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작품 속 이미지와 텍스트는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이미지와 텍스트의 연결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벨기에 출신 그림책 작가가 있다. 안 에르보. 1999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상을 받은 이후 그녀는 지금까지도 자신만의 철학을 오롯이 그림책에 담아내고 있다. 특히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이라는, 모호하고도 추상적인 개념을 시각적이며 시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탁월한 그림책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자신의 책이 긴 여행을 떠나 한국이라는 나라에 도착해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기쁘고 감동스럽다는, 안 에르보. 그녀와 『바람은 보이지 않아』에 관해 궁금했던 이야기들을 나눠 보았다.
현지 매체들과의 인터뷰에서 실제로 시각 장애인 소년이 당신에게 했던 질문에서 이 책이 시작되었다고 답한 걸 봤습니다. “바람은 무슨 색일까?” 이 질문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또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만들었나요?
시각 장애인 소년이 저에게 직접 물어본 건 아니었어요. 어느 날, 시각 장애인 아이들이 궁금해하는 질문들을 모아 놓은 리스트를 보다가 그 질문을 처음 만났죠. ‘만났다’는 표현은 정말 정확해요. “바람은 무슨 색일까?”는 아주 강력하고, 아주 아름답고, 아주 시적이었어요.
질문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들도 질문을 만난 순간만큼 중요했어요. 사실 그 질문에는 뚜렷한 답이 없으니까요. 어쩌면 단 하나의 답만이 있을 수도 있고요. 이 책에서 제가 할 수 있었던 가장 현실적인 대답은 책장을 넘길 때 이는, 진짜 바람을 느껴 보라는 것이었어요. 시각 장애가 있는 독자든 그렇지 않은 독자든 다른 사람이 그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지는 아무도 몰라요. 따라서 이 책은 누구나 평등한 입장에서 보기 시작할 수 있죠. 제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이 바로 이런 지점입니다. 바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어떻게 묘사해야 하는지,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하는지, 아무도 다른 이에게 교훈을 주거나 설명하지 않는 것 말이죠. 이 책은 하나의 질문 그 자체예요. 그 질문에는 대조적인 답들이 존재하죠. 결국 ‘뉘앙스’를 읽어야 하는 책이에요. 동시에 색에 대한 책이고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려고 할 때 무엇이 맞고,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현실적인 걸까요? 누구도 바람의 색을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 제기를 하고, 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세계관을 쌓을 수 있지요. “바람은 무슨 색일까?” 이 질문에는 도덕적인 잣대도 정답도 없습니다. 저 역시 이 책을 빌어 제가 원하는 답을 강요하지 않습니다.『바람은 보이지 않아』가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책, 바람을 묘사하는 것에 대해 두고두고 이야기하는 책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지요. 바람은 이토록 매력적이고, 우리를 늘 사로잡는 소재입니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전체적으로 굉장히 짜임새 있는 책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글과 그림뿐만 아니라 종이 위에 입혀진 다양한 텍스처까지,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세세하게 신경 써야 했을 것 같은데요.
이 책을 만들 때 제가 특히 신경 쓴 부분은 전체적인 구조를 잡는 것과 제작 방식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는 것이었어요. 이를 테면 이런 거죠. 실제 책장을 스르륵 넘겨 바람을 일으키려면 일단 책을 평평하게 만들어야 했어요. 또 너무 두꺼우면 책장을 넘기기 위해 책을 구부릴 수가 없으니 페이지 수를 적정하게 유지해야 했죠. 이를 위해 앞뒤로 대조적인 대답이 연결되도록 글을 써야 했어요. 가령 늙은 개의 대답을 보고 한 장 넘기면 늑대가 그와 대조되는 대답을 하는 방식으로요.
촉감 효과를 내기 위해 후가공에 대한 고민도 필요했죠. 구상하는 내내 정말 다양한 아이디어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어요. 하지만 재빨리 중요하지 않은 것은 덜어 내고, 상황을 명확하게 판단하고, 제대로 된 기능을 할 수 있는 것만 남기려고 했어요. 결과적으로는 이런 제약들이 제 이야기를 살찌웠지요.
이 책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모든 대답, 색, 모티브, 텍스처, 재료가 뒤섞여 있어요. 보색과 단색, 매트한 질감, 유광 처리되어 반짝이는 부분, 무늬, 거친 질감, 회화적인 부분과 그래픽적인 부분까지 다양한 요소가 한데 모여 종이 위에 펼쳐지며 감각, 향기, 맛, 소리, 색, 뉘앙스, 재료, 역광, 떨어지는 빗방울까지……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그리고 있지요.
이 책은 마치 하나의 건축물처럼 굉장히 구조적이고 계획적이지만, 신기하게도 이야기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모든 단계에서 크나큰 자유로움을 느꼈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을 완성하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겠군요. 긴 작업 시간 동안 어떤 점이 가장 어려웠나요?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은 “바람은 무슨 색일까?”라는 질문을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시작되었어요. 그 뒤로 몇 년의 준비 기간이 있었죠.
점점 그림책을 준비하는 기간이 길어져요. 하지만 일단 글을 쓰고, 종이에 레이아웃을 잡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모든 작업이 훨씬 빠르게 진행돼요. 몇 달 안에 다 끝나죠.
제가 경계하는 건, 책에 나 자신을 완전히 내던지는 거예요. 만약 제가 책에 완전히 빠져서 빠른 속도로 작업하려 한다면 그 책은 끝이에요. 가짜가 되어 버리죠. 따라서 때를 기다려야 해요. 모든 게 무르익도록 집중하고 막막한 과정을 견뎌야 해요.
한국의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당신이 커피포트나 의자같이 자기만의 애티튜드를 가진 물건을 좋아한다고 말한 내용을 봤습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아』에도 첫 장면의 소년의 집 테이블 위에 김이 폭폭 나는 커피포트와 의자를 그려 넣었던데, 혹시 이 책의 다른 부분에 그와 같은 사물이 더 숨어 있나요?
나무와 티티새, 오두막집, 신발, 조약돌 역시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에요. (책장을 넘기면서 한번 찾아보세요.) 그 속에 이야기가 담겨 있거든요.
때때로 이미지는 단어가 돼요. 단어가 이미지화되기도 하고요. 특히 제 작품 속 이미지와 텍스트는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제 딸(6살)은 이 책을 볼 때마다 산이 하는 대답이 맞다고 말합니다. 자기 생각도 산의 대답과 같다고요. 당신의 아들에게도 “바람은 무슨 색일까?” 하고 물어본 적이 있나요?
직접적인 대답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바람에 대해 아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아들은 바람이 불 때 숲이 바닷소리를 낸다고 하더군요. 전 이 주장이 마음에 들어요. 우리 가족은 도시가 아닌, 숲 언저리에 살아요. 그런데 가끔씩 아침에 길 위에서 조개껍데기를 발견할 때가 있어요. 아들과 전 도대체 그것이 어디에서 온 건지 궁금해하다가 결국 깨달아요. 바람이 불 때 숲이 바닷소리를 낸다는 사실을요.
황당한 질문일 수도 있을 듯한데, 책의 지문은 당신의 것인가요? 한국의 어떤 그림책 디자이너는 작가의 지문까지 소장할 수 있는 책이라며 좋아했거든요.
맞아요. 제 지문이죠. 전 그림을 그릴 때 제 손바닥, 손가락, 손톱을 자주 활용해요. 재료와 색, 움직임을 손으로 느낄 수 있거든요. 특히 이 책에서는 계획적으로 손을 사용했습니다. 독자들도 손을 사용해 이미지를 읽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하기 위해서였어요. 독자가 손가락 이미지를 눈으로 ‘읽을’ 때 ‘손가락’이라는 단어가 무의식적으로 독자의 머릿속에 들어가고, 머리는 서서히 독자의 손가락들을 깨우죠. 그리고 결국 독자는 손으로 책을 읽는 행위에 ‘동참’하게 되는 거예요. 난 이런 방식을 ‘글쓰기의 층’이라고 불러요. 이 방식에 명령이나 사용 설명서 따위는 필요 없죠.
그림을 불완전하게 그린 것도 독자들이 다른 방식으로 이 책을 읽고,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불편함을 느끼고, 자연스럽게 이미지나 촉감에 대해 궁금해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에요.
한국에서 당신은 ‘그림책 작가들이 사랑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신의 텍스트와 그림에서 많은 작가들이 영감을 얻기도 하고, 특히 당신의 창의적인 시도들을 높이 평가하죠. 일러스트레이터나 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 주고 싶나요?
한국에서 제가 그런 평가를 받는다니, 상상도 못 했어요. 정말 기쁘네요.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과 독자들에게 모두 고맙습니다.
작가나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먼저 할 일은 ‘읽기’예요. 텍스트와 이미지를 읽어야 하죠. 그리고 이야깃거리를 찾아내야 해요. 교훈이나 임무를 주는 내용은 반드시 피해야 해요. 그 대신 내면에 있는, 강력한 무언가를 이야기해 줘야 하죠. 형식은 상관없어요. 내면에 있는 이야기라고 해서 주관적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죠. 객관적이고, 보편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 이런 질문들을 던져 보세요. ‘책으로 바람의 색을 어떻게 표현하지?’ ‘책이 바람이 될 수 있을까?’ ‘왜 종이 위에, 종이와 함께, 종이를 통해 글을 쓰고 이야기를 해야 하지?’
또 즐기고, 노력하고, 써 보세요. 생각의 표면에만 머무는 것을 지양하세요. 책 속으로 돌아오세요. 세상을 관찰하세요.
혹시 지금, 작가로서 위축되어 있는 상태인가요? 당장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뾰족한 수는 없습니다. 막막하겠지만, 당신에게는 시간이 필요해요. 한 가지 효과적인 방법이 있긴 합니다. 바로 나무를 심는 거예요. 책과 나무는 하나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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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보이지 않아안 에르보 글그림/김벼리 역 | 한울림어린이
《바람은 보이지 않아》는 하나의 이야기로 흘러가는 그림책이지만, 한 장면 한 장면을 놓고 보면 마치 수준 높은 한 편의 전시회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보색을 활용한 강렬한 대비, 선과 여백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다양한 기법과 질감으로 그림을 감상하는 아이들의 눈길과 손길을 모두 사로잡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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