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만 뽑으라면….
조지 벡시 ㅣ 을유문화사
축구가 전쟁이라면 야구는 일상이다. 야구는 근육보다 이야기로 이루어져있고, 이야기의 상당 부분이 농담이다. 미국이 저작권을 주장하고 있는 이 스포츠는 1839년 북군 장교 애브너 더블데이가 쿠퍼스타운 양복점 뒤편에서 구슬치기를 하다가 경기장 규격과 규칙, 이름까지 정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더블데이는 야구와 아무 관계가 없었다. 그저 갑자기 인기가 많아진 경기의 번듯한 창시자가 필요했고 우연히 낙점을 받았다. 그것도 그가 죽은 후의 일이었다.
뉴욕 양키스 팬이며 하버드 대학 교수이기도 한 스티븐 굴드는 진화생물학자답게 야구의 특징을 다양성과 연속성에서 찾는다. 이를 테면, 매사추세츠 게임은 베이스가 나무 말뚝이었고 100득점을 내야 승리했다. 뉴욕 게임에서 주자를 태그 해야 한다는 규칙과 공을 파울 라인 안으로 쳐넣어야 한다는 규칙이 생겼다. 보스턴 게임은 뜬 공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잡아야 아웃으로 인정했다. 이런 규칙 유전자들로 이루어진 것이 야구이며 여전히 변화하고 있다.
뉴욕 메츠 팬이며 스포츠 저널리스트인 조지 벡시가 쓴 『야구의 역사』는 구성이 가장 큰 장점이다. 사실 야구가 어쩌다 이런 경기가 됐는지 궁금증을 해결하는 데에는 300페이지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야구의 역사』는 저자 후기까지 271페이지이다. 또, 20개 장으로 나뉜 장은 키워드별로 나뉘어있다. 사실 200년이 한참 안 되는 스포츠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1800~1830년대 태동기’, ‘1830~1850년대 규칙의 시대’, 이런 식으로 정리하면 얼마나 따분하겠는가.
제1장부터 제20장까지 어느 정도 연도 순서로 배열했지만, 야구 팬이라면 꼭 그 사연을 들어둬야 하는 인물이나 사건을 중심으로 엮었다. 시카고 삭스의 도박 연루 사건을 다룬 ‘블랙삭스’, 초창기 캐스터들과 해설자들의 역할과 개성을 다룬 ‘라디오 시대’, 메이저리그에서도 80년 이상 악의 제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양키스를 다룬 ‘왜 양키스는 존재하는가’는 제목부터 흥미로운 주제들이다.
키워드나 사건, 인물을 중심으로 책을 구성했지만, 역사라는 제목에 걸맞게 놓치지 말아야 하는 흐름은 꼭 붙잡았다. 미국 야구의 인종 차별이 바로 그런 흐름 가운데 하나이다. 초창기 야구를 다루는 장에서도 백인 이외의 야구 선수들과 그들의 리그를 다뤘다. ‘니그로리그’, ‘재키 로빈슨’ 장에서는 본격적으로 들여다본다. ‘세계적인 스포츠로 발돋움한 야구’에서는 쿠바, 도미니카, 일본, 한국의 야구를 통해 미국 북동부에서 시작된 이 게임이 어떤 모습으로 세계인에게 받아들여졌는지 빠뜨리지 않았다.
야구는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스포츠일 것이다. 메이저리그의 경우 1년 동안 162경기를 치른다. 한국 프로야구 역시 2015년부터 정규 시즌만 144경기로 늘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430시간 정도이다. 만약 한 경기도 빠뜨리지 않고 다 본다면 깨어있는 시간의 7% 정도를 써야 한다. 바쁜 야구 팬들에게 챙겨볼 기사가 많은 4월에 추천하는 야구 책은 무척 까다롭게 골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야구와 관련된 책은 예상보다 무척 많다. 스카우팅 리포트를 포함한 안내서와 가이드, 야구를 소재로 한 소설이나 만화, 한국 프로야구나 미국 프로야구의 기록과 뒷이야기를 모음, 야구에 빗대어 다른 얘기를 하는 소설과 에세이, 팬심을 가득 담은 ‘우리 팀 성공 기원’까지 100종이 훌쩍 넘는다. 선수들이 전지 훈련을 하는 동안 이 책들 가운데 10권 정도를 사서 읽었다. 가능하다면 한국 프로야구를 다룬 책을 소개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뽑은 한 권은 『야구의 역사』이다.
메이저리그 팬들은 본래 선수들의 별명을 짓는 데에 열성적이었다고 한다. 하긴 한국 프로야구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이름을 알아보는 것이다. 베이브 루스, 칼 립켄 주니어는 문제 없다. 조지 시슬러, 아돌포 루케가 사람 이름인 건 알겠다. 하지만, 미니, 맥, 피 위 리즈, 쿨 파파 벨리 같은 건 이름인지도 헷갈린다. 번역자가 괄호 안에 가능한 한 많은 소개를 넣어뒀지만 여전히 앞 페이지로 돌아가게 된다. 몇 번 그러다 보면 괜찮다.
몇 장 읽으며 괜찮아지고 나면, 이 책의 미덕이 보일 것이다. 먼저 앞서 말한 것처럼 200년의 세월을 적당히 쪼갠 구성이 눈에 들어올 것이고, 슬쩍 웃음 짓게 하는 저자의 유머도 읽힐 것이다.
내야 수비 : 대부분의 내야수들은 똑바로 서서 각자의 베이스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말뚝처럼 자리를 지켰지만 몇몇 개척자들이 내야수들이 커버할 수 있는 지역이 생각보다 넓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점차 발을 떼기 시작했다. 시카고 출신의 잘생긴 선수 찰스 코미스키는 베이스를 벗어나 공을 잡아내어 내야수의 수비 영역을 넓힌 최초의 1루수로 기억되고 있다.
시카고 화이트삭스 도박 연루 사건 : 그들은 야구에서 내버린 자식들이다. 이 여덟 명의 선수들은 모두 채찍을 맞고 다시는 항구로 돌아올 수 없는 배에 실려 저 멀리 망망대해로 보내졌다. 오늘날까지도 1919년 시카고 화이트삭스 출신의 이 여덞 명의 영구 제명자들은 한때 자신들이 몸담았던 스포츠의 가장자리에 서서 안타깝게 서성이고 있을 뿐이다.
니그로리그 : 지금 생각하면 그토록 실력이 월등했던 선수들이 제대로 경력을 쌓지도 못하고 금전적 여유를 누리기는커녕 자신을 증명한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니그로리그 야구는 사첼 페이지가 타자를 냉랭하게 쏘아보며, 커다란 왼발을 공중으로 번쩍 들어올려 자신의 장기인, 윙윙대는 소리로 유명한 일명 ‘벌’ 투구를 전질 때만은 울적하지 않았다. 쿨 파파 벨리가 너무 빨리 2루까지 달려가다가 자기가 친 직선타구에 맞았다는 전설을 들을 때만은 잠시나마 박탈감도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다. 누가 아는가. 정말 그랬었는지도.
라디오 시대 : 전신 시스템이 오작동하기라도 하면 캐스터들은 창의력을 발휘해 중계가 원활하지 않은 이유들을 지어내야 했다. 홈플레이트에서 언쟁이 붙었다, 심각한 부상이 났다, 갑작스런 돌풍과 폭우가 몰아쳤다, 메뚜기 떼가 출몰했다 등등 이유는 가지가지였다. 어떻게 해서라도 경기 중단을 해명하고 방송 시간을 메워야 했기 때문이다.
이주하는 야구 : 서부를 제패한 6연발 권총 이름을 딴 휴스턴 콜트 포티파이브스는 첫 3년간은 낡아 빠진 야외 구장에서 질식할 것 같은 더위와 습기 그리고 텍사스 크기의 모기와 싸워가며 경기를 치렀다. 나는 뉴욕 메츠의 현명한 노장 외야수 리시 애슈번이 말라리아에 걸릴 수도 있는 환경에서, 저녁 무렵 더블헤더를 뛰기 위해 온몸에 벌레퇴치제를 바르는 요령을 보여주던 장면을 절대 잊지 못한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 새로 태어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는 미국의 데릭 지터, 도미니카 공화국의 데이빗 오티즈, 할아버지의 나라 이탈리아를 대표해서 나온 마이크 피아자, 일본 대표인 스즈키 이치로 같은 스타들이 나왔다. 놀랍게도 한국이 준결승전에서 미국을 꺾었고, 쿠바가 푸에르토리코의 산후안에서 열린 경기에서 푸에르토리코를 격파했다.
조지 벡시는 또 이렇게 썼다. “야구는 마치 일주일 내내 방송되는 재미있는 일일 연속극 가다. 바로 어젯밤 플라이 볼을 어이없이 놓쳤거나 잽싼 도루를 했거나 멋진 캐치를 보여주었던 선수들은 불과 몇 시간 전에 일어나 이벤트 때문에 그를 칭찬하거나 비방한 팬들 앞에 오늘 다시 선다.” 4월, 재미있는 일일 연속극이 다시 시작됐다.
더 읽는다면…
야구란 무엇인가
레너드 코페트 저/이종남 역 | 황금가지
가장 자주 인용되는 책, 한 권만 뽑으라고 할 때 가장 확실한 책. 이 책을 추천할 때 부담스러운 것은 단 한 가지, 613페이지에 이르는 부피뿐이다. 게다가 레너드 코펫과 이종남,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미국과 한국을 대표하는 스포츠 저널리스트들이 거듭 개정판을 내고 번역을 수정한 노력이 담겨있어서 더욱 듬직하다.
야구의 추억
김은식 저 | 이상media
인터넷에 연재했고 두 권으로 나눠서 펴냈던 야구의 추억 시리즈를 개정해서 한 권으로 다시 펴냈다. 한국 프로야구의 열전이고, 올드 팬들의 공감이다. 사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수는 없다. 누구든 한 명은 싫어하는 선수가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타이거즈 팬에게는 장호연이 그렇다. 하지만, 우리 선수라면, 야구 얘기를 읽다가 눈시울이 붉어지는 희한한 경험도 하게 된다.
머니볼
마이클 루이스 저/김찬별,노은아 역 | 비즈니스맵
이미 영화화된 걸 왜 읽느냐면, 이 책이 그냥 야구 관련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경제학자이며, 애슬레틱스의 기적적인 성공 비결을 캐내기 위해서라면 빌리 빈과 그 일당들이 어떤 계산을 했는지 끝까지 파고들 각오가 돼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이런 부분이다. "야구에 플라톤적 이데아를 적용하는 기술은 폴 디포디스타가 월스트리트 출신의 분석가들한테서 받은 선물 중 하나였다. 폴은 자신이 모방한 AVM 시스템의 정교한 분석력을 바탕으로 구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좀 더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분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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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주(서점 직원)
chyes@yes24.com
햇빛자르는아이
2016.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