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일 혜화역 액터스 스튜디오에서 백영옥 작가의 신작 에세이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북토크가 열렸다. 삭막한 의자가 나란히 자리한 장소가 아닌, 연극적 요소가 다분한 장소에서 열린 것이 특이점이었다. 이는 ‘보다 작가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연극적으로 보이기를’ 주최 측의 의도 하에 이뤄진 것이었다.
백영옥 작가는 빨강머리 앤과 키다리 아저씨를 좋아하며 유년기를 보냈다. 2006년 단편소설 『고양이 샨티』로 문학동네 신인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으며, 『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 『곧, 어른의 시간이 시작된다』, 『스타일』, 『다이어트의 여왕』,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모임』, 『애인의 애인에게』 등의 저서가 있다.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의 승승장구
허희 : 저는 힐링이라는 말과 위로라는 말이 좀 다르다고 생각하는데요. 힐링이라는 게 환자와 의사의 관계를 설정해 놓고 마치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고 처방을 내려주는 듯한 성격이라면, 위로라는 것은 동등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따뜻한 말을 함으로써 그 사람의 힘을 북돋워 주는 말이 아닌가 싶은데요. ‘생각지도 못했던 따뜻한 위로’라는 것에도 빨강머리 앤이라는 소녀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자는 취지도 담겨 있습니다.
최근 베스트셀러 3위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하는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을 두고, 백영옥 작가가 다양한 방송에 참여하는 것이 책 판매에 시너지 효과를 낸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나왔다.
백영옥 : <푸른 밤 종현입니다>라고, MBC에서 하는 샤이니 종현 씨와 같이 하는 라디오가 있어요. 늘 시작하기 전에 종현 씨가 근황을 물어봐줘요. 거의 6주 내내 ‘빨강머리 앤’ 이야기를 했어요. ‘제목 때문에 너무 고민이에요’로 시작해서(옷음). 그런 얘기를 하다보니까 간접 홍보는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종현 씨가 책을 들고 사진을 찍어 줬는데, 마케팅팀에서 무척이나 좋아하더라고요. 연예인분들이 책을 들고 찍어주는 게 엄청난 마케팅인 거예요. 소유진 씨 아시죠. 그분도 SNS에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책 사진을 올렸는데, 순식간에 좋아요 7천 개 정도가 되더라고요. 그 날 책 판매가 엄청 많이 됐대요.
연예인이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책 사진을 SNS에 올린 것이 책 판매에 영향을 주었다는 말에 이어 자연스럽게 일반인들도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책 사진을 올리는 것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백영옥 : 아마 앤과의 추억을 가진 사람들, 특히 30~40대 여자분들이 많아요. 어렸을 때 애니메이션을 봤던, 추억의 공동체잖아요. 그래서 책을 들고 찍은 사진이 많다고 생각해요.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의 프롤로그에 보면 당시 백영옥 작가의 힘들었던 시기에 대한 말이 나온다. 왜 유독 ‘빨강머리 앤’을 보고 감명을 받았는지에 대한 답이 이어졌다.
마음의 안전지대
백영옥 : 여러분은 앤이 한 말 중에 구체적으로 기억나는 거 있으세요? 앤은 말이 많고, 긍정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이미지만 있죠. 사실 앤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요. 저도 그랬거든요. 좋았던 기억만 있잖아요.
우리는 살면서 좋았던 기억을 잊고 살잖아요. 근데 빨강머리 앤을 보면 유년시절 굉장히 따뜻했던 기억이 떠올라요. 엄마는 사과를 깎고 있고, 사과 향기가 막 나고, 앤이 살았던 아름다운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도 떠오르고. 그런 게 각인된 거예요.
백영옥 작가는 어릴 적 빨강머리 앤을 떠올리며 좋았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다, 힘들었던 기억에 관해 이야기를 이어서 말했다.
백영옥 : 제가 회사에 사표를 냈어요. 사실은 너무 잘하고 싶었어요. 정말 이를 악물고 열심히 했는데, 너무 이를 악물어서 턱관절에 문제가 생길 정도였어요. 또 당시에 대출도 많았어요(웃음). 그때는 정말 침대에 누우면 몸이 눌어붙어 녹아서 거의 흐르는 것 같았어요. 힘들 때는 아무것도 하기 싫잖아요. 그래서 제가 쓴 방법이 뭐냐면, 제 안전지대로 피신하는 거예요. 가장 좋았던 기억으로.
사람이 엄마 자궁 안에 있을 때 웅크려 있잖아요. 저는 그게 일종의 자기 방어기제 같아요. 내가 정말 힘들면 몸을 웅크려서 힘을 모을 수 있는 시기가 필요하거든요. 그게 태아 자세 같은 건데. 저는 침대에 웅크려서 앤을 봤어요. 그게 제 마음의 안전지대였기 때문에. 그게 여러분에게 하나라도 있으면 좋겠어요. 저한테 안전지대는 앤이랑 글쓰기였거든요.
보는 것과 적는 것 차이의 깨달음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프롤로그에는 힘든 시절을 보내던 중 ‘빨강머리 앤’을 수없이 봤다는 문장이 나온다. 처음에는 보기만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앤의 대사를 적기 시작했다.
앤이 한 말을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앤이 한 말을 ‘듣기만 했을 때’와 ‘그녀에게 들은 말을 노트에 적었을 때’의 차이는 컸다. 그 차이만큼이 내겐 기적의 크기다『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9쪽)
듣는 것과 적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었기에 ‘그 차이만큼이 내겐 기적의 크기다’라고 하였을까. 백영옥 작가는 행사장에 모인 독자들에게 ‘보는 것’이 어떤 것 같냐는 의문을 제기한 뒤, 이야기를 진행했다.
백영옥 : 제가 한 달 전부터 강연 코치를 받았어요. 강연을 싫어하고 무서워해서(웃음). 그때 코치 선생님이 저보고 그러는 거예요. “선생님은 사람 얼굴을 하나도 안 보세요.” 그래서 제가, “아닌데요, 저 보는데요”이랬어요. 그랬더니 코치 선생님이, “아닌데요. 하나도 안 보십니다.” 이러시는 거예요. ‘아닌데. 나는 열심히 본 건데’ 생각이 들면서 조금 화가 났어요. 그런데 저는 아직도 그분이 저한테 하셨던 말이 기억이 나요.
“본다는 건 눈을 본다는 거예요. 선생님은 스쳐지나가요”라고 하시더라고요. 본다는 것은 눈을 본다는 거고. 눈을 본다는 것을 어떤 의미, 뭘 느끼는지를 읽는 거라고요. 피곤한지, 즐기는지. 그러면 이런 말이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 더우시죠? 그러면 우리 생수나 한 잔 마실까요? 에어컨이나 켤까요?’ 말하고 실제로 에어컨을 켜는 거예요. 본다는 거는 보고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마음을 읽고 말하고 행동하는 거예요.
백영옥 작가는 보는 것에 대한 깨달음을 ‘빨강머리 앤’에 대입하여 설명을 더하였다.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상황을 토로하며, 그에 더불어 빨강머리 앤을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보았다며 웃었다.
백영옥 : 앤은 말을 굉장히 많이 해요. 정말 따발총이에요. 근데 신기한 건 그 말이 다 들리는 거예요. 굉장히 지쳐있는 상황이었는데도요.
린다 아줌마가 ‘기대하는 사람은 실망도 큰 법이지’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어요. 거기에 앤이 반문하는 거예요. ‘오, 저는 실망하더라도 다시 한 번 기대하겠어요.’,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멋진 일이거든요’ 등. 저는 지금 뜻대로 안 돼서 지금 이 모양인데(웃음). 너무 화가 나는 말도 있고, 그래서 막 듣다가 적고 싶어진 거예요. 일단 끝까지 단 본 다음에 손으로 적기 시작했어요. 적으니까 그동안 안 들렸던 말이 너무나 많았어요. 책 몇 권 분량이 나와요. 다 쓰고 나서 ‘실망을 하더라도 다시 한 번 기대하겠어요’ 부분을 소리 내서 읽는데, 앤이 저를 막 응원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 실망하더라도 다시 한 번 기대해보자.’란 생각이 들었어요.
백영옥 작가가 다시 한 번 기대해보고자 한 것은 바로 ‘등단’이었다. 13년간 신춘문예의 문을 두드렸다 밝힌 백영옥 작가는 자신의 천재 끼를 몰라본다며 신문을 사절한 적이 있으며, 글자 크기를 15pt로 올려서 내기도 하고, 파란색 종이나 실크지에 인쇄해본 적도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많은 실패를 겪었지만,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은 이유로 ‘마음의 안전지대’를 꼽았다.
백영옥 : 제 마음의 안전지대가 2개가 있다고 말했잖아요. 글쓰기는 제 집 같은 곳이에요. 언젠가는 돌아갈 곳.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이걸 글로 써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괜찮아요, 견딜 수 있어요. 앞으로 글을 쓸 거니까. 거의 종교처럼 생각했어요.
다양한 직장을 다니면서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와도 열심히 글을 썼다고 했다. ‘키친 테이블 노블’인 셈이다. 한 문장을 쓰면 오타가 대여섯 개가 날 정도였지만, 계속 쓴 이유는 자신에게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라 말하며 당시 등단을 간절히 원했던 심정에 대해 말했다.
백영옥 : 매번 떨어지고, 직장도 그만두고. 그렇게 진짜 완벽히 번아웃이 된 상태에서, 앤이 실망하더라도 다시 한 번 해보라잖아요. 나의 앤이. 그래서 있는 힘을 다 내서 해 본 거예요. ‘그래, 다시 한 번 기대해보자’ 그래서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등단했어요. 어떤 분이 ‘빨강머리 앤’을 안 봤으면 소설가가 안 되지 않았을까요? 라고 하셨지만, 그건 아닐 거예요. 그때 안 됐더라도 저는 글 쓰는 걸 계속하고 있었을 거예요.
실패의 소중함
허희 평론가는 이성복 시인의 시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구절을 말하며, 살면서 많은 요철을 겪은 백영옥 작가의 고통은 나뭇잎을 진짜 푸르게 할 것 같다고 유쾌하게 말했다.
허희 : 그 정도로 뭔가, 한이 서린 듯한 고통이 결국 앤을 통해서 순화된 건데요. 그때의 고통이 지금의 작가님을 만든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백영옥 : 저는 성공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사실 사람은 실패에서 배우는 것 같아요. 온전한 배움은 실패에서 시작하는 거죠. 그니까 뭔가에 실패한다는 두려움을 좀 없애면, 조금 더 나답게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은 어떤 조직의 과장, 누군가의 아내 혹은 남편, 아버지, 딸, 아들 등 이런 자기 역할로 많이 산다. ‘나’로 산다는 게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사치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백영옥 : 킨포크 테이블의 모토가 이웃들과 나누는 소박한 식사예요. 이웃들과 나누는 소박한 식사, 결국 집밥이거든요. 그런데 집밥이라는 것 자체가 이제는 너무 호사스러운 일인 거예요. 우리가 소박하고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게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되게 사치스럽고 부자연스러울 수 있어요. 그런데 ‘나’로 사는 것도 역시 그렇다 느끼는 것 같아요.
우리는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지만 외로워지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24시간 연결을 원해요. 심지어 여행을 가서도 뭔가를 올려요. 사실은 일상에서 멀어지고 싶어서 공간을 이동한 것인데, 마치 짐을 이고 가는 것 같은 거예요(웃음).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고, 뭘 했을 때 행복하고, 뭘 했을 때 불행한지를 아는 게 너무 중요한 거거든요. 근데 이 사회 구조가 점점 더 모르게끔 구성되고 있어요.
SNS가 나를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SNS는 나를 펼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연기하는 것이에요. 그건 ‘나’가 아니에요. SNS를 많이 하면 허탈하고 공허한 느낌을 받을 수 있어요. 그건 바로 내가 아니라 ‘내가 되고 싶은 나’이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내가 보여주고 싶은 내가 아닌 숨기고 싶은 나는 그대로 있는 거예요. 그 공간에 있으면 오히려 나를 못 만나요.
그곳에서 떨어져 나와서 나랑 좀 깊이 있게 대화를 할 수 있는 대상이나 공간이, 안전지대가 필요해요. 그게 개를 키우는 일이든, 여행을 가는 일이든, 책을 읽는 일이든. 그게 굉장히 중요한 일 같아요.
이어서 백영옥 작가는 많은 실패를 경험한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며, 앤과 자신이 닮은 ‘대단한 능력’에 대해 말했다.
백영옥 : 앤이 가진 대단한 능력이 바로 실패하는 걸 덜 두려워하는 거예요. 두렵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덜 무서워해요. 사람은 생각보다 불행에 강해요. 도리어 그 일을 하기도 전에, 그 일이 실패할까 봐 두려워하는 게 더 커요.
후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한 일에 대한 후회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가 있어요. 사람은 되게 영리하고 방어기제가 있어서, 한 일에 대한 후회는 자기 합리화를 해요. 마치 ‘이건 내가 소설을 쓰기 위해서 겪은 거야’라는 식으로. 저는 해보고 하는 후회가 훨씬 건강하다고 생각해요. 하지 않아서 후회되는 일은, 회한의 형식으로 남아요. ‘그때 그랬어야 했는데’라면서. 저는 그런 후회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쓴 거예요.
나쁜 남자와의 사랑의 가치
백영옥 작가의 말을 들은 뒤, 허희 평론가는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을 읽으면서 사무엘 베케트의 <최악을 향해서>의 ‘계속 실패하라. 그렇지만 낮게 실패하라’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밝혔다. 백영옥 작가의 실패와 성찰이 자신에게 많이 와 닿았다 고백하며, 그 중 특히 연애에 관한 조언이 와 닿았다고 말했다.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의 4장 <더 잘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챕터에서는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은수가 상우에게 이별 통보를 하는 장면 더러, 허희 평론가는 백영옥 작가가 은수를 비판하던 말이 굉장히 통쾌했다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나쁜 사람과 종종 사랑에 빠지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거다’라고 쓴 이유에 관해 물었다.
백영옥 : 나한테 너무 잘 못 해줬던 사람이 기억에 나지 않으세요? 나쁜 놈(웃음). 화가 나는 게, 나쁘면서도 교훈까지 남기고 가요. 나쁜 사람과 사랑에 빠져보는 것이 권유 사항은 아니지만, 우리는 늘 그런 상황에 직면하기 때문에(웃음). 그런 사랑에 빠지는 게 왜 필요하냐면, 나한테 하면 안 되는 일을 알게 하기 때문이에요. <봄날은 간다>를 보면 상우가 은수의 차를 쫙 긁어버리거든요. 상우는 과연 그날 밤 잠을 잘 잤을까요? 저는 일단 나쁜 사람을 배제하고, 우리 마음을 생각해 보자는 거예요.
그런 사람이 주는 교훈은, 나의 한계를 체험하게 하는 일인 것 같아요. 나쁜 사람과의 연애만큼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해주는 것이 없어요. 그리고 더불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교훈은, 나한테 하면 안 되는 짓을 알게 된다는 거예요. 나를 너무 망가뜨리는 것은 좋은 연애가 아니잖아요. 정말 좋은 연애라고 한다면, 서로를 성장시키는 연애일 거예요.
우리가 처음부터 좋은 사람이랑만 있으면 좋은 사람의 소중함을 모르잖아요. 그니까 나쁜 사람은 좋은 사람의 소중한 가치를 알게 해주는 일종의 엑스트라 같은 역할이죠. 그리고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며, 내가 살아가면서 나 자신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짓을 깨닫게 해주는 사람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랑은 고결하고, 가치 있어요. 누군가 저한테 연애, 사랑한다고 하면 하지 말라는 말은 잘 안 해요. 우리는 자기 합리화할 수 있으니까(웃음) 그 연애가 실패했을 때 마음의 안전지대로 피신하고, 나를 좀 더 추스르면 돼요.
허희 : 제가 여기서 잠깐 드리고 싶은 말씀은, 나쁜 사람이란 것에도 어느 정도 허용 가능한 범위가 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빨강머리 앤’에서 가장 걱정되는 캐릭터가 바로 다이애나였습니다. 다이애나 꿈이 ‘나쁜 남자를 만나서 그 사람을 교화시키는 것’이잖아요.(웃음)
백영옥 : 맞아요(웃음)
백영옥 작가와 허희 평론가의 사근사근한 대화가 끝난 뒤, 북토크에 모인 독자들의 궁금증과 고민을 풀어주는 시간이 있었다.
출간된 지 오래된 빨강머리 앤이 2016년에 사는 우리에게도 울림을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앤이 헬조선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살아도 가능할까요?
백영옥 :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가능해요. 앤이 다이애나를 보면서 왜 그렇게 영원한 우정, 사랑을 맹세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앤은 너무나 친구가 갖고 싶었는데 친구가 없었어요, 거기다 여러 아이를 보살피기까지 했어요. 그 나잇대 어린아이가 또래 친구들과 얼마나 놀고 싶겠어요. 그래서 앤은 서재의 책장 유리창에 비친 자기 얼굴에게 캐시 모리스라고 이름을 붙이고 종일 얘기해요. 그러니까 앤은 좀 더 나은 걸 상상해내는 아이예요. 앤이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얘기할 때 우리는 그저 ‘상상력’이라고 생각하고 마는데 그건 그냥 상상력이 아니에요.
앤은 꿈에 그리던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에서 자신이 여자여서 쫓겨날 수 있단 걸 알게 돼요. 매튜가 원한 건 자신의 농사일을 도와줄 수 있는 남자아이였거든요. 그걸 알고 앤은 미친 듯이 울어요. 마릴라가 “그러지 말고 일단 저녁부터 먹어”라고 하는데, 앤이 “어떻게 이 순간 저한테 밥을 먹으라고 할 수 있어요!”라고 소리를 지르고 울면서 자요. 그런데 그다음 날 아침에 뭐라고 하냐면, “아침이 있단 건 참 좋은 일 같아요”라고 해요(웃음). 앤은 정말 을 중의 을이죠. 앤은 고아고, 사람들이 자신을 보살펴 주지 않으면 다시 고아원으로 가야해요. 근데 자기 마음에 되게 솔직해요. 그게 성격이기 이전에, 용기인 것 같아요.
앤이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가는데 이렇게 말해요. “저는 이 드라이브를 즐기기로 했어요. 즐기기로 작정을 하면 얼마든지 즐길 수 있어요” 앤이 얼마나 이런 상황들에 많이 처해 있었을까요, 그 어린 아이가. 앤은 그 나잇대 아이들이 겪기 힘든 일을 많이 겪었어요. 헬조선 저리가라예요(웃음). 근데도 앤은 더 나은 걸 상상해요. 그리고 상상해낸 것을 결국 행동해요. 그래서 결국 마릴라의 마음을 얻거든요. 그러니까 앤은 아마 헬조선에서 살았어도 아주 긍정적으로 살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빨강머리 앤에 가장 가슴에 남은 말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백영옥 :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띠지를 보면, ‘내일은, 아직 아무것도 실패하지 않은 하루라고 생각하면 기쁘지 않아요?’라는 문구가 있어요. 저는 이 말이 너무 위안이 돼요.
1장의 <아침이라는 리셋 버튼>은 이 대사에서 영감을 받고 쓴 거예요. 어쨌든 우리한테는 내일이 있잖아요. 자고 일어나면 다시 태양이 뜰 거고. 태양이 안 뜨지는 않을 거잖아요. 셔터를 내리는 것처럼, 하루의 맥락이 있어요. 그리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게 저를 안도하게 해요.
‘내일은, 아직 아무것도 실패하지 않은 하루라고 생각하면 기쁘지 않아요?’에서의 하루의 아침과 낮, 밤이 좋아요. 리셋 버튼처럼 하루가 다시 시작되는 기분이에요. 우리에게 그런 게 필요한 것 같아요. 차단되는 것, 셔터를 쫙 한 번 내려주는 것. 그래서 저는 산책할 때, 발레 할 때는 핸드폰을 보지 않아요. 머릿속에서 복잡한 생각을 안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그런 게 있죠, 바로 아침. 일단 자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 대사가 참 좋아요.
백영옥 작가의 말에 이어 허희 평론가도 자신의 좋아하는 대사에 대해 말했다.
허희 : 저는 매쉬 아저씨가 한 말을 좋아하는데요, 원래 앤이 처음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에 왔을 때, 마릴라가 쫓아내려고 하죠. 그때 마릴라가, “저 조그마한 여자애가 우리한테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라고 얘기합니다. 그때 그 과묵한 매쉬 아저씨가 딱 한 마디 합니다. “우리가 그 아이한텐 도움이 되겠지.” 전 이 말이 빨강머리 앤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예요.
책을 읽으면서 큰 위안을 받았는데요.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온 사람의 여유가 느껴져서 조금 불편한 것도 있습니다. 아직도 터널에 갇힌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뭐가 있을까요?
백영옥 : 책, 글이라는 것이 주는 엄청난 치유 효과가 있어요. 사실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들은 이미 그 사람한테 고통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저는 되게 많이 힘들어하시는 분들에게 그것이 가능하다면, 글로 적어 보라고 해요. 천천히. 가능하면 손으로. 내 몸을 그 펜 끝에 담아서 끌고 가보는 거예요. 글이 주는 엄청난 치유 효과가 있어요. 왜 그렇게 SNS에 뭔가를 쓰나요? 그렇게 쓰고 나면 뭔가 홀가분해지고, 기분이 좋아지고, 누군가 그 글을 읽고 있다고 생각하면 도파민이 올라가고. 글이라는 것이 주는 치유 효과가 분명히 있답니다.
제가 1월에 소설을 한 권 냈어요. 아무도 모르시죠?(웃음) 『애인의 애인에게』라는 소설을 썼는데, 무척 어두운 소설이에요. 헤어짐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제가 개인적으로 39살 때 굉장히 힘든 일을 겪었어요. 아까 제가 말했잖아요, 저한테는 안전지대가 있다고. 글쓰기로 돌아오는 것. 어떤 소설을 쓰기까지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어요. 내가 그걸 소설로 써낼 수 있으면 그 고통은 내게서 떠난 고통이에요.
제가 알고 있는 방법은 글쓰기이기 때문에 글쓰기를 권해드리지만, 꼭 글쓰기가 아니더라고 질문자분이 어떤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뭔가를 하나 써보면서 그 문장을 보고, 읽고, 쓰고, 말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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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백영옥 저 | arte(아르테)
소녀시절을 수놓는 마음들을 쉴 새 없이 나누었던 앤과의 추억, 그리고 인생의 가장 힘겨웠던 고비마다 뜻밖의 위안과 웃음과 눈물을 선물한 앤의 이야기들을 어른으로의 삶을 헤쳐가야 할, 일과 연애와 꿈의 좌절에 끊임없이 맞닥뜨려야 할 날들을 다독이는 격려의 말로 되살려냈다.
김서영(예스24 대학생 리포터)
책이 좋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많이 읽고 많이 쓰겠습니다.
ksy94628
2016.09.26
민재씨
2016.09.21
동글
2016.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