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누구도 그녀가 주인공이 될 운명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소설 뒤에 꿈틀대는 제인 오스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노생거 수도원』을 읽어봅니다.
글ㆍ사진 심완선(SF 평론가)
2024.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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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생거 수도원』

제인 오스틴 저/최인자 역 | 시공사


고급 문학이니 뭐니 문학의 ‘급’을 전제하는 듯한 말을 보면 나는 종종 제인 오스틴을 생각한다. 오스틴은 소설이 그야말로 ‘소설小說’, 혹은 하찮은 글이라는 의미의 ‘로맨스’라고 경시되던 시기에 활동했다. 소설은 여자들이나 읽는 것, 여자들이나 쓰는 것, 여자들 이야기나 하는 것이었다. 제인 오스틴의 『노생거 수도원』은 소설이 천대받는 상황을 지적한다. 소설 읽기는 자랑스러운 행동이 아니었으므로, 독자들은 점잖아 보이기 위해 짐짓 소설을 멀리하고 깎아내린다. “전 소설 독자가 아니에요.” “소설 따위는 읽지 않아요.” “제가 소설을 자주 읽는다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소설치고는 괜찮군요.” “오! 그냥 소설책이에요!”

 

소설은 한동안 엉터리나 시시한 공상, 시답잖은 심심풀이 오락, 편지와 같은 가벼운 글로 치부되었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은 이런 편견에 들어맞는 것처럼 보인다. 『오만과 편견』은 재산이 어쩌니 성격이 어쩌니 하며 어느 마을의 일상을 시시콜콜 묘사한다. 작중에 군인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전쟁이나 죽음 같은 고통스러운 내용은 조심스럽게 배제된다. 등장인물은 대체로 일정 이상의 신분과 재산을 보유한다. 소설 전체를 통틀어 최악의 상황은 돈 없는 나쁜 놈과 결혼하는 것이다. 여자주인공 엘리자베스는 부유하고 잘생긴 남자주인공 다아시와 결혼하며 부와 사랑을 모두 성취한다. 그녀의 재치 넘치는 반항기는 결혼 후 조금 ‘부드러워’진다. 소설의 결말은 결혼이 곧 여자의 행복이라는 보수적인 규범에 통합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거듭 재발견되었다. 소설의 줄거리 뒤에서 꿈틀거리는 작가의 목소리가 주목을 받았다. 제인 오스틴이 쓰는 문장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다. 이 작가, 또는 작가를 대변하는 서술자는 절대 순순한 성격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서술하는 내용이 달갑지 않다는 태도를 자주 드러낸다. 소설 곳곳에서 냉소와 문제의식이 고개를 내민다. 

 

예를 들어 『오만과 편견』 이런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구체적인 표현은 번역본마다 다르지만(여기서는 윤지관, 전승희가 옮긴 민음사 판본을 인용했다)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의 의미는 동일하다. 남자가 돈을 벌면 여자는 그 돈으로 집안을 관리한다. 결혼은 그런 거래로 이루어지곤 했다. 그런데 아무리 이해득실을 따지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고 해도, 연인이나 부부 관계를 오로지 돈 문제로 환원할 수는 없다. 적어도 『오만과 편견』의 서술자가 이를 바람직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그녀는 오히려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하는 듯하다. 남자의 ‘아내’가 될 여자들이 처한 현실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이 직업을 갖고 자립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시대였으므로 결혼은 실제로 생계를 좌우하는 문제였다. 그러니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는 마땅히 아내를 얻어야 했다. ‘진리’는 빈정거림을 담은 과장된 표현이다. 소설의 내용을 고려하면 더더욱, 서술자가 무미건조하게 이야기하는 중이라고 읽을 수가 없다. 그녀는 작가를 대변하여 한숨을 쉬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시작한다.

 

작가의 목소리가 가장 쩌렁쩌렁하게 들리는 소설은 『노생거 수도원』이다(‘노생거 사원’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노생거 수도원』은 제인 오스틴이 첫 번째로 완성한 장편소설이자 처음으로 출판업자에게 팔았던 작품이었다. 어째서인지 출간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노생거 수도원』은 13년 후에야 다른 곳에서 겨우 빛을 보았다. 작가의 작품 중에서 가장 늦게 출간된 셈이다. 그래서 제인 오스틴은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글을 추가했다. 예전에 썼던 작품이니 어색한 부분이 있더라도 감안해달라는 내용이다. 나는 제인 오스틴이 내용을 뜯어고치지 않았다는 점에 크게 안도했다. 『노생거 수도원』의 서술자는 제인 오스틴의 여자주인공들처럼 날카롭고 재기발랄하다. 그녀는 당대에 유행했던 고딕 로맨스 소설을 신랄하게 빈정거리고, 지나치게 극적으로 상황을 꾸미는 클리셰에 넌더리를 낸다. 동시에 소설이야말로 훌륭한 예술이라며 호기롭게 자부심을 표출하기도 한다. 그녀는 투덜거리면서도 소설의 여자주인공을 아낀다. 그리고 소설을 사랑하는 여자들을 응원한다.

 

『노생거 수도원』의 주인공 ‘캐서린’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소설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어릴 적 캐서린 몰랜드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녀가 여주인공이 될 운명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으리라.” 고딕 로맨스 소설은 으스스하고 극적인 연출을 위해 여자주인공의 취약한 처지를 강조하곤 했다. 그런데 소설과 달리 캐서린의 아버지는 딸을 감금하거나 학대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캐서린을 낳다가 사망하기는 커녕 건강한 상태로 동생들을 낳았다. 캐서린은 성격도 자질도 특출난 점이 없었다. 가르치기도 전에 배우는 경우는 없었고, 어떨 때는 가르쳐도 익히지 못했다. 『노생거 수도원』의 서술자는 캐서린의 평범한 면모를 두고 ‘여자주인공’답지 못하다며 호들갑을 떤다. “어느 쪽도 변변치 않았고, 틈만 나면 수업을 빠지려고 했다. 얼마나 엉뚱하고 유별난 성격인지! 열 살에 이런 품행 불량의 조짐을 다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캐서린은 마음씨가 나쁘거나 성질이 고약하지는 않았다.”

 

캐서린의 연애도 지극히 평범하고 평탄하게 진행된다. 여자주인공답게 캐서린도 도시로 여행을 떠나긴 하지만, “강도나 폭풍우를 만나지도 않았고, 그들을 남자 주인공에게로 이끄는 행운의 마차 전복도 일어나지 않았다.” 소설은 고딕 로맨스의 관습을 사정없이 풍자한다. 처음 참석한 무도회에서도 캐서린은 특별한 경험을 하지 못한다. “그녀를 보고 황홀경에 빠진 남자도 없었고, 저 아가씨가 누구냐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무도회장 전체를 맴돌지도 않았고, 아무도 그녀를 여신이라 부르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나쁜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캐서린은 그야말로 보통 사람이다. 소설책을 매우 좋아하고 고딕 로맨스에 푹 빠졌다는 점이 조금 특이한 정도다. 캐서린은 순진하고 또 어리석게도 재미를 기준으로 책을 판단한다. “가끔 역사책이 이렇게 지루하다는 게 이상하다니까요. (...) 영웅의 입에서 나오는 연설이며 생각, 계획들, 거의 모두 지어낸 이야기잖아요. 다른 책에서 보면 지어낸 이야기들은 재밌던데.”

 

그렇다면 『노생거 수도원』은 재미 위주의 고딕 로맨스를 비판하는 소설이라고 읽어야 할까? 여기서도 소설의 줄거리와 서술자의 어조가 복잡하게 얽힌다. 작중 캐서린에게 수작을 거는 소프 씨는 형편없는 남자다. 그는 앞뒤가 안 맞는 허세를 부리며 제멋대로 행동한다. 캐서린과 대화하면서 잘난 척하느라 소설을 냅다 깎아내리는 점이 특히 괘씸하다. 그는 당대 고딕 로맨스 소설 중에서 최고로 유명하다고 할 만한, 앤 래드클리프의 소설 『우돌포의 비밀』을 형편없다고 평한다. 그리고 말을 덧붙인다. “혹시 뭔가 읽는다면, 래드클리프 부인 소설을 읽겠죠. 그래도 그 사람 소설은 꽤 재밌으니까 한번 읽어볼만합니다. 재미도 있고 박진감도 있어요.” 캐서린은 조심스럽게 대답한다. “『우돌포』가 바로 그 래드클리프 부인이 쓴 거예요.”

 

반면 남자주인공에 해당하는 헨리 틸니는 소설에 호의적이다. 그는 『우돌포』를 비롯해 소설의 재미에 푹 빠져본 사람이다. 소설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는다. 캐서린은 헨리와 이야기하면서 점차 성장한다. 심지어 그는 캐서린을 따끔하게 훈계하기도 한다. 틸니 집안의 초대로 노생거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캐서린은 고딕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으스스한 분위기를 맛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정작 수도원 자체는 밝고 현대적이라 실망스럽지만, 헨리의 아버지인 틸니 장군의 언행은 수상쩍다. 캐서린은 그가 아내를 잔혹하게 괴롭히는 폭군이리라고 상상한다. 어쩌면 틸니 부인은 죽은 게 아니라 수도원의 지하실 어딘가 감금된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상상을 알아챈 헨리는 소설과 현실을 구별하라며, 소설 같은 일이 어떻게 실제로 일어나겠느냐고 말한다. 캐서린은 눈물을 흘리며 분별 없이 굴었던 점을 반성한다. 물론 결말에 이르면 캐서린은 헨리와 결혼한다. 줄거리만 보면 『노생거 수도원』은 소설의 재미를 인정하되 적당히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중 소설이 문제가 되는 순간, 시종일관 빈정거리던 서술자는 갑자기 분기탱천하여 무대 전면으로 나선다.

 

“그렇다, 소설책이다! 나는 소설가들이 흔히 따르는 쩨쩨하고 졸렬한 관습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모욕적인 비난으로 자신이 하는 작업을 깎아내리고 스스로 적의 무리에 합세하는, 그러니까 소설 작품들에 가장 신랄한 형용사를 자신의 여주인공에게는 절대 읽는 것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최고의 적들과 연합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여주인공은 우연히 소설을 집어 들었다가도 시시한 내용에 넌더리를 내며 던져버릴 게 틀림없다. 슬픈 일이로다! 소설의 여주인공이 다른 소설의 여주인공에게서 후원을 받지 못한다면, 대체 어디서 지지와 보호를 받을 수 있을까? (...) 우리 소설가들은 서로를 저버리지 말자. 우리는 이미 상처받은 몸이다. 우리가 생산하는 작품은 세상의 어떤 문예 활동보다 더 폭넓고 진솔한 기쁨을 제공해주지만, 어떤 종류의 글쓰기도 이렇게 비난받은 적이 없었다. 자만심 때문인지, 무지, 혹은 유행 때문인지 우리의 적은 우리 독자들만큼이나 많다.”

 

소설 아닌 책들은 “개연성 없는 상황 묘사와 부자연스러운 등장인물, 실제 삶과는 더 이상 아무 관련 없는 화제들로 가득 채워져 있기 마련이다. 그 언어 또한 너무 조악해서 그런 걸 용납할 수 있는 세대에 대해 결코 호감을 가질 수가 없게 만든다.” 그러니까 소설이야말로 “한마디로 가장 위대한 정신력을 드러내고,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철저한 지식과 그 다양성에 대한 가장 훌륭한 묘사, 그리고 재치와 유머의 가장 생생한 발산을 최고의 엄선된 언어로 세상에 전달하는 책들인 것이다.” 『노생거 수도원』의 열렬한 웅변을 읽으면, 도무지 소설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서술자가 캐서린을 나무란다고 볼 수도 없다. 『노생거 수도원』의 결말은 오히려 소설을 강력히 옹호하는 내용이다.

 

서술자는 캐서린이 어리석다고 이야기하는 한편으로, 소설을 비하하는 사람들이 훨씬 어리석다는 점을 지적한다. 틸니 장군이 가족을 학대했다는 것은 순전히 캐서린의 상상이다. 하지만 그는 소설에 나오는 악당처럼 난폭하고 배려 없는 성격이기는 하다. 고딕소설에 익숙한 캐서린은 비록 사실관계는 틀렸을지언정 틸니 장군의 사람됨을 제대로 포착한다. 서술자는 틸니 집안의 상황을 설명하며 캐서린이 옳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어쨌든 캐서린이 틸니 장군을 살인자나 아내 감금자로 의심했던 것도, 알고 보니 그의 성격을 심하게 왜곡했거나 그의 냉혹함을 크게 과장한 게 아니었다.” “그녀의 걱정은 사실에 근거하고 있었고, 두려움은 개연성에 기반하고 있었다.” 캐서린에게 현실을 제대로 보라고 가르치던 헨리는 보지 못했던 진실이다.

 

결말에 관해, 『노생거 수도원』은 심술궂게도 독자에게 판단을 떠넘긴다. 틸니 장군이 캐서린을 부당하게 냉대한 덕분에 헨리는 캐서린에게 책임을 품는다. 그로 인해 캐서린은 헨리와 결혼하기에 이른다. 고딕소설에 나올 법한 극적인 사건이 두 사람을 맺어준 것이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하나의 태도로 읽기엔 너무 의뭉스럽다. 그중에서도 『노생거 수도원』은 문장과 별개로 메아리치는 작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고, 나는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귀를 기울이길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소설을 폄하하는 사람이 혼쭐나기를, 히죽거리며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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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완선(SF 평론가)

책과 글쓰기와 장르문학에 관한 글을 쓴다. SF의 재미와 함께, 인간의 존엄성 및 사회적 평등과 문학의 연결 고리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SF와 함께라면 어디든: 키워드로 여행하는 SF 세계』 『우리는 SF를 좋아해: 오늘을 쓰는 한국의 SF 작가 인터뷰집』 『SF는 정말 끝내주는데』가 있고, 『취미가』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를 함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