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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스로 지켜지는 인간의 영토

서효인 『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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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는 세련되고 정교한 윤리의 작동을 그리는 시집이 아니다. 오히려 아무리 애써도 그것이 잘 작동되지 않고 있음을 그려내는 시집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삶이란, 이 수많은 어긋남을 발생시키는 수많은 관련들을 파악하고 이해함으로써 이어질 수 있는 것임을 믿고 있는 시집이다.

황인찬.jpg

 

생각해보면 인간적이라는 말은 참 이상하다. 누군가에게 그 녀석은 참 인간적이야, 라고 말할 때 그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인간적이라는 말은 인간이 아닌 것에 붙일 수 있다. 이 물은 참 물 같다, 저 나무는 참 나무 같다, 그런 말을 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인간적이라는 말을 쓸 때,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간은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너는 인간이 아니면서도 인간이 되려고 애쓰는구나. 그것이 인상 깊구나. 내가 이해하는 인간적이라는 말의 뜻은 이러하다.

 

서효인의 시는 인간적이다. 내가 그의 시를 사랑하는 것은 그것이 너무나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서효인의 시는 꾸준하게 윤리와 현실의 괴리에 대해 고민해왔다. 첫 시집인 『소년 파르티잔 행동지침』이 윤리의 균열을 체감하기 시작하며, 스스로를 ‘소년 파르티잔’이라는 아이러니한 자리에 위치시킨 시집이었다면, 2집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은 배워서 알고 있는 윤리(행동지침)가 사실 삶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깨달으며, 세계에 대한 믿음과 삶의 지난함을 강렬하게 대비시키는 시집이었다. 삶과 윤리의 어긋남 속에서 그 괴리를 맞추고자 겨우 애쓰는 것, 그보다 인간적인 일이란 없다. 그의 시는 그 인간적인 일을 끊임없이, 애써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세 번째 시집 『여수』가 등장했다. 여수는 서울이 아닌 지방의 도시이며, 시인의 고향과 가까운 곳이고, 시인이 스스로 밝히듯 처가가 있는 도시다. 이러한 점이 명백하게 드러내는 것은 세 번째 시집의 관심사가 지금의 삶을 이루고 있는 가족, 고향,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땅 자체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도시를
사랑하게 된 날이 있었다

 

(중략)

 

도시의 복판에 이르러 바다가 내보내는 냄새에
눈을 떴다 멀리 공장이 보이고
그 아래에 시커먼 빨래가 있고
끝이라 생각한 곳에서 다시 바다가 나타나고
길이 나타나고 여수였다

 

너의 얼굴이 완성되고 있었다
이 도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네 얼굴을 닮아버린 해안은
세계를 통틀어 여기뿐이므로

 

표정이 울상인 너를 사랑하게 된 날이
있었다 무서운 사랑이
시작되었다
- 「여수」 부분

 

무서운 사랑이란 무엇인가. 시인에게 사랑이란 단지 ‘너’를 사랑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너’를 닮은 해안을, ‘너’가 있는 도시를, 그 세계를 사랑하는 일이다. 두 사람만으로 이루어진 폐쇄된 세계가 아니라, 기원이 있고 관련이 있으며 타자가 있는, 그것이 바로 『여수』의 세계이며 시인이 끊임없이 그려온 세계다. ‘나’는 공장이 표상하는 근대의 그림자와 그로 인해 시커매진 빨래가 암시하는 삶의 간난이 깃든 그 세계에서 ‘너’를 사랑한다. ‘너’에 대한 사랑은 ‘너’와 이 세계 사이의 관련을 깨닫는 것으로 성립한다. 이 세계가 이토록 두렵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바로 ‘너’를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사랑이 어찌 무섭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이 사랑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 그 사랑으로 살아가겠다는 것. 그것이 『여수』의 사랑이다.

 

이모는 대우어패럴에 다녔다고 했다. 어느 날은 새우잠을 자던 기숙사 방 윗목에서 거의 알몸으로 두들겨 맞는 꿈을 꾸었다. 나는 가리봉동의 굽은 길을 따라 옷을 사러 간다. 누군가가 이리저리 헤집어 놓은 옷들이 아픈 사람처럼 가판에 누워 있다. 옷들이 누워서 맞는 이모를 얼싸안고 있다. (중략) 분식집들은 없어지고 감자탕집에서 구린내 나는 등뼈의 남은 살점을 뜯는다. 이모의 친구일까. 이모의 사장일까. 이모의 이모일까. 신호가 바뀌고 성난 차가 지나가고 나는 도로에 갇혀 옷을 사기 위해 전력했던 나의 노동을 생각한다. 어쩐지 꿈에서 본 장면 같지만, 나는 알몸이고, 이곳은 구로다.
- 「구로」 부분

 

『여수』는 표제작을 비롯하여 한국의 지명을 제목으로 삼은 시들이 시집의 거개를 이루고 있으며, 그 시편들은 지명을 중심으로 역사적 사실과 사적 경험이 교차하고 서로 섞이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나’라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 드러낸다. 위의 시 역시 ‘구로’를 배경으로 하는 여러 층위의 기억들이 교차하고 있다. 산업화의 기억과 ‘이모’의 삶이 교차하고, 다시 거기서 만들어진 옷을 사 입는 ‘나’가 교차하고, 다시 식당에서 ‘이모’라 불리는 수많은 누군가들이 은연중에 교차한다. 이처럼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으며, 그러한 관련 속에서 ‘나’라는 것이 성립한다. ‘너’뿐 아니라, ‘나’ 역시 이러한 관련 속에 놓여 있음을 강하게 자각하는 것이다. 그런 자각 속에서 사랑에 대한, 삶에 대한 의지가 드러난다.

 

‘나’와 ‘너’, 우리와 관련한 그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의 삶이 이토록 두려운 것임을 깨닫게 되면서도, 그러한 깨달음 속에서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것이 『여수』의 사랑이며 『여수』의 삶이다. 아마 이러한 의지가 바로 시인이 믿고 있는 삶의 윤리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의 윤리가 우리의 삶과 잘 맞지 않음을 솔직하게 그려내는 것 역시 그 윤리의 작동이리라.

 

『여수』는 세련되고 정교한 윤리의 작동을 그리는 시집이 아니다. 오히려 아무리 애써도 그것이 잘 작동되지 않고 있음을 그려내는 시집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삶이란, 이 수많은 어긋남을 발생시키는 수많은 관련들을 파악하고 이해함으로써 이어질 수 있는 것임을 믿고 있는 시집이다. 그 어긋남들 속에서 가까스로 인간의 영토를 지켜내는 것, 그것이 인간적인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수 서효인 저 | 문학과지성사
시인 서효인의 세번째 시집 『여수』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제30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백 년 동안의 세계 대전』 이후, 6년 만에 선보이는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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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황인찬(시인)

1988년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문창과를 졸업했으며 2010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으로 등단했다. 제31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시집으로 『구관조 씻기기』가 있다. 현재 ‘는’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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