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사람의 마음은 해독 불가능한 언어
시라노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가진 근위대장이다. 얼굴만 빼면 그는 명백히 ‘잘난 남자’이다. 그러나 언제나 사랑을 시작할 때 우리가 처음 보는 것은, 바로 그 얼굴이다. 남들보다 몇 배 더 커다랗고 기형적인 코를 가지고 태어난 것은 절대로 그의 잘못이 아니다. 그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시라노는 자기 코를 비웃거나 놀리는 이들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인정사정없이 모두 처단해 버린다. 지독한 콤플렉스의 소산이라고 할 밖에 그의 행동을 설명할 다른 도리가 없다. 이런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면 어떻게 될까?
2014.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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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카톡 친구였어요.”
얼마 전 만난 여대생 J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그 사람 얼굴을 모르지만, 그쪽에서는 저를 알고 있었대요. 지난 학기에 교양 수업을 같이 들었다고.”
내가 J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객관적으로 뛰어난 미인이었다. 또한 차갑거나 도도한 이미지가 아니라 부드럽고 착한 느낌을 주는 얼굴이라서, 길 가던 남자들이 이상형을 발견했다며 다가오는 것은 그다지 별스러운 상황도 아닐 것 같았다.
“종강하는 날, 낯선 번호로 카톡이 와 있었어요. 한 학기 내내 뒷자리에 앉은 남학생이라는데 제 기억 속엔 그 사람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지요. 담담하게 방학 잘 보내라는 내용이었어요.”
이 역시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미인에겐 흔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 뒤 일주일에 한 번, 두 번 카톡으로 얘기를 나눴어요. 친구들은 이상한 남자라고 했는데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냥 담담하고 소소하게 챙겨주는 사이? 둘 다 책 읽기를 좋아해서 읽고 있는 책 얘기도 하고 영화 얘기도 하고, 그냥 평범한 일과나 그때의 기분 같은 걸 짧게 나누기도 했고요.”
그는 담백하고 재미있는 사람 같았다고 했다.
“저도 처음에는, 뻔하지, 한 번 만나자고 하겠지 싶었는데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됐어요.”
이야기는 이제 이렇게 이어져야 마땅했다. 그 뒤로 그들은 만났고 남자 쪽에서 적극적으로 구애를 해왔고 J는 그의 진심에 감동해 사귀기로 했고 이제는 행복하게 만나고 있다는 것. 그것이 이런 종류의 서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낭만적인 동화의 결말이었다. 그런데 J가 들려둔 이야기에는 반전이 내장되어 있었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렀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카톡이 딱 끊긴 거예요. 대답도 없었어요. 저를 차단한 거지요. 알고 보니 군대에 가버렸대요. 저한테는 알리지도 않고서.”
그 남학생이 왜 J를 친구목록에서 차단하고, 또 알리지 않고 입대를 해버렸을까 추론하는 것은 부질없다.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단순하고 쉽게 읽어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제삼자가 아무리 궁금해해도 그는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렵사리 알아낸 그의 친구를 통해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그가 J에 비해 자신이 너무 초라하다고 생각했다는 것, J와 얼굴을 대하고 만나는 일을 몹시 두려워했다는 것.
나는 계속 어떻게, 사람을 만나보지도 않고 이럴 수 있느냐는 말만 반복하는 J에게 들려줄 말이 없었다. 그녀에게 혹시 시라노를 아느냐고는 묻지 못했다. 코가 커서 슬픈 남자. 17세기 프랑스의 기사(騎士)이자 시인, 그리고 검투사. 희곡 작가 에드몽 로스탕이 창조한 그의 이야기는 이미 여러 차례 영화와 연극으로 각색되었다. 프랑스 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에게 제43회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영화 <시라노>(원제 Cyrano de Bergerac, 1990)는 프랑스 혁명 200주년(1989)을 기념해 만든 대작이다.
시라노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가진 근위대장이다. 얼굴만 빼면 그는 명백히 ‘잘난 남자’이다. 그러나 언제나 사랑을 시작할 때 우리가 처음 보는 것은, 바로 그 얼굴이다. 남들보다 몇 배 더 커다랗고 기형적인 코를 가지고 태어난 것은 절대로 그의 잘못이 아니다. 그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시라노는 자기 코를 비웃거나 놀리는 이들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인정사정없이 모두 처단해 버린다. 지독한 콤플렉스의 소산이라고 할 밖에 그의 행동을 설명할 다른 도리가 없다. 이런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면 어떻게 될까?
그는 친척 여동생 록산을 열렬히 사랑하지만 표현하지 못한다. 그녀가 추한 자기 외모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거절의 상처와 정면 대결하는 대신 그는 다른 길을 택한다. 역시 록산을 사랑하는 미남자 크리스티앙의 그림자 되기를 자청하는 것이다. 말도 잘 못 하고 글도 잘 못 쓰는 크리스티앙의 뒤에 숨어 시라노는 연애편지를 대필해준다. 그녀를 향해 바치는 편지 속의 뜨거운 열정과 절절한 사랑은 모두 시라노의 것이다. 어둠 속의 메신저가 된 시라노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가슴 아리다.
여자는 유려하고 진심 어린 문장으로 구애해오는 잘생긴 청년을 받아들이고, 둘은 본격적으로 사랑을 시작한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의 가면을 쓴 것인가? 크리스티앙이 시라노의 문장을 빌린 것인가, 아니면 시라노가 크리스티앙의 외모를 빌린 것인가? 정답을 찾는 일은, 어렵고 복잡하고 불가능하다. 여기 만 쌍의 연인이 있다면, 그 방법은 만 가지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 사랑들을 아우를 수 있는 단어는 어쩌면 하나일지도 모른다. 혼란. 그리고 아무도 모른다는 것.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이라는 울리히 벡의 제목을 차용하지 않더라도, 사랑이 착각과 오해로 뒤엉킨 혼동임을 증명하는 사례는 너무도 자주 목격된다. 추악한 얼굴을 가진 한 남자의 내부에 한없이 연약한, 부서지기 쉬운 영혼이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얼마 뒤 다시 만났을 때 J는 군대에 간 그 남자의 이야기를 더는 하지 않았다. 탁자 위에 올려둔 스마트폰이 연신 진동했고 그 때마다 배시시 웃으며 메시지를 전송하는 모습만을 보았다. 남자친구가 생겼냐는 내 질문에, 그녀는 대답했다.
“아니요. 새 카톡 친구예요. 말이 되게 잘 통해요.”
아무려나. 사랑은, 그리고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해독 불가능한 언어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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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만난 여대생 J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그 사람 얼굴을 모르지만, 그쪽에서는 저를 알고 있었대요. 지난 학기에 교양 수업을 같이 들었다고.”
내가 J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객관적으로 뛰어난 미인이었다. 또한 차갑거나 도도한 이미지가 아니라 부드럽고 착한 느낌을 주는 얼굴이라서, 길 가던 남자들이 이상형을 발견했다며 다가오는 것은 그다지 별스러운 상황도 아닐 것 같았다.
“종강하는 날, 낯선 번호로 카톡이 와 있었어요. 한 학기 내내 뒷자리에 앉은 남학생이라는데 제 기억 속엔 그 사람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지요. 담담하게 방학 잘 보내라는 내용이었어요.”
이 역시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미인에겐 흔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 뒤 일주일에 한 번, 두 번 카톡으로 얘기를 나눴어요. 친구들은 이상한 남자라고 했는데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냥 담담하고 소소하게 챙겨주는 사이? 둘 다 책 읽기를 좋아해서 읽고 있는 책 얘기도 하고 영화 얘기도 하고, 그냥 평범한 일과나 그때의 기분 같은 걸 짧게 나누기도 했고요.”
그는 담백하고 재미있는 사람 같았다고 했다.
“저도 처음에는, 뻔하지, 한 번 만나자고 하겠지 싶었는데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됐어요.”
이야기는 이제 이렇게 이어져야 마땅했다. 그 뒤로 그들은 만났고 남자 쪽에서 적극적으로 구애를 해왔고 J는 그의 진심에 감동해 사귀기로 했고 이제는 행복하게 만나고 있다는 것. 그것이 이런 종류의 서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낭만적인 동화의 결말이었다. 그런데 J가 들려둔 이야기에는 반전이 내장되어 있었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렀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카톡이 딱 끊긴 거예요. 대답도 없었어요. 저를 차단한 거지요. 알고 보니 군대에 가버렸대요. 저한테는 알리지도 않고서.”
그 남학생이 왜 J를 친구목록에서 차단하고, 또 알리지 않고 입대를 해버렸을까 추론하는 것은 부질없다.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단순하고 쉽게 읽어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제삼자가 아무리 궁금해해도 그는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렵사리 알아낸 그의 친구를 통해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그가 J에 비해 자신이 너무 초라하다고 생각했다는 것, J와 얼굴을 대하고 만나는 일을 몹시 두려워했다는 것.
나는 계속 어떻게, 사람을 만나보지도 않고 이럴 수 있느냐는 말만 반복하는 J에게 들려줄 말이 없었다. 그녀에게 혹시 시라노를 아느냐고는 묻지 못했다. 코가 커서 슬픈 남자. 17세기 프랑스의 기사(騎士)이자 시인, 그리고 검투사. 희곡 작가 에드몽 로스탕이 창조한 그의 이야기는 이미 여러 차례 영화와 연극으로 각색되었다. 프랑스 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에게 제43회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영화 <시라노>(원제 Cyrano de Bergerac, 1990)는 프랑스 혁명 200주년(1989)을 기념해 만든 대작이다.
시라노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가진 근위대장이다. 얼굴만 빼면 그는 명백히 ‘잘난 남자’이다. 그러나 언제나 사랑을 시작할 때 우리가 처음 보는 것은, 바로 그 얼굴이다. 남들보다 몇 배 더 커다랗고 기형적인 코를 가지고 태어난 것은 절대로 그의 잘못이 아니다. 그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시라노는 자기 코를 비웃거나 놀리는 이들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인정사정없이 모두 처단해 버린다. 지독한 콤플렉스의 소산이라고 할 밖에 그의 행동을 설명할 다른 도리가 없다. 이런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면 어떻게 될까?
그는 친척 여동생 록산을 열렬히 사랑하지만 표현하지 못한다. 그녀가 추한 자기 외모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거절의 상처와 정면 대결하는 대신 그는 다른 길을 택한다. 역시 록산을 사랑하는 미남자 크리스티앙의 그림자 되기를 자청하는 것이다. 말도 잘 못 하고 글도 잘 못 쓰는 크리스티앙의 뒤에 숨어 시라노는 연애편지를 대필해준다. 그녀를 향해 바치는 편지 속의 뜨거운 열정과 절절한 사랑은 모두 시라노의 것이다. 어둠 속의 메신저가 된 시라노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가슴 아리다.
여자는 유려하고 진심 어린 문장으로 구애해오는 잘생긴 청년을 받아들이고, 둘은 본격적으로 사랑을 시작한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의 가면을 쓴 것인가? 크리스티앙이 시라노의 문장을 빌린 것인가, 아니면 시라노가 크리스티앙의 외모를 빌린 것인가? 정답을 찾는 일은, 어렵고 복잡하고 불가능하다. 여기 만 쌍의 연인이 있다면, 그 방법은 만 가지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 사랑들을 아우를 수 있는 단어는 어쩌면 하나일지도 모른다. 혼란. 그리고 아무도 모른다는 것.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이라는 울리히 벡의 제목을 차용하지 않더라도, 사랑이 착각과 오해로 뒤엉킨 혼동임을 증명하는 사례는 너무도 자주 목격된다. 추악한 얼굴을 가진 한 남자의 내부에 한없이 연약한, 부서지기 쉬운 영혼이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얼마 뒤 다시 만났을 때 J는 군대에 간 그 남자의 이야기를 더는 하지 않았다. 탁자 위에 올려둔 스마트폰이 연신 진동했고 그 때마다 배시시 웃으며 메시지를 전송하는 모습만을 보았다. 남자친구가 생겼냐는 내 질문에, 그녀는 대답했다.
“아니요. 새 카톡 친구예요. 말이 되게 잘 통해요.”
아무려나. 사랑은, 그리고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해독 불가능한 언어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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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정이현(소설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수상작품집)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풍선』『작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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