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승 “계속 주석을 달아가면서 읽고 쓰기“
여성적 글쓰기와 여성적 읽기로 순환하는 여백(margin)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는 시간.
글 : 신연선 사진 : 표기식
202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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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네일리아(marginalia)란 “책의 여백에 남기는 표식, 주석, 메모, 삽화, 분류할 수 없는 반응의 흔적들을 총칭”(9쪽)합니다. 오랜 시간 가장자리에, 경계 바깥에 안간힘을 써서 기록을 남긴 작가들이 있었지요. 역사에, 주류 언어에 기록되지 못한 무수한 마지네일리아들. 그러니까 마지네일리아는 필연적으로 여성적 읽기와 쓰기의 장소입니다. “상호 관계적 읽기의 실천”(11쪽)이 벌어지는 현장입니다. 김지승 작가는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에 테레사 학경 차,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토니 모리슨, 다와다 요코 등을 불러오는데요. 이 유동하는 작가들의 여백에 그만의 마지네일리아를 적어 내려갑니다. 덕분에 독자 역시 여성적 읽기의 무한한 가능성을 상상하게 되죠. 자꾸만 길어지는 주석, 아무리 채워도 좁아지지 않는 여백. 그곳에서 힘껏 타자를 초대하는 김지승 작가와 함께 거주해보면 어떨까요. 몸을, 그리고 기억을 내어주는 방식으로. 

 



독자가 작가를 낳는다고 생각해요


'친애하는 책장 친족들'을 호명하면서 책이 열려요. 이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들인지 듣고 싶습니다. 책을 쓰면서 상상한 독자의 얼굴이 있었을 것 같아요. 

저는 독자를 상정하지 않고는 글을 쓰기 힘들어하는 사람 같아요. 구체적인 얼굴이나 분명한 어떤 존재를 떠올린다기보다, 약간 물 같은 건데요. 물은 잠정적으로, 잠깐 머무는 형태로 이름이 달라지잖아요. 계곡, 강, 호수, 바다. 이처럼 잠시 어딘가에 모여 있는 존재들을 상상하게 돼요. 같이 읽고 쓰던 동료들, 아름다움에 깃들어 있는 죄의식을 가르쳐 준 영화 작가들, 경계를 공유하는 기억이 사실은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걸 가르쳐준 지금은 안 보는 옛날 인연들, 생각하면 좀 고통스러운 인연까지도 다 친애하는 책장 친족이죠. 또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에 실린 어떤 작품을 오래 사랑한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그런 분들까지 생각했어요. 

 

짐작보다 더 넓은 범위의 독자까지 나아가는 것 같아요. 

첫 책이었다면 보다 좁았을 텐데요. 그동안 내온 책들을 통해 배웠어요. 생각보다 제가 모르는 곳에서 애정을 품고 계셨던 분들이 많더라고요. 사인회 같은 곳에 조용히 오셔서 말 걸어 주시는 분들을 많이 만나고 나니까 생각하는 범위가 조금 넓어졌어요. 사실 저는 제 책을 읽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를 상상해 본 적이 없어요. 『100세 수업』도 그렇고, 『아무튼, 연필』도 그렇고 읽는 동료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 못 했거든요. 지금은 그래도 그런 분들이 있다는 걸 아는 거예요. 

 

만날 사람들이 조금은 더 있다는 걸 알게 된 뒤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와 같은 책을 출간했다는 것이 의미가 클 것 같아요. 

어떤 여성 작가를 좋아한다는 말을 마음 놓고 못하던 시절이 있거든요. 되게 억압적이던 시절이 있었어요. 남성 작가들은 권위가 있으니까 그런 작가를 좋아한다고 얘기할 수 있지만 여성 작가는 그렇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이런 목록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너무 좋고, 감격스러워요. 심지어 목록이 아직 많이 남았어요. 그게 진짜 좋아요. 

 

목록을 어떻게 구성하신 건가요? 다루고 싶은 작품이 아주 많았을 텐데요. 

쓰고 싶었는데 뺀 작가가 많아요. 시몬 드 보부아르, 조르주 상드, 아니 에르노, 오드리 로드, 클로디아 랭킨, 예니 에르펜베크 같은 작가들이 그런데요. 워낙 메모가 있으니까 써보려고도 생각했지만 시간적으로나 여러 여건이 안 돼서 어쩔 수 없이 뺐어요. 어쨌든 이 책으로 끝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주로 남성 작가 위주로 교육 받았고요. 때문에 끝없이 나열할 수 있는 여성 작가가 이제는 있다는 점에 대한 이상한 감격스러움이 있어요. 제 책장의 비율이 달라지는 거잖아요. 예전에는 거의 남성이었다면 지금은 여성 섹션 많이 생겼고요. 그런 것들이 다 이 책을 쓰게 한 힘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과 같은 토양이 형성된 데에 앞서 계속 쓴 여성 작가가 있었고, 또 그 작가들을 열심히 읽은 독자들 있었던 덕분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그럼요, 그들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저는 독자가 작가를 낳는다고 생각해요. 작가 역시 작가이기 이전에 독자고요. 언제나 독자가 작가가 되거나 독자가 작가를 낳는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나를 분리해서 응시하는 읽기, 그리고 쓰기 


글에 여백과 틈이 많습니다. 독자 또한 이 책을 통해 자신의 마지네일리아를 써 나가길 바란 마음이 읽혔는데요. 채워넣기와 비워내기 사이에서 고심하기도 하셨을 것 같아요. 쓰면서 했던 고민은 무엇이었나요? 

쓰기 전에 고민이 진짜 많은 타입이에요. 쓸 때는 별 생각 안 하고요.(웃음) 쓰기 전에는 원고를 본 편집자님이 이것으로는 책을 만들 수 없다고 하시는 상상까지 하거든요. 최악의 상상을 한 뒤 쓰기 때문에 막상 쓸 때는 거의 다른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대신 쓰는 동안에는 확실히 몸의 기억이나 감각, 리듬에 집중하려고 무척 노력해요. 채워넣기와 비워내기도 사실은 리듬이잖아요. 왔다 갔다, 이것이 잘 이루어지는 일이죠. 저는 저의 여러 조건 탓에 이 세계의 틈에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요. 틈이나 사이 공간에 있는 존재들의 리듬이 있는 것 같아요. 그 리듬이 살아날 때 쓰기가 수월해져요. 그렇지만 일상을 살아야 하고, ‘정상성’을 흉내내야 하는 과제가 종종 주어지죠. 불시에 그런 과제가 끼어들어 이 리듬이 방해를 받으니까요. 쓸 때의 고민은 언제나 내외부적으로 들어오는 방해로부터 나를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 하는 것이에요. 

 

틈의 공간에 있는 존재의 리듬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세요? 

그냥 외로워지는 수밖에 없어요. 어떤 욕망은 놓아야 하는 거죠. 좋은 사람이고자 하는 욕망까지도요. 글을 쓰는 일은 때로는 엄청 나 자신만 생각해야 하는 일이기도 한 것 같아요. 안 그러면 리듬을 못 지키니까요. 제게는 책임져야 할 가족이 없으니까 그런데요. 그렇지 않은 여성들은 진짜 힘들죠. 쓰다가 밥을 차려야 하면 다 날아가 버리는 거잖아요. 타인을 항상 돌보아야 하는 여성들은 얼마나 힘들까, 많이 생각해요. 

 

책에서 아주 다양한 글쓰기를 실천하고 계시잖아요. 『파도』를 다룬 글이 그 작품을 오마주한 글이고요. 『가장 파란 눈』을 다룬 글에서는 편지가 틈입하죠. 『내 식탁 위의 개』를 다룬 글에는 강의의 장면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요. 궁금했어요. 글을 쓰면서 작가님은 자유로웠을까? 하고요. 

메모를 엄청 많이 하는 스타일이에요. 이유는 연필을 쓰기 위해서예요.(웃음) 진짜로 연필을 너무 쓰고 싶어서 메모를 하거든요. 연필을 쓴다는 것은 연필을 통해 종이의 질감을 느끼고, 연필이 종이와 마찰하면서 상실되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거기에 집중하는 것이 제게는 일종의 명상이죠. 기억이 깨어나는 시간이 되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면 불쑥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살았나 싶은 문장이 적힐 때가 있어요. 스스로도 놀라게 되는 문장이 적히고, 그렇게 글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아요. 말하자면 읽는 몸에서 쓰는 몸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죠. 별 생각 없이 메모할 때는 그저 읽는 사람인데요. 문득 딸깍, 하는 신호와 함께 어떤 문장이 나오면서 쓰는 사람으로 전환되는 느낌을 받아요. 그 순간 자유롭다는 느낌이 있어요. 


하지만 쓰는 동안은 내내 억압과 싸워야 하잖아요. 때문에 찰나적으로 느꼈던 그 자유를 기억하려고 애써요. 결국 자유롭기 위해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잠깐 느꼈던 그 자유를 잊지 않기 위해서 쓰는 것 같고요. 그래서 저한테는 글을 쓴다는 것이 늘 그 자유를 최대한 붙잡으려는 노력 같아요. 너무 많은 억압이 들어오니까요. 

 

"글을 쓰고 있다고 자각하는 즉시 찢어지는 몸"(84쪽)에 대한 말씀에서도 엿볼 수 있듯 특히 내가 포개지는 읽기와 쓰기에는 분명 곤란함이 있는 것 같아요. 

미래를 향해 에너지를 쓰는 사람이 있고, 과거를 다시 사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후자예요. 과거를 다시 산다는 건 관계를 재설정한다는 얘기거든요. 이때 관계에는 나와의 관계도 포함되죠. 나르시시즘적인 관계가 아니고요. 다소 분열적인 관계에 가까운데요. 나를 타자로 두면서, 낯설게 바라보면서 관계하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나를 포개려는 읽기와 쓰기보다 분리해서 응시하려는 읽기와 쓰기인 것이죠. 그런 상태가 읽기와 쓰기에는 오히려 안정적인 것 같아요. 제게는 과거를 다시 사는 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것을 해보려고 노력하는 건데요. 과거를 새롭게 만들면서 점진적으로 뭔가 변하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요. 고통스럽기보다 그냥 제가 사는 방식이 된 것 같아요. 


『아무튼, 연필』도 연필과 여성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작업이었고요. 『짐승일기』도 아픈 몸과 나와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거였어요. 『술래 바꾸기』도 사물과 기억의 관계를 재설정한 것이죠. 새롭게 설정된 관계에서 창조되는 타자의 이야기를 쓰는 거거든요.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도 마찬가지예요. 책, 그리고 여성 작가와 나와의 관계를 재설정해 가면서 쓴 거예요. 결국 어떤 면에서는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과거를 정확하게 읽어내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걸까요? 

아니요. 과거에 대해 보통은 한 가지 기억을 가지고 있잖아요. 저는 과거의 가능성을 계속 넓히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기억을 갖고 오고, 또 다른 기억을 갖고 오는 거죠. 그것은 다시 사는 것이고요. 계속해서 나를 새삼스럽게 이해하거나 당시 타자였던 사람들을 다시 보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이제 그만해도 되겠다 싶을 때까지요. 


누구에게나 거듭 돌아가게 되는 과거가 있어요. 대학 때를 생각하면, 다들 첫 소설은 거의 그 얘기더라고요. 자꾸 돌아가는 과거, 다시 살고 싶은 과거. 그래서 그때는 이해를 못 해줬던 나, 혹은 타자와 관계를 재설정하는 것 같은데요. 이게 저한테는 훈련이기도 해요. 이상한 사람을 만나거나 이해하기 힘든 사람을 만났을 때 이것이 훈련되어 있으면 다르니까요. 굉장히 다양한 기억들이 생기고, 삶이 더 이상 일직선이 아니게 되거든요. 어쨌든 제가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는데 이해는 계속 해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불편과 불안을 견디는 책읽기 


조금 구체적으로, 이 책을 쓰면서 관계를 재설정하게 된 장면은 무엇이었을까요? 

내가 달라지면 관계는 다 달라지는 것 같아요. 만약 1년 뒤에 이 책을 다시 본다면 분명히 다시 쓰고 싶어질 텐데요. 그건 너무 당연한 일 같아요. 우리가 긴 시간 읽는 글들이 몇 개 있잖아요. 『딕테』도 그렇고 엘렌 식수의 글도 그렇죠. 이 텍스트들은 읽을 때마다 달라지거든요. 그것은 제가 달라지고, 저의 환경이나 제가 연결하고 있는 사람들이 달라지기 때문이에요. 실제로 달라진 걸 많이 느끼는데요. 예전에는 ‘여성적 글쓰기’라고 하면 엄청나게 설명을 해도 이해를 못 받는 경우가 많았어요. 이제는 사람들이 여전히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더라도 어떤 지향이 있는지는 알잖아요. 그 변화가 엄청나죠. 그래서 계속 주석을 달아가면서 읽고 써야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는 액체 같다고 생각했어요. 책이라는 사물은 딱딱한 고체이지만 이 안에 담고 있는 게 고정되지 않는 액체처럼 느껴지더라고요. 

너무 극찬이에요. 그것이 큰 바람이었어요. 책은 평면적인 공간이지만 그 안에서 다른 공간을 상상하도록 만들고, 계속 움직이게 하고 싶었어요. 그런 면에서 ‘마지네일리아’가 갖는 의미도 있는 것 같고요. 텍스트 밖으로 나갈 수 있고, 다시 들어올 수도 있는, 순환하는 공간이기를 바랐어요. 

 

어떤 글은 글에서 읽고 있는 책의 입구 같은데 어떤 글은 거기서 완전히 빠져나온 출구 같거든요. 작가님의 글을 읽는 것 자체로 독자도 읽기의 다양한 가능성을 상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진짜 그러셨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긴 시간 다양한 분들과 읽기, 쓰기를 해왔는데요. 놀랍게도 사람들은 자기 기억에, 몸에 새겨진 맥락으로 읽더라고요. 몸에는 어떤 시간을 지나오면서 우리도 모르게 갖게 되는 삶의 표식들이 있거든요. 사실 그 표식은 무의식적으로 들어오고, 어떤 매개를 통해서 그게 나한테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 역할을 크게 하는 게 책이죠. 때문에 책이나 책 속의 작가들이 표식을 찾도록 하는 지도가 되면 좋겠다, 그것이 다른 읽기와 쓰기로 나가게 하면 좋겠다 생각해요. 


취향을 위한 독서와 공부를 위한 독서의 차이 같아요. 적어도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하기 위해, 다른 곳에 나를 갖다 놓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한다면 엄청난 힘이 필요하거든요. 살아온 대로 살면 그 힘이 안 생기죠. 취향 너머로 가고, 안 읽던 것을 읽어야 힘이 생긴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 것을 보고, 읽는 데서 오는 만족감이 크죠. 한편으로는 그게 완전히 부서지는 경험도 정말 중요하잖아요. 

책을 읽는 목적이 저마다 다르겠죠. 저도 취미 독서를 해요. 그렇지만 나를 다른 곳으로 옮겨 놓기 위한 것이 독서의 목적이라면, 고민을 해야 하는 것 같아요. 더 찾아보게 하고, 이게 무슨 얘기인지 고민하게 하고, 연결해서 보게 하는 면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내가 확장될 수 있잖아요. 저는 그것을 ‘연쇄 독서’라고 얘기하는데요. 연쇄는 어떤 책을 읽다가 각주 같은 게 달려 있으면 각주에 소개된 책을 찾아 읽는 거예요. 이처럼 연쇄적으로 읽게 하는 독서가 너무 중요하죠. 이것 역시 관계를 맺게 하는 거니까요. 


오랜 기간, 세심하게 읽어야 하는 글은 주로 여성과 비남성이 썼을 확률이 높아요. 그런 책들일수록 시간적 여유와 에너지를 쓰지 않으면 잘 읽어내기 어렵거든요. 잘못하면 주류적 목소리를 계속 따라 가게 되죠. 그 안의 목소리들은 분열되어 있는데 말이에요. 생각해보면 제가 어렵게 읽은 책들은 대부분 그랬어요. 여성 혹은 비남성과 같은 비주류의 사람들의 분열된 목소리가 담겨 있으니까 익숙하지 않죠. 읽는 데 오래 걸리고요. 책장이 안 넘어가는 거예요. 이 언어에 익숙해지는 데 한참 걸리거든요. 독자 분들이 거기에 머물러서 불편과 불안을 견뎌내보시면 좋겠어요. 

 

뒤라스 효과’가 떠오르네요. 요약이 절대 안 되는 텍스트, 읽고도 설명할 수 없는 텍스트가 있어요. 

절대 요약이 안 돼요. 리스펙트로 경우도 인용이 너무 힘들다고 하잖아요. 우리 몸에서 팔을 하나 떼어낼 수 없듯이 어떤 책은 발췌가 안 되거든요. 발췌를 하면 그 리듬이 아니예요. 그런 글이 있는 것이죠. 

 


여백을 만들고, 초대하는 일 


대문자 언어, 남성적 언어로는 기록되지 않는 이야기를 해낸 여성 작가들, 그렇게 터져 나온 목소리를 ‘제대로’ 읽어내는 독자의 노력을 이야기했는데요. 작가님은 그쪽 세계로 독자를 안내하려는 마음이 크신 것 같아요. 

공식적으로 얘기해 본 적이 없었는데요. 제가 워크숍을 하고, 읽고 쓰기 수업을 계속하는 데에는 독자로서 지향점을 함께 하고 싶은 이유가 커요. 우스갯소리로 내 책을 읽어주실 독자를 만들고 있다는 표현하는데요.(웃음) 이런 책들은 익숙해지기 힘들지만 한 번 익숙해지면 못 빠져나와요. 다른 걸 못 읽거든요. 덕분에 지금 저에게는 함께 공부해온 분들이 제일 무서운 독자이기도 하죠. 워낙 훈련된 독자들이니까요. 저도 쓰는 데 타협을 절대로 못하게 되고요. 그런 의미에서 제게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읽느냐도 물론 중요하지만 누가 읽는가가 너무 중요한 것 같아요. 내 독자가 어떤 사람들이 되어 줄 것인가, 이것이 너무 중요하고요. 때문에 책을 많이 못 팔더라도 그분들이 읽어줬다는 것이 다음 책을 쓰게 할 힘이 돼요. 

 

"의미를 규정하는 과정을 의도적으로 멈추고 그 의미가 봉쇄되지 않도록 의미 형성 과정에 여백을 남겨두는 게 중요하다.(중략) 타자를 여백으로 초대하는 일, 상상하면 아름다운 일이다."(167쪽)라는 문장이 중요하게 읽히더라고요. 여성적 읽기와 여성적 쓰기의 태도를 생각하게 되는데요. 여기에 담긴 작가님의 생각이 궁금해요. 

이 문장은 저의 독자적인 생각이 아니고, 수많은 여성 작가들이 자신의 삶이나 쓰기로 보여준 태도를 제 방식대로 쓴 건데요. 이 태도가 제 삶에는 아주 중요해요. 보통 사람들은 안전 여부를 빨리 확정하길 바라죠. 관계든 일이든 그 외에 무엇이 됐든 불안 요소를 최대한 빨리 제거하려고 하잖아요. 특히 관계에서 애매한 관계를 놔두지 않는 것 같아요. ‘손절’이라는 표현을 쓰고요. 그건 자신의 불안도를 낮추려는 거거든요. 하지만 불안과 불편을 그 자체로 무언가를 초대하는 장소, 무언가를 창조하는 공간으로 상상해야 해요. 그 노력이 점점 필수적인 일이 되는 것 같아요. 이 역시 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고 『우울 : 공적 감정』을 쓴 앤 츠베트코비치, 『감정의 문화정치』의 사라 아메드 같은 작가들이 하는 얘기예요. 이것이 여성적 읽기, 여성적 쓰기와도 연결되는 것 같고요. 때문에 여백을 만들고, 초대하는 일을 계속 생각하는 거예요. 

 

단순히 어떤 책을 읽고 쓰는 것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세계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 같네요. 작가님께는 ‘살다’와 ‘읽다’가 같은 층위에 있다는 생각도 했는데요. 살아내는 과정에서의 읽기는 어떤 의미인가요? 

살기, 읽기, 쓰기가 저에게는 연결되어 있고요. 순환되는 실천이에요. 셋 다 관계의 수행이거든요. 관계란 내 몸과 시간과 기억을 쓰는 일이고요. 애를 쓰지 않고는 불가능해요. 그러니까 쓰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죠. 살기와 쓰기의 지향이 다르면 그 글에는 힘이 없을 거예요. 공허한 문장은 독자가 딱 보면 알잖아요. 그게 제일 무서운 것 같아요. 저도 쓰면서 하나마나 한 소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이걸 버려야 된다는 생각을 매번 하죠. 다섯 명만 알아봐도 돼, 하는 느낌으로요. 


관계 말씀을 드렸는데, 제가 생각하는 것이 이입이나 공감을 목적으로 하는 관계는 아닌 것 같아요. 오히려 차이와 변별을 위한 관계, ‘그럼에도’ 공존하는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 중요한 것 같고요. 때문에 관계를 매개해 주는 존재가 굉장히 중요해요. 많은 경우 그것은 책이고요. 그렇게 연결이 계속되는 것 같아요. 엘렌 식수의 타자를 창조하는 쓰기는 우리가 경험해 본 적 없는, 상상해 본 적 없는 차이들에 관한 것이기도 한데요. 사실 어떤 존재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상상하기 힘들어요. 근데 그걸 계속 상상하는 거죠. 타자를 창조하는 읽기와 쓰기, 살기는 다 연결돼요. 

 

엘렌 식수가 여러 번 인용돼요. 엘렌 식수는 작가님께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 텍스트인가요? 

처음 엘렌 식수의 『메두사의 웃음』을 번역본으로 읽은 게 1994년이었어요. 그때는 책이 없었고 헌책방에서 1992년에 출간된 ‘또하나의문화’라는 잡지에 수록된 것을 발견한 거였어요. 9호였는데 주제가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였거든요. 대담에 김혜순 선생님, 박완서 선생님, 조한혜정 선생님이 나왔던 그 책을 아직도 갖고 있어요. 잡지를 넘기는데요. 전문이 아니라 짧게 번역한 글을 싣는다면서 엘렌 식수의 글이 담겨 있더라고요. 일단 엄청난 충격이었어요. 몸이 먼저 반응을 한다고 할까요. 나쁜 짓 한 것처럼 두근두근 하는 거 있잖아요. 여성이 여성에 대해서 여성의 언어로 쓰라고 하는 문장을 읽는데 이교도의 무언가를 본 것처럼 떨렸던 기억이 있어요. 강렬한 이미지와 몸의 기억으로 있었죠. 후에 동문선 출판사에서 나와 제대로 읽었어요. 그즈음은 저도 어느 정도 읽어왔던 시기였고, 다른 여성 작가들이 레퍼런스로 있으니까 연결이 딱 되더라고요. 관계가 생기기 시작한 거죠. 


어쨌든 엘렌 식수가 나한테 어떤 존재인지 말하자면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에 대해 쓰는 엘렌 식수의 글을 보면 어떻게 한 여성 작가를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싶거든요. 그것은 죽음까지도 되살려내는 사랑이에요. 마찬가지로 제게는 엘렌 식수가 그런 사랑인 것 같아요.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작가고요. 그래서 테레사 학경 차와 그밖에 제가 오래도록 읽어온 여성 작가들에 대한 근원적 사랑을 품을 수 있게 한 작가예요. 

 

마지막 두 챕터를 『딕테』에 할애했어요. "기억과 시간의 허술한 결탁이 매번 우리를 다시 한 권의 책으로 돌려보낸다."(183쪽)는 문장으로 시작하는데요. 읽기, 다시 읽기, 다른 방향에서 읽기를 실천하시면서 『딕테』라는 작품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주거든요. 어쩌면 지금도 이 작품은 작가님께 새롭게 읽히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해요. 

『딕테』는 1998년에 처음 읽은 것 같은데요. 그때도 혼자 읽을 수 없는 작품이라는 걸 느꼈어요. 다행히 주변에 작가들이 있었으니까 문학의 자장 안에서 문학적으로 읽으려고 애를 썼죠. 소설 읽듯 말이에요. 그러다 새로운 자료와 다양한 관점이 들어오면서 계속해서 다르게 볼 수밖에 없었어요. 오랜 인연이 멀어지기도 하고, 가까워지기도 하고, 변질되기도 하잖아요. 저와 『딕테』가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떨 때는 그만 봐야지(웃음) 하다가도 꺼내요. 특히 제가 몸이 한참 아플 때 『딕테』를 머리맡에 두고 있었는데요. 또 느낌이 너무 달랐어요. 아픈 몸은 몸의 시차가 다르거든요. 전혀 다른 시간들이 몸에 흐르고 있다는 감각이 있었어요. 그런데 시차를 빼고는 『딕테』를 생각할 수 없잖아요.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딕테』 덕분에 다른 작품을 보는 방식도 달라졌고요. 『딕테』는 그 자체도 너무 훌륭하지만 그걸 한 번 읽고, 몸에 배이면 다른 작품도 비슷한 작용을 발생시켜요. 참 놀랍죠. 

 

독립 연구가로서, 여성적 글쓰기와 관련한 다양한 강의, 워크숍 등을 진행해오셨어요. 어떤 바람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계속해나가는 마음을 들려주세요.  

2018년에 국제일본문학연구회에서 다와다 요코를 초청해 대담한 자료를 보는데요. ‘반(半)타인’이라는 표현이 나오더라고요. 반타인이란 쉽게 말해 타인이지만 완전히 남은 아닌, 반쯤은 내가 있는 존재예요. 친밀감과 거리감이 공존하는 존재라고 할까요. 절반만 타인, 그러니까 경계에 있는 관계죠. 테레사 학경 차의 방식으로 말하면 ‘먼 친척’이고, 제 방식으로 하면 ‘책장 친족’인 거예요. 가족, 학교, 혹은 국가라는 제도적인 공동체가 있는데요. 이 공동체의 틈에 반타인이라는 존재가 형성하는 시공간이 존재하는 것 같고요. 반타인이자, 먼 친척이자, 책장 친족의 시공간이 제게는 너무 중요해요. 섞이고, 포개지고, 이질적인 것과 이웃하는 콜라주 같은 상태가요. 제가 여성적 쓰기/읽기를 전면에 내세워서 책장 친족들을 만나온 게 10년이 됐어요. 이들 덕분에 제가 어떤 언어의 방향을 가지고 살 수 있었던 것 같고요. 그들을 틈새 시공간에서 계속 만나도록 하게 싶은 마음이 커요. 여기 반타인들이 있다, 당신을 환대하는 틈이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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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 아메드> 저/<시우> 역

출판사 | 오월의봄

매두사의 웃음 / 출구

엘렌 식수 저/박혜영 역

출판사 | 동문선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

편집부

출판사 | 또하나의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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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선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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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기식

사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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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

본명은 애들린 버지니아 스티븐으로 1882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모더니즘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평생 정신 질환을 앓으면서도 다양한 소설 기법을 실험하여 현대문학에 이바지하는 한편 평화주의자, 페미니즘 비평가로 이름을 알렸다. 빅토리아 시대 소위 최고의 지성들이 모인 환경에서 자랐고, 주로 아버지에게 교육을 받았다. 비평가이자 사상가였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의 서재에서 책을 읽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오빠 토비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한 후 리턴 스트레이치, 레너드 울프, 클라이브 벨, 덩컨 그랜트, 존 메이너드 케인스 등과 교류하며 ‘블룸즈버리 그룹’을 결성하기도 했다. 이 그룹은 당시 다른 지식인들과 달리 여성들의 적극적인 예술 활동 참여, 동성애자들의 권리, 전쟁 반대 등 빅토리아시대의 관행과 가치관을 공공연히 거부하며 자유롭고 진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어머니의 사망 후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버지의 사망 이후 울프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평생에 걸쳐 수차례 정신 질환을 앓았다. 1905년부터 문예 비평을 썼고, 1907년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리먼트]에 서평을 싣기 시작하면서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파도』 등 20세기 수작으로 꼽히는 소설들과 『일반 독자』 같은 뛰어난 문예 평론, 서평 등을 발표하여 영국 모더니즘의 대표 작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소설가로서 울프는 내면 의식의 흐름을 정교하고 섬세한 필치로 그려 내면서 현대 사회의 불확실한 삶과 인간관계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1970년대 이후 「자기만의 방」과 「3기니」가 페미니즘 비평의 고전으로 재평가되면서 울프의 저작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졌고, 「자기만의 방」이 피력한 여성의 물적, 정신적 독립의 필요성과 고유한 경험의 가치는 우리 시대의 인식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버지니아 울프는 픽션과 논픽션을 아우르며 다작을 남긴 야심 있는 작가였다. 그녀의 픽션들은 플롯보다는 등장인물들의 내면에 더욱 초점을 맞춘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해 쓰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소설 『출항』, 『밤과 낮』, 『제이콥의 방』, 『댈러웨이 부인』, 『파도』,『현대소설론』 등과 페미니즘 비평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에세이 『자기만의 방』과 속편 『3기니』 등이 있다. 1927년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인 『등대로』를 발표하며 소설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고 『올랜도』, 『물결』, 『세월』 등을 계속해서 발표했다. 평화주의자로서 전쟁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쳐 왔던 울프는 1941년 독일의 영국 침공이 예상되는 가운데 정신 질환의 재발을 우려하여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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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츠베트코비치

텍사스대학교 오스틴 캠퍼스 여성학 및 젠더·섹슈얼리티 연구 교수로, 같은 대학 LGBTQ연구 프로그램의 초대 책임자였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오타와의 칼턴대학교 페미니즘 사회변혁 연구소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저서로 『복잡한 느낌들』(Mixed Feelings, 1992), 『느낌의 아카이브』(An Archive of Feelings, 2003)가 있다. 『학자와 페미니스트 온라인』의 “공적 감상들” 특집호와 『정치적 감정들』(Political Emotions, 2010)을 공동 편집했다. 『GLQ: 레즈비언과 게이 연구 저널』의 공동 편집자이기도 했다. 앤 츠베트코비치는 2000년대 초반 로런 벌랜트, 헤더 러브, 데버라 굴드 등과 함께 “퍼블릭 필링스” 프로젝트를 결성해 감정을 정치적 분석의 중요한 대상으로 삼은 연구와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흔히 개인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감정이 공적인 차원에서 형성되고 유통되고 작동한다는 점을 드러내고, 감정이 어떻게 사회적·정치적 삶과 연결되는지를 학술 연구와 예술, 정치 실천을 결합하는 실험적인 활동으로 탐구해왔다. 특히 이 책에서 츠베트코비치는 우울을 단순히 개인의 심리적 문제나 병리로 설명하는 기존의 의학적 접근에 의문을 제기하며, 부정적인 감정을 치료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현재의 사회구조를 분석하는 주요 단서이자 적극적으로 사유해야 할 키워드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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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모리슨

1931년 미국 오하이오 주의 작은 마을인 로레인에서 태어난 토니 모리슨은 미국 북부에서 자랐지만 유전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남부적 전통을 지난 가계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백인을 증오하는 조선소 용접공이었고 어머니는 인종 차별과 그 역차별까지 반대하는 사람이었다. 토니 모리슨은 인종 차별은 물론이고 미국 사회의 다양하고 극심한 차별이 없어지는 날이 올 거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컸다. 교육적이고 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라던 어린 모리슨은 인디언 태생의 발레리나 마리아 톨치프를 우상으로 여겼다. 1953년 흑인을 위해 설립된 하워드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1955년 코넬 대학교에서 문학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녀는 대학에서 버지니아 울프와 윌리엄 포크너를 연구했다. 시점 교차와 다중 화법, 현실과 비현실의 넘나듦, 전설과 이야기 등으로 특징되는 토니 모리슨의 작품 세계가 두 거장 소설가로부터 일정하게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 같은 작품이나 윌리엄 포크너의 『압살롬 압살롬』 같은 작품은 토니 모리슨 작품의 양대 축인 '여성'과 '인종'이라는 강렬한 소재의 원천이 된다. 코넬 대를 졸업 후 대학에서 강의하다가, 1965년부터 랜덤하우스 출판사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텍사스 서던 대학교에 이어 하워드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틈틈이 단편들을 발표했다. 백인 중심주의 문화와 그 이야기 방식에서 벗어나는 글쓰기를 한 그녀는, 특유의 복합적인 내러티브와 다중 화자(혹은 다층 시점) 방식을 통해 자기 목소리를 찾아내기 위한 흑인 소설가의 강렬한 자의식의 무기를 획득하였다. 우울증과 고립에 대한 자신의 치료법을 기술한 『가장 파란 눈』을 데뷔작으로 주목받았고, 모리슨의 이름이 점차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 이어 『술라』, 『솔로몬의 노래』 등을 발표하며 대중과 평단을 모두 사로잡았다. 그리고 1988년 출간한 『소중한 사람들 Beloved』로 퓰리처 상을, 1993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2006년까지 프린스턴 대학의 로버트 F. 고힌 기금교수로 있었다. 이후 루브르 박물관 강의를 하였고, 2008년 프린스턴 대학으로 돌아와 '이방인의 집'이라는 세미나를 이끌고 있다. 『가장 파란 눈』은 인종적인 증오심, 역사적 기억, 현란한 언어 구사에 이르기까지 이후 토니 모리슨 작품의 특징을 이루는 요소들이 모두 망라되어 있어 모리슨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평을 받는다. 『소중한 사람들 Beloved』은 그녀에게 미국 언론 최고의 권위인 퓰리처상을 안겨주었다. 한 여인이 자신의 딸이 노예가 되지 않도록 살해한 눈물겨운 얘기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은 정열적이고도 현란한 언어와 서정적인 감동의 힘으로 구성, 경험에서 나온 진실과 비전을 섬세하게 교직 하는데 성공하였다. 환상과 암시적인 시적 문체를 사용하고 신화를 풍부하게 짜 넣은 그녀의 작품은 힘이 있고 구성이 치밀하다. 1987년 출간한 대표작 『빌러비드』로 퓰리처상, 전미도서상, 로버트 F. 케네디 상 등을 수상했고, 1993년 흑인 여성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2006년 프린스턴대학교의 교수직에서 퇴임한 후 집필활동에 매진해 소설 『자비』 『고향』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 희곡 『데스데모나』를 출간했고, 잡지 [네이션]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또한 그녀는 작가이기 전에 세 명의 아이들을 키운 엄마로서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읽는 책은 그 아이들이 커서 어른이 될 때 올바른 가치관과 세계관에 영향을 미친다는 작가로서의 책임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로서 직접 체험한 감성을 바탕으로 동화책을 쓰고자 하였으며, 그 꿈을 아들인 슬레이드 모리슨과 함께 동화책을 쓰며 실현시켰다. 향년 88세로 2019년 8월 5일 별세했다. 1993년 미국 흑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여 전 세계인의 이목을 흑인 문학에 집중시킨 작가이자, 타임지 선정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25명' 중 하나로 꼽히는 작가로, 그녀는 작품속에서 흑인들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룬다. 이러한 소재를 정교한 문체와 서정적인 어구들로 아름답게 구현하여 감동을 이끌어낸다는 평을 받는다. 특히 정체성 회복에 많은 관심을 두어, 비난의 목소리를 담기 보다는 미국 흑인들의 뼈아픈, 그리고 잊혀진 역사를 작품의 틀로 삼고 이를 복원하고자 한다. 한 곡의 재즈음악을 듣는 듯한 유창한 서술, 그 속에서 배어 나오는 흑인들의 깊은 절망과 한숨이 촘촘히 박아놓은 토니 모리슨의 언어 속에는 그녀 한 사람이 아닌, 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저서로는 『가장 푸른 눈』, 『소중한 사람들(빌러브드)』, 『술라』, 『재즈』, 『솔로몬의 노래』, 『네모 상자 속의 아이들』, 『파라다이스』, 『얄미운 사람들에 관한 책』, 『누가 승자일까요?』, 『타르 베이비』, 『A Mercy』,『빌러비드』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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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 아메드

페미니즘 및 퀴어이론, 인종 연구의 교차점에서 활동하는 연구자. 이주, 차이, 정체성, 문화 등을 주제로 탐구하며, 생활세계와 제도문화에서 권력이 어떻게 확보되고 도전에 직면하게 되는지를 주로 연구한다. 2004년부터 골드스미스 런던대학교(Goldsmiths, University of London)에서 인종·문화연구 교수로 지냈으나, 2016년에 학내 성추행 사건에 대한 학교 당국의 처리에 항의하며 사임한 후, 독립 연구자의 길을 걷고 있다. “킬조이 선언”을 비롯해 제도권에 머물지 않는 실천적 활동가로도 유명하다. 페미니즘 분야의 독창적 연구에 수여하는 FWSA상(2011년)을 받았으며, LGBTQ 연구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LGBTQ 연구 센터인 CLAGS에서 수여하는 케슬러상(2017년)을 받았다. 스웨덴 말뫼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2019년)를 받았다. 오드리 로드(Audre Lorde), 글로리아 안잘두아(Gloria Anzaldua) 등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의 작업을 생명 줄 삼아 감정의 구조를 현상학적으로 탐색함으로써 권력의 작동 방식을 분석하는 연구물을 꾸준히 발표했으며, 영국인 어머니와 파키스탄인 아버지를 둔 배경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경험, 유색인 여성으로서의 경험이 녹아든 실천적 글쓰기의 모범을 보여 주고 있다. 『그때와 지금의 퀴어(Queer Then and Now)』『항의하라!(Complaint!)』『쓸모란 무엇인가?(What’s the Use?)』『퀴어 현상학(Queer Phenomenology)』등 책 다수를 집필했으며, 국내에 번역된 책으로는 『감정의 문화정치』『정동 이론』『행복의 약속』『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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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렌 식수

프랑스의 영문학 교수이자 작가, 극작가, 시인, 문학 평론가 겸 탈구조주의 철학자이자 페미니즘 사상가이다. 프랑스령 알제리 오랑에서 유대인 가정의 장녀로 태어나 프랑스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다. 제임스 조이스에 관한 박사논문을 준비하던 중에 자크 데리다와 자크 라캉을 만나 공동 작업을 했으며, 같은 알제리 출신 유대인 프랑스인인 데리다와는 탈구조주의 비평 및 분석 방법론을 함께 구상하며 평생에 걸쳐 교유하며 공동 집필 등을 이어나갔다. 1968년에 출간한 《제임스 조이스의 망명 또는 대리 예술》로 평단의 격찬을 받았고, 1969년에 출간한 《안으로》로 메디시스상을 수상했다. 프랑스 68혁명의 성과로 교육부 산하에 구성된 위원회의 의장을 맡아 파리 제8대학 설립을 주도했고, 이후 영문학부 초대 학과장을 맡으면서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학내에 여성학연구소를 설치했다. 1970년대 프랑스 페미니즘 흐름을 이끈 중심인물로서, 1975년에 현대 페미니즘의 중요 작품으로 평가받는 《메두사의 웃음》을 출간하여 기존의 남성 중심적 언어체계와 사고체계를 전복하는 이론적 틀이자 대항 담론으로서 ‘여성적 글쓰기’ 개념을 제시했다. 활발한 사회 참여 활동과 더불어 왕성한 창작 활동을 지속하여 시와 소설, 희곡, 문학이론, 예술비평 등 90여 권에 이르는 저서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