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자식이 많은 것에 비해 비교적 정리정돈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이따금 “우리 집은 아이가 있는 집 같지 않게 깔끔하지?” 하고 기쁜 듯이 자랑하곤 했다. 나는 그런 엄마한테서 태어났지만 아버지한테 “너는 똥이랑 된장도 구분 못하냐”라고 늘 야단맞으며 컸다. 도쿄로 올라와 이모 집에서 하숙하던 시절에는 내가 벗어놓은 옷을 까다로운 이모부가 성난 표정으로 하나하나 주우며 다닐 정도였다.
엄마가 77세였을 때 유럽 여행에 모시고 간 적이 있다. 어디든 가고 싶어 하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이라 무척 기뻐했다. 기뻐하긴 했지만 여행 경비를 댄 내게 “고마워”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고마워’와 ‘미안해’라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여행할 땐 아무튼 짐을 줄이려고 속옷은 낡은 것을 챙겨가 한번 입고 버리고 책은 읽은 만큼 찢어버린다. 의류는 개키지도 않고 보스턴백에 쑤셔 넣는다. 그러나 엄마는 20킬로나 되는 짐을 커다란 여행 가방에 하나하나 꼼꼼하게 챙겨 넣는다. 작은 봉투엔 액세서리가 가득했고 만찬용 드레스랑 구두도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스위스, 파리로 이어지는 로맨틱한 버스투어였다. 엄마는 버스가 멈출 때마다 방문했던 마을 이름을 노트에 기록했다.
엄마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낀 건 여행 중반부터였다.
호텔을 출발하려는데 엄마가 버스를 세웠다. “화장품 가방이 없어” 하고 소란을 피우더니 버스 뱃속에 고이 잠든 커다란 트렁크를 운전수한테 꺼내달라고 했다. 파우치는 트렁크 안에 있었다.
엄마에게 화장은 목숨과도 같았다. 왜 그렇게 중요한 물건을 소홀히 했을까? 늘 핸드백에 넣는데 그날은 왜 트렁크에 넣었을 까? 왜 그렇게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마을 이름을 확인했을까?
그로부터 반 년 후 엄마는 병적으로 뭐든지 잊기 시작했다. 5년이 지나고 나서는 삼면경 화장대 서랍에 들어 있어야 할 화장품이 옷장 안에서 나오기도 하고, 작은 봉투 안에 화장지로 감싼 과자가 하나 나오기도 하고, 눈썹을 여덟 개나 그리기도 했다. 두루마리 휴지가 블라우스 안에서 두 개나 나온 적도 있었다.
온갖 서랍 안에 전혀 관계없는 물건들이 뒤죽박죽 들어 있었다(아아, 엄마의 머릿속이 서랍처럼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엉뚱하고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을 때보다 서랍을 볼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꼭 엄마의 머릿속을 열어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서랍 안에서 데굴데굴 립스틱이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서랍에 다 쓴 립스틱이 딱 하나 들어 있었다(이제 엄마 뇌에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아. 다 쓴 립스틱처럼 되어버렸어).
구십이 되자 엄마는 스스로 설 수 없게 되었다.
엄마에게 나는 ‘누군가’가 되었다. 그 누군가가 한순간 엄마의 자식이 될 때도 있었다. “나, 요코야”라고 하면 엄마의 눈이 번쩍 뜨이고 “진짜? 진짜? 정말이니?” 하며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 아이는 참 착했어” 하고 현실에서 스윽 멀어졌다.
“요코라는 사람, 예뻤어?” (착하고 예뻤지?)
“글쎄, 예쁘진 않았지.” (기분 나쁘게 솔직하네.)
나는 큰소리로 웃는다. 엄마도 웃는다.
“미치코는?” 하고 좋아하는 동생에 대해 물으니 “그 아이는 얌체 같았지.” (이건 신의 소리인가) “엄마는 자식을 참 많이 낳았네”라고 하니 “아니, 나는 아기 안 낳았어” 하고 귀찮은 듯 대답했다.
나도 언젠가 죽겠지. 암으로 죽어도 사고로 죽어도 좋아. 하지만 치매만은 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아가는 길은 선택할 수 있지만 죽어가는 여정은 선택할 수 없다. 엄마도 치매가 되겠다고 선택한 게 아니니까.
요즘 엄마는 ‘고마워’와 ‘미안해’라는 말을 홍수처럼 쏟아낸다(엄마, 평생 그 말을 저축해뒀구나. 이제 일생을 마치기 전에 다 써버리려고 하는구나).
엄마 침대에 같이 누웠다. “엄마, 나 이제 지쳤어. 엄마도 지쳤지? 같이 천국에 갈까? 천국은 어디 있을까?”
엄마가 말했다. “그래? 의외로 근처에 있는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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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있습니다사노 요코 저/이수미 역 | 샘터
『100만 번 산 고양이』 『사는 게 뭐라고』의 작가 사노 요코가 가장 그녀다운 에세이집으로 돌아왔다. 중국 베이징에서 맞이한 일본 패전의 기억부터 가난했던 미대생 시절, 그리고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을 거쳐 홀로 당당하게 살아온 일생을 그녀 특유의 솔직함으로 그려낸다.
사노 요코
1938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으로 돌아와 무사시노 미술대학 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조형대학에서 석판화를 공부했다. 1971년 《염소의 이사》를 펴내며 그림책 작가로 데뷔했다. 주요 그림책으로 《100만 번 산 고양이》 《아저씨의 우산》 《내 모자》 등이 있고,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시즈코 상》 등의 수필을 썼다. 《내 모자》로 고단샤 출판문화상을 수상했고, 수필집 《하나님도 부처님도 없다》로 고바야시 히데오상을 받았다. 2010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