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의 “연주하는 모습을 찍겠습니다”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바흐(1685~1750)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여러 대목이 흘러나온다. 풍성하다. 자연스럽다. 가을 나무의 색상을 닮은 그녀의 첼로는 가을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듯하다.
지난 3월, 중앙대 음대 교수로 부임한 주연선은 올해 초까지 서울시향의 첼로 수석이었다. 그녀가 입단한 때는 2008년. 당시 수석 자리는 3년 넘게 공석이었고, 2006년부터 예술 감독직을 맡고 있던 정명훈은 유럽과 뉴욕 현지에서 국경을 넘는 오디션을 펼쳤다. 그녀는 정명훈으로부터 “굵고 남성적인 연주가 매력적이다”는 칭찬과 함께 입단을 허락받았다. 이후 서울시향의 첼로 파트를 이끄는 수석으로, 현악4중주단 크네히트ㆍ첼리스타 첼로 앙상블ㆍ주트리오 등 실내악단의 멤버로 활동했으며, 독주자로도 관객과 성실히 만나왔다.
오케스트라 속의 첼로 주자를 숲속의 나무에 비유한다면, 실내악단의 첼로 주자는 정원의 나무에, 그리고 독주자는 너른 벌판에 우뚝 선 나무에 비유할 수 있겠다. 이처럼 음악으로 숲과 정원, 너른 벌판에 자신을 세우는 첼리스트 주연선의 이야기를 담아보았다.
주연선이 연주하는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중 1번 프렐류드(전주곡)
언니(연주)와 동생(연경)도 서울시향에 함께 재직하는 음악자매로 유명하고요, 이들과 함께 하는 주트리오도 음악계에 소문이 자자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이 주위에 자연스레 놓여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어떤 계기로 첼로를 전공하게 되었나요?
어렸을 때,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음악학원에서 바이올린, 플루트, 피아노, 첼로를 모두 배웠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공부’와 ‘음악’,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던 반면 우리는 바이올린, 플루트, 피아노, 첼로 중 하나를 택해야 했어요. 이미 정해진 것이었죠.(웃음) 바이올린 소리는 너무 고음이었고, 플루트는 불 때 어지러웠다. 피아노를 굉장히 좋아하긴 했는데…. 재능이 없었죠. 첼로가 저와 맞더라고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전공으로 정했고요.
해외 유명 오케스트라에 재직 중인 한국인 단원들을 인터뷰하다 보면 학창 시절에는 오케스트라 입단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입단 후 음악의 새로운 세계와 만난다는 얘기들을 많이 들어요. 높은 경쟁률을 뚫고 2008년 서울시향 수석으로 입단했는데요, 학창 시절부터 오케스트라 입단을 생각했었나요?
미국 캔자스시티 오케스트라에 부수석으로 3년 정도 재직했어요. 저 역시 남들처럼 학창 시절엔 협주곡 등 독주 중심의 교육을 받았어요.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원에 입학했는데, 친구들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에 입단을 목표로 객원 단원도 시험 보는 등 오케스트라에 많은 관심을 갖더라고요. 열일 곱, 열여덟 살 때였어요. 저는 좀 무관심했었죠. 그러고는 라이스 대학원에 입학했는데, 졸업을 앞두고 미국에서의 음악생활을 이어나가기 위해선 학생이거나 직장을 잡아야 하더라고요. 연주자로서 가질 수 있는 직장은 교향악단이잖아요. 그래서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로 입단을 택했죠.
입단 후에 많은 경험을 했을 것 같은데요.
그럼요. 많은 것을 배웠어요. 미국의 사회생활, 음악적으론 오케스트라를 중심으로 한 레퍼토리를 배웠죠. 교향악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것이에요. 정말이지 최고의 집중력으로 수많은 악기 소리를 들어야 해요. 서울시향에 입단할 땐 이러한 훈련이 어느 정도 되어 있는 상태였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부터 독주자가 되는 것 외에 오케스트라에도 관심을 많이 가졌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미래에 대해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귀 옆에서 바로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 혹은 비올라와 비교하면 첼로나 더블베이스는 상대적으로 귀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소리를 내고 소리도 낮습니다. 많은 수의 악기가 모인 오케스트라에서 첼로 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해 연주자가 가하는 노력 같은 것이 있나요?
바이올린의 경우 귀 옆에서 소리를 바로 듣는다면, 첼로는 공간을 울린 소리를 들어야 해요. 울림이 굉장히 풍성하죠. 그리고 보시다시피 첼로를 몸으로 감싸고 있잖아요. 악기가 심장에 닿아있고요. 굉장히 촉각적인 악기에요. 이런 점에서 몸으로 다가오는 것이 그 어떤 악기보다도 많아요.
첼로가 말을 듣지 않을 땐 어떻게 하나요?
그럴 때가 꼭 있어요. 그럴 땐 현을 새것으로 갈아보기도 하고요. 그래도 안 되면…그냥 내려놓아요. ‘애도 휴식이 필요하구나’라면서요. 악기는 온도나 주위 환경에 굉장히 예민하지만, 신기하게도 제 마음에 따라 반응할 때가 제일 많아요. 마음이 강퍅하면 악기도 소리를 못 내죠.
정명훈 지휘/서울시향의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 연주 실황(2011년 3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첼로 파트의 맨앞에 위치한 주연선의 모습이 보인다
오케스트라에서 첼로 단원으로, 그것도 수석 주자의 책임을 지니고 산다는 것은 어떤가요?
입단 초에는 저 역시 한국의 조직 사회에 처음 들어온 것이라 적응해야 할 것이 많았죠. 저에게 주어진 호칭과 임무는 ‘수석’이지만, 저보다 나이가 많은 단원들에게 요구해야 하는 입장이 될 때는 좀 어색하기도 했어요. 지내다 보니 음악적인 부분도 그렇지만 음악 외의 부분들도 신경 써야 할 때가 더 많은 것 같아요.
오케스트라 단원에게 연주란 곧 업무이자 책임일 텐데요. 연주 중에 틀린다면 일종의 시말서 같은 것도 쓰나요?
연주 시 실수는 일어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지휘자의 사인과 잘 맞지 않거나, 악장을 비롯하여 제1ㆍ2바이올린과 비올라 수석과 사인이 맞지 않는 경우도 있어요. 시말서를 쓰진 않습니다. 하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실수를 하면 너무 부끄럽더라고요. 일종의 마음의 시말서를 쓴다고 해야 할까요.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이 있다면?
2010년에 서울시향이 이탈리아, 독일, 체코, 러시아로 유럽 순회공연을 간 적이 있어요. 그때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에 올랐죠. 베를린 중심가에 있는 유서 깊은 콘서트홀이었는데, 한국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이 무대에 선다는 것에 기쁨과 긴장감이 뒤섞였어요. 정명훈 선생님과 온 단원이 힘을 모았고요. 독주를 꼽자면 작년에 선보였던 독주회인데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을 연주했던 시간이었어요. 큰 도전이었어요. 세 시간이 넘는 공연이었죠. 처음에는 어떻게 끌고 나갈까 고민했는데요, 목적지까지 함께 하며 응원해주신 관객들을 보며 오히려 제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동안의 보금자리였던 서울시향만의 특징과 분위기를 몇 개의 단어로 표현한다면?
‘으샤! 으샤!’ 하는 분위기, 넘치는 에너지, 기가 세지만 순진한 단원들이요.
오케스트라, 실내악, 독주. 이처럼 ‘3박자’를 완벽히 갖춘 연주자라고 생각합니다. 이 중에 특히 좋아하는 장르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꼽기가 힘드네요. 어떤 장르든지 간에 늘 잘하고 싶을 뿐이고, 관객에게 잊지 못할 순간을 만들어드리고 싶어요. 늘 소원이죠. 그런 음악가가 되기 위해선 이 장르들을 모두 경험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오케스트라는 현실적인 문제로 시작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정말 피와 살이 되는 경험이었고요.
주연선은 소니(Sony) 레이블에서 녹음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 을 2016년에 출시했고, 같은 해에 같은 곡들로 리사이틀을 가진 바 있다. 바흐가 1712~1723년에 작곡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곡은 오랜 세월 연습곡으로 여겨지며 평가 절하되던 작품이었다. 1889년 파블로 카잘스(1876~1973)가 우연히 악보를 발견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첼로의 ‘신약성서’로 흔히 바흐의 이 곡을 꼽고, ‘구약성서’로는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를 꼽는다. 이처럼 음악가에게 바흐란 늘 위대한 존재다. 그래서 바이올리니스트는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첼리스트는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녹음과 공연 음악인생의 전환점으로 삼곤 한다. 주연선의 음반의 첫 장에는 ‘Soli Deo Gloria(솔리 데오 글로리아)’라고 적혀 있다. ‘오직 주님께 영광을’이라는 뜻이다.
피아노와 함께 하는 독주도 아닌, 무대 위에 자신과 첼로만 덩그러니 놓인 채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으로 관객과 ‘독대’한다는 건 어떤 느낌인가요? 모든 시선과 책임이 오직 본인에게로만 향할 텐데요, 그 ‘고독’이란 어떤 느낌이에요?
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시간이었어요. 제가 내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오직 저에게만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바흐는 정말 위대한 작곡가에요. 이 곡으로 내가 무엇을 하겠다기보단 욕심을 내려놓는 순간에 저와 음악도 더 잘 보여주게 되더라고요. ‘나는 작은 사람일 뿐이야. 그냥 주연선이고. 바흐가 만든 음악의 세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요만큼 밖에 없어’라면서요. 눈앞에는 객석이 보였지만 작은 방 안에서 하늘의 신과 교감한다는 생각으로 했어요. 혼자 기도하는 마음으로요.
주연선이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중 2번(2016년 3월,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1번(BWV 1007)부터 6번(BWV 1012)으로 구성된 곡으로, 여섯 곡을 모아놓아서 ‘모음곡’이라 부른다. 곡마다 20~30분 분량이다. 작곡가들에게는 후대의 음악학자들이 그들의 작품을 목록화하기 위한 ‘작품번호’가 있는데, ‘BWV’는 1950년 볼프강 슈미더가 붙인 바흐의 작품 번호로 현재 1126까지 되어 있다.
여섯 개의 모음곡 중에 가장 애호하는 것은 몇 번인가요?
4번이에요. 프렐류드(전주곡)는 묘한 화성으로 진행되는데, 그 안에서 갈피를 못 잡으면 끝장나는 블랙홀 같은 곡이죠. 오디션 곡으로 많이 사용되는데 최악의 점수를 예상할 수밖에 없어요. (웃음) 그러면서도 어쩌면 이토록 애정 어린 느낌이 나는지.
첼로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교향곡, 실내악, 독주곡을 추천해주신다면?
브람스가 작곡한 교향곡 1번부터 4번은 제가 짝사랑하는 곡들이에요. 오케스트라 내 바이올린ㆍ비올라ㆍ더블베이스ㆍ첼로의 응집력이 대단한 곡인데요, 오케스트라가 첼로처럼 노래하는 곡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저음이 시종일관 받쳐주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정명훈 선생님도 이 곡을 지휘할 때마다 외치셨어요. ‘딕 인(Dig in)! 딕 인!’ 실내악은 슈베르트의 현악 5중주곡 D.956(작품번호 596)이에요. 현악 4중주 편성(두 대의 바이올린ㆍ비올라ㆍ첼로)에 첼로가 한 대 더 들어간 독특한 편성입니다. 독주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중 1번입니다.
매년 4월마다 예술의전당에서 전국의 시ㆍ도립교향악단들이 모여 교향악 축제를 선보입니다. 이번에는 김홍재가 지휘하는 광주시향과 함께 생상(1835~1921)의 첼로 협주곡을 협연하는데요(4월 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보러가기) 이 곡에 관한 감상 팁을 준다면?
생상은 열정적인 작곡가에요. 앞서 말씀드린 브람스의 열정과는 많이 다르죠. 브람스의 열정이 고민하고 고뇌하며 들어야 하는 것이라면, 생상은 그저 편하게 감상하시면 됩니다. 첼로의 멜로디도 어렵지 않으며 화려하여 축제의 한 장면이 연상되기도 할 겁니다. 저도 생상의 협주곡 협연은 처음이에요.
주연선은 음악적 친정과도 같았던 서울시향과 함께 성시연의 지휘로 블로흐(1880~1959)가 작곡한 ‘셀로모’를 협연한다(5월 25ㆍ2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보러가기). 솔로몬 왕을 히브리어로 발음한 ‘셀로모’는 블로흐가 구약성경의 ‘아가서’에서 영감을 받아 1916년에 작곡한 곡으로 일생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지금까지 ‘첼로 수석 주연선’으로 귀한 경험을 하고 제 이미지를 잘 쌓아왔어요. 이제 여기에 ‘첼리스트 주연선’으로 기억되기 위해 저만의 색깔을 더 찾기 위해 노력하려 합니다."
송현민
음악평론가로 음악 듣고, 글 쓰고, 음악가들을 만나며 책상과 객석을 오고간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공부했고, ‘한반도의 르네상스’를 주장했던 음악평론가 박용구론으로 제13회 객석예술평론상을 수상했다. 월간 <객석>을 중심으로 취재 및 집필 활동을, KBS 1FM에서 방송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