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30일 오후 4시 16분의 ‘304 낭독회’는 스무 번째다. 2014년 봄 세월호에 탑승한 수많은 생명을 절규하면서 떠나 보낸 후 매일 매일이 4월 16일이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모임이다. 참석자들은 광장에 둥글게 서서 자신의 목소리로 시를 읽고 문장을 읽는다. 문학이 무력한 시대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몇 줄의 시에 기대고 그 힘에 의지하여 아픔을 잊고 흔들리지 않는 연대의 마음을 잇는다. ‘304 낭독회’는 정박할 곳을 잃은 이주자처럼 이곳 저곳을 떠돌면서 공중에 참가자들의 목소리를 남기는 것으로 어김없이 4월 16일을 기억했다.
서경식 도쿄경제대학 교수가 쓴 『시의 힘』은 가파른 삶으로부터 떠밀리고 굴러 떨어질 때마다 시를 붙잡았던 한 사람과 그가 바라본 우리 역사에 대한 기록이다. 또한 격변기를 지나온 한 소년의 내밀한 성장의 비밀을 시를 단서로 삼아 풀어보는 책이기도 하다. 표지에는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이 문장은 작가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땅 끝까지 떠돌 수밖에 없는 나’의 갈증을 문학으로 달랬던 디아스포라(이산민)였다.
서경식 선생은 『나의 서양미술 순례』로 이미 전 세대에 걸친 애독자를 두고 있다. 그는 일본어가 모어인 한국인, 재일조선인으로서 자신의 삶에서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 시릴 정도로 투명하게 고백한다. 1951년생인 그와 그의 부모님이 살았던 지난 백 년 가량은 재난과 전쟁의 시대였다. 눈과 귀가 있다면 누구나 수많은 비참함을 목격해야 했고 통곡과 응시는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다른 얼굴로 계속 되는 중이다. 작가는 끊어진 줄의 끝에 나를 대신한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의 절망을 찬찬히 기록한다. 그 절망 곁에는 항상 시가 있었다. 책장을 넘기면서 그를 절벽에서 끌어올려준 시의 목록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에게도 익숙한 김수영, 윤동주, 이상화에 이어 김지하, 박노해, 최영미의 시가 나온다. 교토 마루타초의 헌책방에서 그가 발견했던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 ‘코코아 한 스푼’은 안중근을 불러내고, 루쉰을 찾고, 마침내 프리모 레비까지 탄성을 갖고 이어지면서 문학의 밧줄을 드리운다.
작가는 어린 시절 이른바 ‘문화적 소양’이 있는 아이들 사이에 홀로 던져져 있다는 불안감과 열등감을 떨치기 위해서 책을 끌어안고 지냈다. 작가의 어머니는 글을 몰랐다. 가정통신문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어머니의 문맹을 눈치로 알았던 어린 아들은 날마다 선생님에게 꾸지람을 들으면서도 그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두려워서 어머니에게 묻지 못한다. 그 소년은 고등학교 3학년 때 『8월』이라는 개인소장판 시집을 낸다. 책 안에 담긴 당시의 시를 읽어보면 조선인 청소년 박일호의 고뇌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러던 그가 ‘교육받은 아들’로 자라면서 어머니의 삶에 해석의 특권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지식이라는 권력을 지닌 인간이 배우지 못한 이들의 말을 문자화할 때’ 생기는 위험에 대해서 뒤늦게 반성한다. 어머니는 잘 배운 아들들의 옥중 면회를 다니면서도 끝내 몇 자 쓸 줄 모르는 사람으로 살았지만 “몽골인으로 태어나고 싶다. 좋잖여? 들판을 말 타고 달리니께.”라고 어떤 시보다 강렬한 문구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이 책에는 작가가 분열된 상태에서 경험하는 복수의 아이덴티티로부터 선택된 아이덴티티를 지닌 자유로운 인간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자신이 일본어로 ‘고향’을 쓴다는 것의 한계를 직시하면서 경계의 영역에 다만 ‘목격자’에 머물러 있지 않기 위한 탈출의 방법을 모색한다. 학급에서 울려 퍼지는 ‘박수와 환호에 동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소학교 시절, ‘우리나라’라는 말을 따라 읽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순간 독자인 우리도 함께 숨을 멈춘다. 작가는 어린 서경식이 그런 호흡 곤란의 시간에 읽었던 루쉰과 센다이 의학교에 다니던 학생 루쉰의 감정을 연결하고 나아가 폼페이의 소녀와 브루노 베텔하임을, 안네와 아우슈비츠를, 후쿠시마의 목소리들을 호명한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미군에게 빼앗긴 오키나와의 들판이 되고, 원전에 강탈당한 후쿠시마의 들이 되어 세계를 재구성한다. 작가가 책 안에서 직접 인용한 프리모 레비의 시는 1978년에 썼으나 마치 예견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2011년 3월 11일을 날카롭게 상징하고 있다.
지상의 유력자들이여. 새로운 독의 주인이여.
치명적인 천둥의, 은폐하고 방자한 관리인들이여.
하늘의 재앙만으로 충분하다.
손가락을 누르기 전에 멈추어 생각하는 것이 좋을 거야.
(『시의 힘』 108쪽. 프리모 레비의 시, ‘폼페이의 소녀’ 중에서)
작가는 “시인이란 어떤 경우에도 침묵해서는 안 되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위험지역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만들어진 위로의 진실’에 매달려 상상력을 거세당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그럴수록 피해의 진원지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호소한다. 증언자는 진실에 관한 상상력을 발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피해자가 가혹한 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먼저 증언에 나서야 한다. 그들의 증언은 ‘표상의 한계를 넘어서는’ 글들, 말하자면 한 편의 시여야 하고 독자는 이 시들을 읽으며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서서 피해자와 공감하고 연대하게 된다. 이것이 참극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시의 일, 시의 힘이다.
세월호 2주기였던 밤, 하염없이 퍼붓는 비가 눈물 같았던 그 날 새벽에는 일본 구마모토현에서 큰 지진이 있었다. 며칠 뒤 태평양 건너 에콰도르에서도 지진이 이어졌다. 불의 고리를 타고 이어지는 재난은 다시금 우리의 나약함을 깨닫게 만들었다. 이 곳도 마찬가지다. 세월호 바깥과 세월호 안은 점점 더 구분되지 않고 있으며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라는 것을 이제는 경험적으로 안다. 시는 그런 낙하하는 인간에게 드리워지는 질긴 밧줄이고 밖으로 끌어당기는 장력이다. 장력은 압축의 반대말이기도 하다. 가장 압축적인 언어로 된 시가 공포로부터 빠져 나오도록 장력을 전달하는 강력한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지난 시절에도 우리는 그랬다. 비명을 시로 노래하고 소리 죽인 흐느낌을 분명한 목소리로 엮으면서 하루, 한 달, 일 년을 견뎌왔다. 매달릴 수 있는 낱말을 찾는 일은 소중하다. 유난히 서늘한 늦봄에 가슴 속 심지를 단단하게 붙잡아주는 이 책이 고마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와 함께 있는 한 우리는 함께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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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힘서경식 저/서은혜 역 | 현암사
문학 에세이이자, ‘언어’에 관한 비평집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습득하기 시작하는 ‘말’과 학습을 통해 배우는 ‘글’이 어떻게 개인의 사상을 구축하는지, ‘모어’와 ‘모국어’의 틈새에 갇힌 디아스포라의 외로움은 이해받을 수 있는지, ‘시’와 ‘문학’이 주는 힘은 무엇이며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진지하게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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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아동문학평론가)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심리철학과 철학교육을 공부했다.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바람 속 바람」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한신대학교 등에서 아동문학을 강의하고, 창비 팟캐스트 ‘서천석의 아이와 나’에서 어린이책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 함께 쓴 책으로 『달려라, 그림책버스』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 등이 있고, 엮은 책으로는 『마해송 전집』, 옮긴 책으로는 그림책 『우리들의 비밀 놀이터』 『안녕, 낙하산!』이 있다.
jijiopop
2016.05.03
iuiu22
2016.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