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네일리아(marginalia)란 “책의 여백에 남기는 표식, 주석, 메모, 삽화, 분류할 수 없는 반응의 흔적들을 총칭”(9쪽)합니다. 오랜 시간 가장자리에, 경계 바깥에 안간힘을 써서 기록을 남긴 작가들이 있었지요. 역사에, 주류 언어에 기록되지 못한 무수한 마지네일리아들. 그러니까 마지네일리아는 필연적으로 여성적 읽기와 쓰기의 장소입니다. “상호 관계적 읽기의 실천”(11쪽)이 벌어지는 현장입니다. 김지승 작가는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에 테레사 학경 차,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토니 모리슨, 다와다 요코 등을 불러오는데요. 이 유동하는 작가들의 여백에 그만의 마지네일리아를 적어 내려갑니다. 덕분에 독자 역시 여성적 읽기의 무한한 가능성을 상상하게 되죠. 자꾸만 길어지는 주석, 아무리 채워도 좁아지지 않는 여백. 그곳에서 힘껏 타자를 초대하는 김지승 작가와 함께 거주해보면 어떨까요. 몸을, 그리고 기억을 내어주는 방식으로.
독자가 작가를 낳는다고 생각해요
'친애하는 책장 친족들'을 호명하면서 책이 열려요. 이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들인지 듣고 싶습니다. 책을 쓰면서 상상한 독자의 얼굴이 있었을 것 같아요.
저는 독자를 상정하지 않고는 글을 쓰기 힘들어하는 사람 같아요. 구체적인 얼굴이나 분명한 어떤 존재를 떠올린다기보다, 약간 물 같은 건데요. 물은 잠정적으로, 잠깐 머무는 형태로 이름이 달라지잖아요. 계곡, 강, 호수, 바다. 이처럼 잠시 어딘가에 모여 있는 존재들을 상상하게 돼요. 같이 읽고 쓰던 동료들, 아름다움에 깃들어 있는 죄의식을 가르쳐 준 영화 작가들, 경계를 공유하는 기억이 사실은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걸 가르쳐준 지금은 안 보는 옛날 인연들, 생각하면 좀 고통스러운 인연까지도 다 친애하는 책장 친족이죠. 또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에 실린 어떤 작품을 오래 사랑한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그런 분들까지 생각했어요.
짐작보다 더 넓은 범위의 독자까지 나아가는 것 같아요.
첫 책이었다면 보다 좁았을 텐데요. 그동안 내온 책들을 통해 배웠어요. 생각보다 제가 모르는 곳에서 애정을 품고 계셨던 분들이 많더라고요. 사인회 같은 곳에 조용히 오셔서 말 걸어 주시는 분들을 많이 만나고 나니까 생각하는 범위가 조금 넓어졌어요. 사실 저는 제 책을 읽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를 상상해 본 적이 없어요. 『100세 수업』도 그렇고, 『아무튼, 연필』도 그렇고 읽는 동료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 못 했거든요. 지금은 그래도 그런 분들이 있다는 걸 아는 거예요.
만날 사람들이 조금은 더 있다는 걸 알게 된 뒤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와 같은 책을 출간했다는 것이 의미가 클 것 같아요.
어떤 여성 작가를 좋아한다는 말을 마음 놓고 못하던 시절이 있거든요. 되게 억압적이던 시절이 있었어요. 남성 작가들은 권위가 있으니까 그런 작가를 좋아한다고 얘기할 수 있지만 여성 작가는 그렇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이런 목록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너무 좋고, 감격스러워요. 심지어 목록이 아직 많이 남았어요. 그게 진짜 좋아요.
목록을 어떻게 구성하신 건가요? 다루고 싶은 작품이 아주 많았을 텐데요.
쓰고 싶었는데 뺀 작가가 많아요. 시몬 드 보부아르, 조르주 상드, 아니 에르노, 오드리 로드, 클로디아 랭킨, 예니 에르펜베크 같은 작가들이 그런데요. 워낙 메모가 있으니까 써보려고도 생각했지만 시간적으로나 여러 여건이 안 돼서 어쩔 수 없이 뺐어요. 어쨌든 이 책으로 끝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주로 남성 작가 위주로 교육 받았고요. 때문에 끝없이 나열할 수 있는 여성 작가가 이제는 있다는 점에 대한 이상한 감격스러움이 있어요. 제 책장의 비율이 달라지는 거잖아요. 예전에는 거의 남성이었다면 지금은 여성 섹션 많이 생겼고요. 그런 것들이 다 이 책을 쓰게 한 힘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과 같은 토양이 형성된 데에 앞서 계속 쓴 여성 작가가 있었고, 또 그 작가들을 열심히 읽은 독자들 있었던 덕분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그럼요, 그들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저는 독자가 작가를 낳는다고 생각해요. 작가 역시 작가이기 이전에 독자고요. 언제나 독자가 작가가 되거나 독자가 작가를 낳는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나를 분리해서 응시하는 읽기, 그리고 쓰기
글에 여백과 틈이 많습니다. 독자 또한 이 책을 통해 자신의 마지네일리아를 써 나가길 바란 마음이 읽혔는데요. 채워넣기와 비워내기 사이에서 고심하기도 하셨을 것 같아요. 쓰면서 했던 고민은 무엇이었나요?
쓰기 전에 고민이 진짜 많은 타입이에요. 쓸 때는 별 생각 안 하고요.(웃음) 쓰기 전에는 원고를 본 편집자님이 이것으로는 책을 만들 수 없다고 하시는 상상까지 하거든요. 최악의 상상을 한 뒤 쓰기 때문에 막상 쓸 때는 거의 다른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대신 쓰는 동안에는 확실히 몸의 기억이나 감각, 리듬에 집중하려고 무척 노력해요. 채워넣기와 비워내기도 사실은 리듬이잖아요. 왔다 갔다, 이것이 잘 이루어지는 일이죠. 저는 저의 여러 조건 탓에 이 세계의 틈에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요. 틈이나 사이 공간에 있는 존재들의 리듬이 있는 것 같아요. 그 리듬이 살아날 때 쓰기가 수월해져요. 그렇지만 일상을 살아야 하고, ‘정상성’을 흉내내야 하는 과제가 종종 주어지죠. 불시에 그런 과제가 끼어들어 이 리듬이 방해를 받으니까요. 쓸 때의 고민은 언제나 내외부적으로 들어오는 방해로부터 나를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 하는 것이에요.
틈의 공간에 있는 존재의 리듬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세요?
그냥 외로워지는 수밖에 없어요. 어떤 욕망은 놓아야 하는 거죠. 좋은 사람이고자 하는 욕망까지도요. 글을 쓰는 일은 때로는 엄청 나 자신만 생각해야 하는 일이기도 한 것 같아요. 안 그러면 리듬을 못 지키니까요. 제게는 책임져야 할 가족이 없으니까 그런데요. 그렇지 않은 여성들은 진짜 힘들죠. 쓰다가 밥을 차려야 하면 다 날아가 버리는 거잖아요. 타인을 항상 돌보아야 하는 여성들은 얼마나 힘들까, 많이 생각해요.
책에서 아주 다양한 글쓰기를 실천하고 계시잖아요. 『파도』를 다룬 글이 그 작품을 오마주한 글이고요. 『가장 파란 눈』을 다룬 글에서는 편지가 틈입하죠. 『내 식탁 위의 개』를 다룬 글에는 강의의 장면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요. 궁금했어요. 글을 쓰면서 작가님은 자유로웠을까? 하고요.
메모를 엄청 많이 하는 스타일이에요. 이유는 연필을 쓰기 위해서예요.(웃음) 진짜로 연필을 너무 쓰고 싶어서 메모를 하거든요. 연필을 쓴다는 것은 연필을 통해 종이의 질감을 느끼고, 연필이 종이와 마찰하면서 상실되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거기에 집중하는 것이 제게는 일종의 명상이죠. 기억이 깨어나는 시간이 되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면 불쑥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살았나 싶은 문장이 적힐 때가 있어요. 스스로도 놀라게 되는 문장이 적히고, 그렇게 글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아요. 말하자면 읽는 몸에서 쓰는 몸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죠. 별 생각 없이 메모할 때는 그저 읽는 사람인데요. 문득 딸깍, 하는 신호와 함께 어떤 문장이 나오면서 쓰는 사람으로 전환되는 느낌을 받아요. 그 순간 자유롭다는 느낌이 있어요.
하지만 쓰는 동안은 내내 억압과 싸워야 하잖아요. 때문에 찰나적으로 느꼈던 그 자유를 기억하려고 애써요. 결국 자유롭기 위해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잠깐 느꼈던 그 자유를 잊지 않기 위해서 쓰는 것 같고요. 그래서 저한테는 글을 쓴다는 것이 늘 그 자유를 최대한 붙잡으려는 노력 같아요. 너무 많은 억압이 들어오니까요.
"글을 쓰고 있다고 자각하는 즉시 찢어지는 몸"(84쪽)에 대한 말씀에서도 엿볼 수 있듯 특히 내가 포개지는 읽기와 쓰기에는 분명 곤란함이 있는 것 같아요.
미래를 향해 에너지를 쓰는 사람이 있고, 과거를 다시 사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후자예요. 과거를 다시 산다는 건 관계를 재설정한다는 얘기거든요. 이때 관계에는 나와의 관계도 포함되죠. 나르시시즘적인 관계가 아니고요. 다소 분열적인 관계에 가까운데요. 나를 타자로 두면서, 낯설게 바라보면서 관계하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나를 포개려는 읽기와 쓰기보다 분리해서 응시하려는 읽기와 쓰기인 것이죠. 그런 상태가 읽기와 쓰기에는 오히려 안정적인 것 같아요. 제게는 과거를 다시 사는 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것을 해보려고 노력하는 건데요. 과거를 새롭게 만들면서 점진적으로 뭔가 변하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요. 고통스럽기보다 그냥 제가 사는 방식이 된 것 같아요.
『아무튼, 연필』도 연필과 여성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작업이었고요. 『짐승일기』도 아픈 몸과 나와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거였어요. 『술래 바꾸기』도 사물과 기억의 관계를 재설정한 것이죠. 새롭게 설정된 관계에서 창조되는 타자의 이야기를 쓰는 거거든요.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도 마찬가지예요. 책, 그리고 여성 작가와 나와의 관계를 재설정해 가면서 쓴 거예요. 결국 어떤 면에서는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과거를 정확하게 읽어내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걸까요?
아니요. 과거에 대해 보통은 한 가지 기억을 가지고 있잖아요. 저는 과거의 가능성을 계속 넓히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기억을 갖고 오고, 또 다른 기억을 갖고 오는 거죠. 그것은 다시 사는 것이고요. 계속해서 나를 새삼스럽게 이해하거나 당시 타자였던 사람들을 다시 보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이제 그만해도 되겠다 싶을 때까지요.
누구에게나 거듭 돌아가게 되는 과거가 있어요. 대학 때를 생각하면, 다들 첫 소설은 거의 그 얘기더라고요. 자꾸 돌아가는 과거, 다시 살고 싶은 과거. 그래서 그때는 이해를 못 해줬던 나, 혹은 타자와 관계를 재설정하는 것 같은데요. 이게 저한테는 훈련이기도 해요. 이상한 사람을 만나거나 이해하기 힘든 사람을 만났을 때 이것이 훈련되어 있으면 다르니까요. 굉장히 다양한 기억들이 생기고, 삶이 더 이상 일직선이 아니게 되거든요. 어쨌든 제가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는데 이해는 계속 해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불편과 불안을 견디는 책읽기
조금 구체적으로, 이 책을 쓰면서 관계를 재설정하게 된 장면은 무엇이었을까요?
내가 달라지면 관계는 다 달라지는 것 같아요. 만약 1년 뒤에 이 책을 다시 본다면 분명히 다시 쓰고 싶어질 텐데요. 그건 너무 당연한 일 같아요. 우리가 긴 시간 읽는 글들이 몇 개 있잖아요. 『딕테』도 그렇고 엘렌 식수의 글도 그렇죠. 이 텍스트들은 읽을 때마다 달라지거든요. 그것은 제가 달라지고, 저의 환경이나 제가 연결하고 있는 사람들이 달라지기 때문이에요. 실제로 달라진 걸 많이 느끼는데요. 예전에는 ‘여성적 글쓰기’라고 하면 엄청나게 설명을 해도 이해를 못 받는 경우가 많았어요. 이제는 사람들이 여전히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더라도 어떤 지향이 있는지는 알잖아요. 그 변화가 엄청나죠. 그래서 계속 주석을 달아가면서 읽고 써야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는 액체 같다고 생각했어요. 책이라는 사물은 딱딱한 고체이지만 이 안에 담고 있는 게 고정되지 않는 액체처럼 느껴지더라고요.
너무 극찬이에요. 그것이 큰 바람이었어요. 책은 평면적인 공간이지만 그 안에서 다른 공간을 상상하도록 만들고, 계속 움직이게 하고 싶었어요. 그런 면에서 ‘마지네일리아’가 갖는 의미도 있는 것 같고요. 텍스트 밖으로 나갈 수 있고, 다시 들어올 수도 있는, 순환하는 공간이기를 바랐어요.
어떤 글은 글에서 읽고 있는 책의 입구 같은데 어떤 글은 거기서 완전히 빠져나온 출구 같거든요. 작가님의 글을 읽는 것 자체로 독자도 읽기의 다양한 가능성을 상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진짜 그러셨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긴 시간 다양한 분들과 읽기, 쓰기를 해왔는데요. 놀랍게도 사람들은 자기 기억에, 몸에 새겨진 맥락으로 읽더라고요. 몸에는 어떤 시간을 지나오면서 우리도 모르게 갖게 되는 삶의 표식들이 있거든요. 사실 그 표식은 무의식적으로 들어오고, 어떤 매개를 통해서 그게 나한테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 역할을 크게 하는 게 책이죠. 때문에 책이나 책 속의 작가들이 표식을 찾도록 하는 지도가 되면 좋겠다, 그것이 다른 읽기와 쓰기로 나가게 하면 좋겠다 생각해요.
취향을 위한 독서와 공부를 위한 독서의 차이 같아요. 적어도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하기 위해, 다른 곳에 나를 갖다 놓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한다면 엄청난 힘이 필요하거든요. 살아온 대로 살면 그 힘이 안 생기죠. 취향 너머로 가고, 안 읽던 것을 읽어야 힘이 생긴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 것을 보고, 읽는 데서 오는 만족감이 크죠. 한편으로는 그게 완전히 부서지는 경험도 정말 중요하잖아요.
책을 읽는 목적이 저마다 다르겠죠. 저도 취미 독서를 해요. 그렇지만 나를 다른 곳으로 옮겨 놓기 위한 것이 독서의 목적이라면, 고민을 해야 하는 것 같아요. 더 찾아보게 하고, 이게 무슨 얘기인지 고민하게 하고, 연결해서 보게 하는 면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내가 확장될 수 있잖아요. 저는 그것을 ‘연쇄 독서’라고 얘기하는데요. 연쇄는 어떤 책을 읽다가 각주 같은 게 달려 있으면 각주에 소개된 책을 찾아 읽는 거예요. 이처럼 연쇄적으로 읽게 하는 독서가 너무 중요하죠. 이것 역시 관계를 맺게 하는 거니까요.
오랜 기간, 세심하게 읽어야 하는 글은 주로 여성과 비남성이 썼을 확률이 높아요. 그런 책들일수록 시간적 여유와 에너지를 쓰지 않으면 잘 읽어내기 어렵거든요. 잘못하면 주류적 목소리를 계속 따라 가게 되죠. 그 안의 목소리들은 분열되어 있는데 말이에요. 생각해보면 제가 어렵게 읽은 책들은 대부분 그랬어요. 여성 혹은 비남성과 같은 비주류의 사람들의 분열된 목소리가 담겨 있으니까 익숙하지 않죠. 읽는 데 오래 걸리고요. 책장이 안 넘어가는 거예요. 이 언어에 익숙해지는 데 한참 걸리거든요. 독자 분들이 거기에 머물러서 불편과 불안을 견뎌내보시면 좋겠어요.
‘뒤라스 효과’가 떠오르네요. 요약이 절대 안 되는 텍스트, 읽고도 설명할 수 없는 텍스트가 있어요.
절대 요약이 안 돼요. 리스펙트로 경우도 인용이 너무 힘들다고 하잖아요. 우리 몸에서 팔을 하나 떼어낼 수 없듯이 어떤 책은 발췌가 안 되거든요. 발췌를 하면 그 리듬이 아니예요. 그런 글이 있는 것이죠.
여백을 만들고, 초대하는 일
대문자 언어, 남성적 언어로는 기록되지 않는 이야기를 해낸 여성 작가들, 그렇게 터져 나온 목소리를 ‘제대로’ 읽어내는 독자의 노력을 이야기했는데요. 작가님은 그쪽 세계로 독자를 안내하려는 마음이 크신 것 같아요.
공식적으로 얘기해 본 적이 없었는데요. 제가 워크숍을 하고, 읽고 쓰기 수업을 계속하는 데에는 독자로서 지향점을 함께 하고 싶은 이유가 커요. 우스갯소리로 내 책을 읽어주실 독자를 만들고 있다는 표현하는데요.(웃음) 이런 책들은 익숙해지기 힘들지만 한 번 익숙해지면 못 빠져나와요. 다른 걸 못 읽거든요. 덕분에 지금 저에게는 함께 공부해온 분들이 제일 무서운 독자이기도 하죠. 워낙 훈련된 독자들이니까요. 저도 쓰는 데 타협을 절대로 못하게 되고요. 그런 의미에서 제게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읽느냐도 물론 중요하지만 누가 읽는가가 너무 중요한 것 같아요. 내 독자가 어떤 사람들이 되어 줄 것인가, 이것이 너무 중요하고요. 때문에 책을 많이 못 팔더라도 그분들이 읽어줬다는 것이 다음 책을 쓰게 할 힘이 돼요.
"의미를 규정하는 과정을 의도적으로 멈추고 그 의미가 봉쇄되지 않도록 의미 형성 과정에 여백을 남겨두는 게 중요하다.(중략) 타자를 여백으로 초대하는 일, 상상하면 아름다운 일이다."(167쪽)라는 문장이 중요하게 읽히더라고요. 여성적 읽기와 여성적 쓰기의 태도를 생각하게 되는데요. 여기에 담긴 작가님의 생각이 궁금해요.
이 문장은 저의 독자적인 생각이 아니고, 수많은 여성 작가들이 자신의 삶이나 쓰기로 보여준 태도를 제 방식대로 쓴 건데요. 이 태도가 제 삶에는 아주 중요해요. 보통 사람들은 안전 여부를 빨리 확정하길 바라죠. 관계든 일이든 그 외에 무엇이 됐든 불안 요소를 최대한 빨리 제거하려고 하잖아요. 특히 관계에서 애매한 관계를 놔두지 않는 것 같아요. ‘손절’이라는 표현을 쓰고요. 그건 자신의 불안도를 낮추려는 거거든요. 하지만 불안과 불편을 그 자체로 무언가를 초대하는 장소, 무언가를 창조하는 공간으로 상상해야 해요. 그 노력이 점점 필수적인 일이 되는 것 같아요. 이 역시 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고 『우울 : 공적 감정』을 쓴 앤 츠베트코비치, 『감정의 문화정치』의 사라 아메드 같은 작가들이 하는 얘기예요. 이것이 여성적 읽기, 여성적 쓰기와도 연결되는 것 같고요. 때문에 여백을 만들고, 초대하는 일을 계속 생각하는 거예요.
단순히 어떤 책을 읽고 쓰는 것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세계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 같네요. 작가님께는 ‘살다’와 ‘읽다’가 같은 층위에 있다는 생각도 했는데요. 살아내는 과정에서의 읽기는 어떤 의미인가요?
살기, 읽기, 쓰기가 저에게는 연결되어 있고요. 순환되는 실천이에요. 셋 다 관계의 수행이거든요. 관계란 내 몸과 시간과 기억을 쓰는 일이고요. 애를 쓰지 않고는 불가능해요. 그러니까 쓰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죠. 살기와 쓰기의 지향이 다르면 그 글에는 힘이 없을 거예요. 공허한 문장은 독자가 딱 보면 알잖아요. 그게 제일 무서운 것 같아요. 저도 쓰면서 하나마나 한 소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이걸 버려야 된다는 생각을 매번 하죠. 다섯 명만 알아봐도 돼, 하는 느낌으로요.
관계 말씀을 드렸는데, 제가 생각하는 것이 이입이나 공감을 목적으로 하는 관계는 아닌 것 같아요. 오히려 차이와 변별을 위한 관계, ‘그럼에도’ 공존하는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 중요한 것 같고요. 때문에 관계를 매개해 주는 존재가 굉장히 중요해요. 많은 경우 그것은 책이고요. 그렇게 연결이 계속되는 것 같아요. 엘렌 식수의 타자를 창조하는 쓰기는 우리가 경험해 본 적 없는, 상상해 본 적 없는 차이들에 관한 것이기도 한데요. 사실 어떤 존재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상상하기 힘들어요. 근데 그걸 계속 상상하는 거죠. 타자를 창조하는 읽기와 쓰기, 살기는 다 연결돼요.
엘렌 식수가 여러 번 인용돼요. 엘렌 식수는 작가님께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 텍스트인가요?
처음 엘렌 식수의 『메두사의 웃음』을 번역본으로 읽은 게 1994년이었어요. 그때는 책이 없었고 헌책방에서 1992년에 출간된 ‘또하나의문화’라는 잡지에 수록된 것을 발견한 거였어요. 9호였는데 주제가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였거든요. 대담에 김혜순 선생님, 박완서 선생님, 조한혜정 선생님이 나왔던 그 책을 아직도 갖고 있어요. 잡지를 넘기는데요. 전문이 아니라 짧게 번역한 글을 싣는다면서 엘렌 식수의 글이 담겨 있더라고요. 일단 엄청난 충격이었어요. 몸이 먼저 반응을 한다고 할까요. 나쁜 짓 한 것처럼 두근두근 하는 거 있잖아요. 여성이 여성에 대해서 여성의 언어로 쓰라고 하는 문장을 읽는데 이교도의 무언가를 본 것처럼 떨렸던 기억이 있어요. 강렬한 이미지와 몸의 기억으로 있었죠. 후에 동문선 출판사에서 나와 제대로 읽었어요. 그즈음은 저도 어느 정도 읽어왔던 시기였고, 다른 여성 작가들이 레퍼런스로 있으니까 연결이 딱 되더라고요. 관계가 생기기 시작한 거죠.
어쨌든 엘렌 식수가 나한테 어떤 존재인지 말하자면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에 대해 쓰는 엘렌 식수의 글을 보면 어떻게 한 여성 작가를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싶거든요. 그것은 죽음까지도 되살려내는 사랑이에요. 마찬가지로 제게는 엘렌 식수가 그런 사랑인 것 같아요.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작가고요. 그래서 테레사 학경 차와 그밖에 제가 오래도록 읽어온 여성 작가들에 대한 근원적 사랑을 품을 수 있게 한 작가예요.
마지막 두 챕터를 『딕테』에 할애했어요. "기억과 시간의 허술한 결탁이 매번 우리를 다시 한 권의 책으로 돌려보낸다."(183쪽)는 문장으로 시작하는데요. 읽기, 다시 읽기, 다른 방향에서 읽기를 실천하시면서 『딕테』라는 작품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주거든요. 어쩌면 지금도 이 작품은 작가님께 새롭게 읽히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해요.
『딕테』는 1998년에 처음 읽은 것 같은데요. 그때도 혼자 읽을 수 없는 작품이라는 걸 느꼈어요. 다행히 주변에 작가들이 있었으니까 문학의 자장 안에서 문학적으로 읽으려고 애를 썼죠. 소설 읽듯 말이에요. 그러다 새로운 자료와 다양한 관점이 들어오면서 계속해서 다르게 볼 수밖에 없었어요. 오랜 인연이 멀어지기도 하고, 가까워지기도 하고, 변질되기도 하잖아요. 저와 『딕테』가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떨 때는 그만 봐야지(웃음) 하다가도 꺼내요. 특히 제가 몸이 한참 아플 때 『딕테』를 머리맡에 두고 있었는데요. 또 느낌이 너무 달랐어요. 아픈 몸은 몸의 시차가 다르거든요. 전혀 다른 시간들이 몸에 흐르고 있다는 감각이 있었어요. 그런데 시차를 빼고는 『딕테』를 생각할 수 없잖아요.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딕테』 덕분에 다른 작품을 보는 방식도 달라졌고요. 『딕테』는 그 자체도 너무 훌륭하지만 그걸 한 번 읽고, 몸에 배이면 다른 작품도 비슷한 작용을 발생시켜요. 참 놀랍죠.
독립 연구가로서, 여성적 글쓰기와 관련한 다양한 강의, 워크숍 등을 진행해오셨어요. 어떤 바람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계속해나가는 마음을 들려주세요.
2018년에 국제일본문학연구회에서 다와다 요코를 초청해 대담한 자료를 보는데요. ‘반(半)타인’이라는 표현이 나오더라고요. 반타인이란 쉽게 말해 타인이지만 완전히 남은 아닌, 반쯤은 내가 있는 존재예요. 친밀감과 거리감이 공존하는 존재라고 할까요. 절반만 타인, 그러니까 경계에 있는 관계죠. 테레사 학경 차의 방식으로 말하면 ‘먼 친척’이고, 제 방식으로 하면 ‘책장 친족’인 거예요. 가족, 학교, 혹은 국가라는 제도적인 공동체가 있는데요. 이 공동체의 틈에 반타인이라는 존재가 형성하는 시공간이 존재하는 것 같고요. 반타인이자, 먼 친척이자, 책장 친족의 시공간이 제게는 너무 중요해요. 섞이고, 포개지고, 이질적인 것과 이웃하는 콜라주 같은 상태가요. 제가 여성적 쓰기/읽기를 전면에 내세워서 책장 친족들을 만나온 게 10년이 됐어요. 이들 덕분에 제가 어떤 언어의 방향을 가지고 살 수 있었던 것 같고요. 그들을 틈새 시공간에서 계속 만나도록 하게 싶은 마음이 커요. 여기 반타인들이 있다, 당신을 환대하는 틈이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
출판사 | 마티
아무튼, 연필
출판사 | 제철소
100세 수업
출판사 | 윌북(willbook)
짐승일기
출판사 | 난다
술래 바꾸기
출판사 | 낮은산
파도
출판사 | 솔
가장 파란 눈
출판사 | 문학동네
내 식탁 위의 개
출판사 | 민음사
딕테
출판사 | 문학사상
우울 : 공적 감정
출판사 | 마티
감정의 문화정치
출판사 | 오월의봄
매두사의 웃음 / 출구
출판사 | 동문선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
출판사 | 또하나의문화

신연선
읽고 씁니다.

표기식
사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