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도둑맞은 책>을 보기 위해 대학로의 좁은 골목을 비집고 공연장을 찾아가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어떻게 단 두 명이 100분의 극을 끌어갈 수 있을까? 이렇다 할 장치 없이 오로지 두 배우가 스토리를 엮어가고, 미묘한 심리와 기묘한 반전을 끼워가며, 관객들의 심장을 쫄깃쫄깃, 극장 안의 공기를 쫀득쫀득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건 참 대단하지 않나요? 물론 탄탄한 극이 기본이 되겠지만 지면에 쓰인 활자를 3차원 공간에 끄집어내 관객과 호흡하는 것은 배우의 힘, 2인극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연기력을 입증 받은 셈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연극 <도둑맞은 책>에 참여하고 있는 김강현 씨도 10여 년의 조연 생활이 퍼즐을 맞추듯 이제야 큰 그림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하는데요. 영화 <연애의 온도>,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등 지금껏 수많은 연극과 영화, 드라마에 모습을 드러냈으나 ‘주연’이라는 수식어는 최근에야 달게 됐으니까요.
“주인공은 처음이라 욕심이 났어요. 연극 무대에서도 주로 비중이 낮은 역할을 많이 했거든요. 그래서 도전하고 싶었고 즐겁게 작업하고 있는데, 안 좋다는 말보다는 좋다는 말이 많이 들리니까 기분이 좋더라고요.”
유선동 감독의 시나리오를 변정주 연출이 무대에 올린 연극 <도둑맞은 책>이 대학로 동양예술극장 3관에서 공연되고 있습니다. 시상식에서 사라진 인기 시나리오 작가 서동윤과 그를 결박한 보조 작가 조영락이 중심인물인데요. 자신의 집필실처럼 꾸며진 지하실에서 서동윤이 해야 할 일은 글을 쓰는 일. ‘슬럼프에 빠진 작가가 살인을 한 후 작품을 훔쳐낸다’는 주제로 글을 써가며 무대는 시나리오와 실제 사건을 넘나듭니다. 2인극이 1인극보다 힘들다던데, 대사 분량도 많은 데다 김강현 씨는 조영락 역 외에도 주변 인물들까지 연기해야 하는 만큼 꽤 힘들 것 같습니다.
“가끔 대사를 까먹기도 하는데, 어떤 선배 말씀이 그런 것도 인간미라고 하시더라고요. 사람이 너무 완벽해도 차가워 보인다고. 그래서인지 적절하게 까먹거나 더듬는 건 실수인데도 좋게 봐주시더라고요. 상대가 대사를 까먹거나 넘길 때도 있는데, 극의 상황은 알고 있으니까 애드리브를 하는 거죠. 그런 게 재미인 것 같아요.”
마흔 언저리의 남자 배우만 네 분이네요(웃음). 게다가 음산한 스릴러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연습실 분위기는 어땠나요?
“완전 칙칙했죠. 그래도 다들 오래된 지인이라서 편하게 하고 있어요. 모두 바쁜 배우라서 끝나면 다른 공연가거나 연습하러 가요. 상대역인 이현철 배우와 둘이 술 마시러 가곤 하는데, 연습도 남자 여섯 명이 하는데, 술도 남자 둘이 마시러 가니까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죠. 다시는 남자끼리 하는 연극은 하지 말자(웃음)!”
지난해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부각되면서 TV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하시던데, 개인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나요?
“있기는 하죠. 알아보는 분도 계시고요. 그런데 사실 예전과 똑같아요. 여전히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다니는데도 잘 못 알아보세요. 좋아해주는 분들이 계셔서 감사하고 신기한 거죠. 예전에 연극할 때도 누가 재밌게 잘 봤다고 하시면 감사했는데, 이름까지 얘기해주시면 반가운 게 있죠.”
영화 <꿈보다 해몽>에서도 주연이었고, 이렇게 2인극에 참여하는 것들이 가장 큰 변화가 아닐까요?
“그렇죠. 저한테는 신기한 일이고, 좋은 사람들과 좋은 작품을 많이 할 수 있다는 게 변화죠. 그만큼 차근차근 연습하고 노력했던 가난한 청춘 시절이 지금의 신기함을 만들어준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극중 대사에 ‘목소리도 얇고 카리스마가 없어서 배우는 못하겠다’는 식의 대사가 나오던데 자전적인 애드리브인가요(웃음)?
“대본에 애드리브를 하라고 적혀 있었어요. 보조 작가지만 캐릭터가 좀 앵앵대고 바보 같아서 제 목소리와 그런 애드리브가 맞을 것 같아서 만들어 봤어요. 사실 배우를 하게 된 동기도 내성적인 성격을 고치고 싶어서 시작한 거예요. 여자 앞에서 말도 못하던 제 모습이 너무 한심했거든요. 남들 앞에 서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연극을 시작했고, 연기를 했더니 너무 어려워서 ‘연기 좀 하네’라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노력해 보자던 게 벌써 16년이 됐어요. 아직도 연기를 못한다는 얘기도 듣고, 목소리 때문에 연기가 안 된다는 소리도 듣고. 그런 콤플렉스를 이겨내고 장점으로 만들고 그러면서 지금까지 이어온 것 같아요.”
나를 이제야 알아보다니... 이런 생각은 안 드나요(웃음)? 과거에 콤플렉스라고 지적했던 것들을 요즘은 장점으로 언급하는 거잖아요.
“고마운 칭찬이죠. 그 또한 신기한 거고, 앞으로 더 노력해야 하는 계기가 됐고요. 언젠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잘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많은 극단이 있고, 드라마가 있는데, 계속 연기를 하고 있는 것 자체로 잘하는 것이라고요. 못하면 이미 떠났을 것이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잘하는 거다...”
연기생활 16년이라고 하셨는데, 여러 작품을 했지만 주목받지 못했을 때 어느 시점에서는 포기해야 하나 생각을 많이 했을 것 같아요. 나에게 연기란 무엇일까, 배우가 뭘까 고민을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요.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대학로를 떠나 천안에서 일을 한 적이 있어요. 작품을 같이 하자고 연락이 왔는데, 형편이 안 되는데 마음은 계속 서울에 가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일부러 살을 찌웠어요. 무대에 맞는 몸을 만들려면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혼자 술 마시고 외로운 시간을 보냈죠. 그런데 또 연기를 정말 하고 싶어서 다시 살을 빼기 시작했어요. 저는 연예인이 아니라 그냥 연기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영화든 드라마든 연극이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요.”
얼굴이 알려지고 이름이 알려지고 연기력도 인정받으면서 아무래도 예전보다 다양한 기회가 있을 테고, 생각도 많을 것 같은데요. 극중에서 작가에게는 동기가 중요하다고 하잖아요. 어쩌면 배우에게는 목표가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냥 오래하는 거예요. 남들한테 미움 안 받고 즐기면서 오래 했으면 좋겠고, 나이가 들면 후배들에게 존경받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 배우가 되고 싶어요. 이미 그런 배우들이 계시잖아요. 그런 좋은 모습을 배우면서, 좋은 쪽으로 변하는 배우가 되고 싶고요.”
기자는 극중 김강현 씨가 상대배우와 나란히 앉았던 무대 위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조명까지 받아서 마치 무대 위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는데요. 주연이란 이 조명이 항상 따라다니는 것이겠죠? 어떤 기분일까요? 하지만 김강현 씨는 조연일 때나 주연일 때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하네요. 하긴 맡은 역할의 차이가 있을 뿐, 그는 그저 연기를 하는 것이겠죠. 토요일 낮 공연을 끝내고 상대 배우와 술 마시러 간다는 걸 보니, 영락없는 연극쟁이고요. 김강현 씨만큼이나 묵묵히 무대를 지키고 있는 박호산, 이현철, 김철진 배우, 그리고 믿고 보게 되는 변정주 연출의 연극 <도둑맞은 책>은 4월 26일까지 동양예술극장 3관에서 공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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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
hanaru
2015.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