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이 일상이 되면서 새벽이 깊도록 잠들지 못할 때가 많았다. 부른 배 위로 잠이 내려오길 기다리면서 나는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를 공상 속에서 키웠다.
아기는 싸개 속에 누워 있다가 바닥을 기어 다니고 일어나서 걷고 뛰었다. 손가락을 빨다가 웃고 말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불렀다. 가방을 멘 채 유치원에 가고 친구들과 뛰어 놀았다. 흐뭇함과 신기함은 점점 찡함으로 변해갔다. 아이가 학교에 가면 나는 제일 늙은 엄마일까. 엄마 아빠가 나이가 많아서 아이는 부끄러울까. 속상할까. 사춘기에 접어들면 반항하겠지. 왜 낳았느냐고 묻거나 해준 게 뭐가 있느냐고 따질지도 모른다. 나에 대해 뭘 아느냐고 신경 쓰지 말라며 문을 쾅 닫고 잠가버릴지도 모르겠다. 어떤 여자를 좋아할까. 첫사랑을 하고 군대도 가겠지. 무슨 일을 하게 될까. 결혼하는 걸 볼 수 있을까. 상상은 걱정으로 바뀌고 그 속에서 나는 훌쩍 일흔 살 여든 살이 되었다. 늙은 엄마의 염려가 키를 높일 때마다 나는 어른들의 말을 떠올렸다. 걱정 마라. 다 자기 먹을 것 가지고 태어난다.
실제로 도서관에서 수업하고 있을 때 쉬는 시간에 어떤 분이 출산 준비물은 다 장만하셨죠? 하고 물었다. 나는 계획만 세워놓고 사러 가질 못해서 곧 준비해야죠, 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조심스럽게 우리 아기가 쓰던 물건이 이것저것 있는데 선생님 필요하시면 드릴게요, 했다. 소설 쓰는 J선배는 아기 띠와 모자, 손싸개, 턱받이, 양말 등등을 한 보따리 챙겨주셨고(나중에는 유모차도 주셨다. 고맙습니다!) 후배 S는 아기 신발과 옷에 수유복까지 보내주었다. 친구들과 선후배들이 먼 곳에서 달려와 늙은 임산부를 격하게 축하해주었다. 톡 튀어나온 배에 인자한 미소, 내가 선물 보따리를 들고 들어갈 때마다 옆 사람은 “산타클로스가 나타났다!” 하며 좋아했다.
많은 분들이 안부를 묻고 관심을 가져주시는 아이는 분명히 복이 많은 아이일 거라고 생각했다. 많이 사랑받는 만큼 베풀며 살아라. 나는 밤마다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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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미(소설가)
2007년 문학수첩 작가상을 받으며 등단. 같은 해 창비 장편소설상을 탔다. 장편소설 『판타스틱 개미지옥』 『쿨하게 한걸음』 『당신의 몬스터』를 썼고 소설집으로 『당분간 인간』이 있다. 에세이 『소울 푸드』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