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표기식
김중혁 작가는 소설 쓰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책은, 스페이스타임 머신』에서는 소설과 에세이를 썼고 그림을 그렸으면 사진도 담았다. 여기에 북 커버 러버, 타임머신 보유자라는 직책도 더했다. 책 표지를 사모하는 마음을 한껏 드러낸 채널예스 연재글 ‘김중혁의 북 커버러버’를 바탕으로 소재와 주제, 형식이 서로 다른 글을 쓰며 자신의 과거와 기억 속에 스며들어 감각을 꺼내 왔다. 미래도 보고 환상의 세계와 멀티버스 공간에도 다녀왔다고 말한다. 마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같은 걸까? 소설가 김중혁이 등장하기도 닮은 사람이 등장하기도 하며 시공간을 종횡한다. 계절을 품은 사진과 에세이가 어느새 현실에 내려놓기도 한다. 이 책은 무엇일까, 우린 이 책을 통해 이미 타임머신을 대여했다.
활짝 열린 책의 출입구
책의 표지를 사랑한 나머지 직접 그린 "북 커버 에디션"입니다. 겉표지를 벗기면 작가님이 그리고 디자인한 속표지가 나오죠. 영문 페이퍼백이 떠올랐어요.
책을 만들 때 원하는 표지에 대해 의견을 얘기하는 편인데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언어 전달력이 떨어져 그림으로 설명할 때가 많아요. 진짜 대충 그려서 이런 느낌이면 좋겠다고 보내 드렸는데 출판사 대표님께 선뜻 표지를 하면 어떻겠냐 제안하셨어요. 저는 절대 안 된다, 전문가의 영역이다, 반대했고요. 그럼 속표지라도 하자고 하셔서.(웃음) 겉표지가 우주와 행성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걸 벗겼을 때 내밀한 우주가 더 있다는 뉘앙스가 생겨서 흡족했습니다.
첫 책의 표지를 직접 그린 운 좋은 작가이기도 하고요.(웃음)
제가 그림에 그렇게 막 자신감 넘치는 작가는 아닌데요.(웃음) 소설가로 데뷔를 하고 몇 년 동안 청탁이 거의 없었어요. 화려한 작가 생활이 펼쳐질 거라 생각했는데 별로 달라진 게 없길래 홈페이지를 만들었어요. 당시 그림 일기 같은 게 유행이라 진짜 대충 그림을 그려 웹툰을 연재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대기업 홍보 카툰 의뢰가 들어온 거예요. 그때 태블릿을 사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봤고 첫 책인 『펭귄뉴스』를 준비하면서 출판사에서 표지를 그려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은 거죠. 겁도 없이 뛰어들었는데 막상 엄청 힘들었어요. 마침 형이 그림을 그려 작업실이 있었거든요. 거기 들어앉아서 하루 종일 펭귄만 그렸어요. 한 600마리 그린 것 중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이 표지에 들어간 겁니다.
책을 대변하기도 이미지를 교란하기도 하는 것의 책 표지가 가진 매력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작가님의 취향이나 선호하는 표지의 기준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책 표지가 만들어진 이유가 책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였을 때도 있고 화려하고 장식적인 표지를 벗겨 포스터로 쓰던 때도 있어요. 저는 설명적인 표지는 좋아하지 않는데 어떤 사람들은 직관적이라고 좋아해요. 그래서 어떤 표지가 좋다 나쁘다고 할 수 없지만 개인적인 기준은 명확해요. 작가의 출사표 같은 느낌이었으면 좋겠다는 게 첫 번째이고요.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혹은 어떤 세계를 어떻게 그리고 싶어 하는지가 표지에 드러나는 게 좋아요.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디자이너와 작가가 어떤 식으로 교류하고 협업했는지 과정이 보이면 좋겠고요. 벤 마르코(Ben Marcus)가 『불타는 알파벳(The Flame Alphabet』의 표지를 정할 때 알파벳이 불에 타지만 않으면 상관없다, 모든 걸 디자이너에게 맡기겠다고 했는데 결국 표지에 불타는 알파벳이 나오거든요. 작가의 이야기와 디자이너의 이해 속에서 클리셰가 될 수도 있던 지점이 엄청 아름다운 결과물로 완성되었다는 이 예를 좋아합니다.
전자책도 애용하시나요? 마치 OTT에서 볼거리를 고르다 아무것도 고르지 못하고 섬네일만 본 사람처럼 표지만 보다 결정을 못 한 경험이 있거든요.
좋은 디바이스이고 플랫폼인 것 같아요. 결정적으로 폰트를 키울 수 있다는 것! 많은 분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이기도 하고요. 물성의 한계가 없다는 것도 중요해요. 곧 개발되지 않을까 주변에 항상 얘기하는 게 있는데요. 빈 페이지로 가득한 300페이지짜리 책이 하나 있어요. 흰 종이에 코드를 꽂으면 거기 인쇄가 되는 거예요. 기기 하나에 책을 갈아 끼우는 식의 기술이 곧 나올 거라고 봅니다.
사진 : 표기식
그러니까 책, 말하자면 책
목차를 보드 게임판처럼 디자인해 여러 장르를 보기 좋게 소개하는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어디서부터 읽어도 좋은 책이라는 점이 요즘처럼 병렬 독서가 각광받는 시대와 어울리기도 하고요.
에세이와 소설이 섞인 책이다 보니 독서의 출발 지점이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림을 직접 그려 한 장으로 정리했어요. 책을 시작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으려는 순간 압박감이 생기기도 하잖아요. 자기계발서나 경제 서적을 읽을 때 읽고 싶은 대목이나 관심 있고 필요한 부분을 찾아 읽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예전에 본 책인데 너무 좋아하는 책이면 생각이 잘 안 풀릴 때 아무 페이지나 넘겨 보기도 합니다.
방금 이 책을 재미있게 읽는 방법을 한 가지 고안해 냈는데요. 주사위를 굴린 다음 지시하는 칸의 챕터를 읽는 거예요. 똑같은 곳이 나오면 같은 글을 두 번, 세 번 읽을 수도 있고 너무 읽고 싶은데 안 걸리면 절대 못 읽는 거죠. 운이 좋아야 내가 읽고 싶은 부분을 읽을 수 있고 완벽하게 다 읽는 데 몇 년이 걸릴 수도 있게요.(웃음)
표지에 쓰여 있는 설명처럼 ‘소설과 에세이와 사진이 뒤엉켜 만든 신개념 혼합 우주’이지만 한 권의 책으로 모인 개체들의 공통점은 있을 거예요.
책이라는 게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책은 얼마나 우리에게 소중한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큰 맥락은 ‘북 커버 러버’라는 연재로부터 시작되다 보니 예전에 제가 썼던 책에 대한 글 그리고 책이라는 물성을 가지고 있는 물체에 대한 글 같은 것을 모으고 새로 쓰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책을 읽는다는 건 책을 쓴 작가의 과거로 가는 것이기도 하고 또 읽으면서 자기의 앞날 혹은 자기에게 일어날 일을 상상하고 예감하며 예견하는 일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어요. 저는 책을 읽는 순간 동시에 과거, 현재, 미래가 한꺼번에 확 펼쳐지는 게 좋아서 책을 쓰고 글을 읽어요. 독자분들에게도 이 재미를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한마디로 책에 바치는 연가이군요. ‘북 커버 러버’ 파트를 보면 폰트부터 띠지, 추천사 등 책을 이루는 여러 부분을 해부하듯 글로 다룹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책을 글로만 바라보지 않는 시선이 느껴지는데요.
책은 저에게 굉장히 큰 의미예요. 일단 밥벌이이기도 하지만 너무 사랑하는 물건이기도 하고. 또 그 안에 담겨 있는 텍스트가 품고 있는 엄청난 상상의 힘 같은 게 있잖아요. 정말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하자면 책한테 한 번은 경배를 바쳐야 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많이 했고요. 이 책의 내용이나 형태가 그 결과물입니다.
이런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을 만들 수 있는 작가는 드물죠. DJ, 잡지 기자 등 다양한 영역을 경험했습니다. 경험에서 얻은 것들이 창작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나요?
정말 행복한 삶이죠. 여러 관심사를 가지고 여러 일을 했는데 그 모든 것들이 책으로 귀결돼요. 예를 들어 커피에 빠지면 언젠가 책에 커피를 좋아하는 주인공을 등장시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러 경험을 하고 싶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그래서 책 자체가 중요한 도구이고요.
그런데 솔직히 얘기하면 최고의 예술은 음악이라고 생각해요.(웃음)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로 사람의 감정에 들어가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할 수 있잖아요. 저는 그게 너무 아름다운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에 비해 글은 좀 누추한 일 같아요. 한 남자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설명하기 위해 너무 많은 과정이 필요해요. 그러면서도 그로 인해 빚어지는 또 다른 상상의 이야기가 있어 계속 글을 쓰는 것이겠죠.
사진 : 표기식
시간과 공간의 교차점에서 만들어지는 것들
첫 픽션 「스페이스타임머신 워치」는 아주 적절한 인트로 같아요. 처음엔 작가님의 실제 이야기인 줄 알았거든요. 뜻밖의 이야기를 이어가겠다는 책의 ‘자기주장’이 읽혔습니다.
맞습니다. 그 글이 무조건 제일 앞에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예전에는 소설가가 주인공인 소설은 절대 안 썼거든요. 요새 그런 글쓰기에 관심이 생긴 것 같아요. 예전에는 소설과 저를 분리시키고 싶었어요. 보통 소설을 읽을 때 특히 주인공을 소설가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많잖아요. 약간 좀 불편했고 재미없게 느껴졌었는데 요즘에는 일종의 방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인 것처럼 시작하지만 뒤로 가서는 이상한 판타지가 되어 실제인가? 이상한 체험 이야기인가? 의심하게 만드는 글을 앞에 두고 싶었어요.
앞서 글을 쓰고 읽는 행위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공간을 오가는 흔적과도 같다고 얘기했습니다. 글을 쓸 때 그 개념을 어떻게 적용하는지 궁금해지네요.
소설을 쓸 때 제일 중요한 건 시간과 공간이에요. 언제 일어난 일이고 언제부터 언제까지의 일인지, 어디에서 벌어지는 일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쓰니 경험했던 모든 시간들을 생각하고 다녀왔던 모든 공간을 떠올려보거든요. 본인의 시공간을 통째로 돌아보고 거기서 이야기를 뽑아내는 것이 저한테는 스페이스타임 머신 타고 왔다 갔다 하는 일처럼 느껴졌어요. 책을 읽는다는 게 곧 우주를 경험하는 일 같다는 생각도 포함시키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픽션과 에세이를 동시에 읽으면서 다른 장르이지만 둘 사이의 공통점이 느껴져 흥미로웠습니다.
이 책은 어떤 면에서 제가 쓴 책 중에 가장 사적인 책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에세이에 사적인 이야기를 쓰기도 했지만 짧은 판타지 픽션에서도 글 쓰는 방식이나 글에 대한 생각 같은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그대로 들어가 있거든요. 이전에 글쓰기 책이나 음악에 관련된 책들은 뭔가를 전달하고 싶어 쓴 거라면 이번에는 가장 솔직한 나의 이야기를 썼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네요.
사진 : 표기식
봄의 삽, 여름의 모자, 가을의 고등어, 겨울의 코트까지 계절 시리즈 에세이가 책의 한가운데 자리해요. 마치 책갈피처럼 중요한 대목을 짚는 인상을 받았어요.
최근에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를 재미있게 봤어요. 두 주인공의 아주 긴 이야기를 임상춘 작가님이 계절로 나눠 놨어요. 처음에는 왜 그렇게 나눴을까 했는데 나중에는 이해가 가더라고요. 과거와 현재, 미래가 있어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게 역사라고 한다면 개인의 삶은 선형으로 느껴지지 않고 계절로 느껴지는 것 같아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반복되면서 그때의 봄과 지금의 봄으로 계절에 맺힌 기억들이 떠오르니 굉장히 중요하게 느껴지더라고요. 특히 우리나라에는 사계절이 있어 뚜렷하게 느껴지는 시간의 흐름이 있잖아요. 책을 만들 때는 깊이 고려하지 않았는데 요즘 에세이 파트를 보면서 든 생각이에요.
틈틈이 들어간 사진들은 어떻게 선별되었나요? 어떨 때 촬영 버튼을 누르는지.
새로워 보이거나 무언가 돌출되어 보일 때 사진을 찍어요. 처음에는 책에 사진 싣는 걸 저어했던 이유가 저는 사진을 예술이나 아름다움의 영역이 아니라 순간 포착과 아카이빙의 영역으로 보기 때문이에요. 보관해 놓아야 할 순간인 것 같을 때 구도와 색감, 조명 등을 생각 안 하고 마구 찍어서 양도 엄청나고요. 편집부에서 작가의 시선은 또 다르다고 용기를 주셨어요. 그렇다면 작가의 시선은 어떤 식으로 사물이나 풍경을 보고 사진으로 담는가를 보여주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었어요.
『책은, 스페이스타임 머신』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책을 남겼습니다. 다음에는 어떤 새로움을 기대하면 좋을까요?
여행기를 완전 다른 방식으로 써보고 싶기도 해요. 여행을 좋아하진 않는데 여행기는 참 좋아해요.(웃음) 이번 책이 평생 한 번은 이런 걸 써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한 것처럼 여행기도 때가 있을 거예요. 빌 브라이슨처럼 막 시끌벅적한 여행기가 될 수도 있고 사진만 담을 수도 체험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박의령
여러 패션 매거진의 피처 디렉터로 일하다 지금은 자유롭게 글을 쓴다.

표기식
사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