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 제르맹 저 / 박재연 역 | 마르코폴로
국내 번역 발간된 실비 제르맹의 모든 책을 읽을 생각이어서 가장 최근에 선택하게 됐는데, 그림에 대한 에세이로서 소설을 읽을 때와는 또 다른 결이 느껴졌다. 각 그림의 화풍과 기법, 작품 세계에 대한 학술적인 분석보다는 작가의 시선을 따라 함께 미술관을 거닐면서 감상하는 마음으로, 그림마다 살아 숨 쉬는 빛의 신비에 경탄하는 시간을 필요로 할 때 가까이하면 좋을 책이다.
<도그맨> | 영화
뤽 베송 감독
아무런 정보 없이 보았다가, 도입부에서 철창에 갇힌 굶주린 개들을 보고 비통한 마음과 함께 이건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들이 절대 봐선 안 되겠다고 착각했다. 작품이 진행될수록 생각이 달라졌고 결말에 이르자 개들의 거룩함은 사람이 범접할 수 없음을 확인했다. 갱단과 관련하여 단순하다고 할지 살짝 납득하기 어려운 극히 일부 서사의 조각은 (이는 세속의 상식에 조응하기를 거부하는 순진함과 신성함을 극대화시켜서, 의도된 연출이었을 것 같다) 인간과 개들의 훌륭한 연기로 상쇄된다.
화순 운주사의 천불천탑 | 미술
황석영의 『장길산』을 비롯하여 유명한 문학 작품들의 모티프가 된 곳이며 현재는 관광객들이 주로 와불을 보러 가는 곳이라는 얘기만 들었다. 각 탑들과 불상이 진짜 천 개인지는 세어보지 못했다. 발길 닿는 곳마다 불상과 탑들이 있었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막연히 생각했던 불상에 대한 이미지(이마에 차크라가 있고 연꽃에 둘러싸인 전형적인 부처님 얼굴)가 전복되는 신선한 광경들을 보았다. 친근하고 인간적으로 묘사된 얼굴들이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었고, 탑들 또한 고교 시절의 수학여행지나 다른 어떤 사찰에서도 본 적 없는 특이한 모양들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봄눈이 쏟아져 내리는 바람에 예정보다 일찍 퇴장했지만, 이곳은 돌아 나오면서 내가 ‘다음번에 또 오고 싶어’라고 말한 첫 번째 절이었다.
슈베르트의 세레나데 | 음악
텔레비전을 켰다가 어느 채널인지 알지 못하는 데서 <모래시계>를 재방영해 주는 걸 스쳐 지나갔다. (전 국민의 ‘귀가시계’라 불리던 그 시절에는 못 보았다.) 고현정이 멋진 포즈로 큐대를 휘두르며 포켓볼을 한 개씩 텅, 텅 집어넣는 장면이 현란한 편집과 함께 스타일리시하게 연출되었는데, 러닝타임이 짧지 않았던 그 장면에서 귀에 매우 익숙한 클래식 선율이 보사노바풍으로 편곡된 게 들려왔다. 이게 뭐였더라, 분명 아는 건데…… 장면은 이미 지나가 버렸고, 건반으로 주 선율만 서투르게 두드려서 샤잠(Shazam)한테 들려줬지만 박자와 리듬 그리고 반주를 원조 그대로 구현한 게 아니어서 그런지 못 찾고 헤맸다가, 똑같은 건반을 클래식 전공자에게 들려줬더니 곧바로 답장이 왔다. 가물가물 부정확한 물음에 인공지능은 갈피를 잡지 못했으나 사람은 알아들은 것이다. 그 뒤로 잊지 않게 주기적으로 듣는다.
어째서 이 유능한 여성이 헌신적인 서포터로 살았을까, 아무튼 예술가하고는 웬만하면 사랑하는 거 아니다…… 같은 T적인 사고는 시대 배경을 감안하여 넣어두었고. 실존 인물 이야기로 스토리 자체는 지난 1년간 본 모든 뮤지컬 가운데 가장 숭늉 맛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각 인물과의 만남과 이별을 정방향과 역방향으로 교차 구성하여 현실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한 무대에서 조우하게 하는 연출이 인상적이었다. 어떤 파워풀한 격정이 흘러넘치기보다는 느긋한 마음으로 편안하게 듣기 좋은 음악 또한 관객에게 플러스 요인이 될 것이다. 예스24스테이지에서 6월 15일까지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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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장편소설 『위저드 베이커리』 『파과』 『아가미』 『한 스푼의 시간』 『네 이웃의 식탁』 『상아의 문으로』, 소설집 『고의는 아니지만』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단 하나의 문장』 『있을 법한 모든 것』 중편소설 『단지 소설일 뿐이네』 등이 있다. 오늘의작가상, 김유정문학상, 김현문학패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