애나 베리와 루비 길리스, 제인 앤드루스가 살던 그 동네 말이다. 가끔 에이번리 마을이 있는 캐나다의 프린스에드워드 섬을 생각하면 가보지도 않은 그 섬을 타고 도는 바닷바람이 목덜미에 느껴질 때가 있다. 해질 무렵 자작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지붕들 아래로 그들의 수다가 들릴 듯도 하고. 그래서 나는 내 멋대로 ‘에이번리 북클럽’이라 이름 지었다.
이제껏 옆집에 누가 사는지 궁금해본 적도 없고 반상회 같은 것이 여태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나대로만 살아왔다. 그래서 우리 집에 다이애나 베리와 루비 길리스, 제인 앤드루스들이 처음 오던 날, 나는 엄청나게 긴장했다. 찻잔들을 꺼내놓고 보이차와 세이지차를 준비했다. 음악은 필요 없을 것 같았고 몇 번이나 청소기를 밀며 카펫의 먼지를 떨어냈다. 에이번리 북클럽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느 매체에선가 ‘안 읽어도 읽은 척 하는 책’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다는데 응답자의 65%가 읽지 않고도 읽은 척 한 적이 있다고 대답을 했단다. 1위가 조지 오웰의 『1984』였고 2위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였단다. 에이번리 북클럽은 그 중 9위를 차지했던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먼저 읽었다. 몇 년 전 들인 펭귄클래식 150권 중 『오만과 편견』은 50번째 책, 순서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꽂혀 있는 걸 보니 나도 어지간히 묵혀두기만 한 듯했다. 다시 읽는 김에 『오만과 편견』을 재구성해 만든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도 다시 보았고 영화 <오만과 편견>도 보았다. 다이애나와 루비와 제인들은 우리 집 식탁에 모여 앉아 소설 속 주인공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밀당에 혀를 찼고 찌질한 콜린스와 철딱서니 없는 리디아와 위컴을 흉보았다. 두 시간은 금방 흘렀다.
두 번째 책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다. 며칠 남지 않았는데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아직 긴 식탁을 사지 못했다. 식탁 때문에 북클럽이 만들어졌는데도 말이다. 봄이 다 와서 거실에 엎드려 『노인과 바다』를 읽다 보니 등을 쪼이는 햇살이 간지럽다. 시쳇말로 ‘상남자’로 유명세를 떨쳤던 헤밍웨이의 소설을 읽다보니 자꾸 딴생각이 난다. 네 번이나 결혼을 했지만 그러고도 모자라 다섯 번째 애인 아드리아나를 만났던 남자. 하지만 헤밍웨이는 다섯 번째 결혼까지 하지는 않았다. 네 번째 아내 메리가 너무 순종적인 여자여서 굳이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나. 아마도 다음 에이번리 북클럽 모임 때에는 바람둥이 헤밍웨이에 대한 뒷담화가 소설 이야기보다 더 길어질 것 같다. 그래서 더 재미나겠지만. 어쨌거나 오늘 내로 새 식탁은 골라두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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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조지 오웰 저/정회성 역 | 민음사
『동물농장』과 함께 조지 오웰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전제주의라는 거대한 지배 시스템 앞에 놓인 한 개인이 어떻게 저항하다가 어떻게 파멸해 가는지, 그 과정과 양상, 그리고 배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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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레프 톨스토이 저/박형규 역 | 문학동네
『전쟁과 평화』는 1805년부터 1820년까지 15년에 걸친 러시아 역사의 결정적 시기를 재현한 소설로, 나폴레옹 침공과 조국전쟁 등의 굵직한 사건과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수많은 개별 인간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과 죽음, 새로운 삶의 발견을 그린 일대 서사시적 장편소설이다.
김서령(소설가)
1974년생.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어디로 갈까요』와 장편소설 『티타티타』, 그리고 산문집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를 출간했으며 번역한 책으로 『빨강 머리 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