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데뷔한 루시드폴, 이제는 누군가의 약혼자이고 싶다
마종기 시인과 함께 펴낸 서간집 『아주 사적인, 긴 만남』 때문이었을까. 루시드폴이 책을 낸다면 아마도 시집일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전직 공학박사, 싱어송라이터 루시드폴이 보탠 타이틀은 시인이 아니라 ‘소설가’다.
2013.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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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로 인터뷰를 요청하면서 사진촬영이 가능한지 물었다. 데뷔 10년이 훌쩍 넘었는데 설마 소설가로 데뷔했다고 튕기진 않겠지? 설마, 설마, 설마… 역시, 역시, 역시. 사진촬영은 원하지 않는단다. 이유를 물으니, 아직도 콘셉트를 잡고 사진 찍는 걸 무척이나 어색해한다고. 어쩔 수 없이 사진은 받기로 했다. 그러고 며칠 뒤, 사진기자와 동석해도 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때마침, MBC MUSIC <리모콘> 녹화가 있는 날과 인터뷰 일정이 겹쳐 메이크업한 루시드폴을 만날 수 있게 된 것. 쌩얼 조윤석도 궁금했지만 패션니스타 루시드폴을 만나는 것도 흥미로웠다.
설을 앞둔 날, <리모콘> 녹화가 진행된 성신여대 운정캠퍼스에서 루시드폴과 만났다. 사소한 질문에도 허투루 대답하는 모습이 없었고 젠체하는 표정도 없었다. 기발한 상상력은 어디에서 나오냐는 물음에는 “글쎄요. 우선 감사드리고요. 그런데 잘 모르겠어요. 다만 길게, 깊게 생각하고 글로 정리하려고 애쓰는 편이에요”라며 겸손해했다. 멋있어 보이는 답을 찾지 않으니, 대화에 속력이 붙었다. 『무국적 요리』를 쓰면서는 ‘과함’을 피하고 싶었단다. 평소 소설 속에서 작가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과하게 늘어놓거나 과한 묘사를 싫어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무국적 요리』를 읽는 내내, 국적 모를 주인공들을 만났지만 그들에게서 짙은 향기가 배어나지 않은 건, 아마 루시드폴의 취향 탓이 아니었을까.
좋아하는 가수의 소설을 번역하다가 나도 모르게
누구나 좋아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산다.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을 만큼 푹 빠져든다. 루시드폴도 마찬가지다. 뭔가 하나에 꽂히면 생각의 전부를 차지해버린다. 지난해, 루시드폴은 휴식기를 가졌다. 함께하는 사람들이 좋아 시작한 방송활동이 내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마냥, 어색하고 힘들었다. 때론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공연도 앨범 준비도 하지 않은 채, 1년여간 일반인 조윤석으로 살았다. 그리고 때마침, 번역하기로 했던 브라질 가수이자 작가인 치코 부아르케의 소설 『부다페스트』를 꺼내 들었다. 책 속 주인공은 고스트라이터. 남의 이름으로 책을 발표해야 하는 유령작가가 익명성 속에서 매너리즘에 빠져들다가 헝가리에 불시착하게 되면서 자신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헝가리어로 시를 쓰는 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평소 좋아했던 가수의 소설을 번역하면서 루시드폴은 자연스레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오선지 대신 원고지가 그에게 창작욕구를 불러일으켰다.
“번역 일을 시작한 게 2006년부터였는데 작년에 마침 시간이 여유로워서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오래 미뤄둔 숙제 같은 일이었어요. 그러다 출판사 분과 연락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소설을 쓰게 됐어요. 사실은 시를 먼저 쓰기 시작했는데 어떡하다 보니 소설집이 나오게 됐네요. 소설을 꼭 써야겠다고 하고 쓴 것도 아니고 시는 지금도 계속 쓰고 있는 상태에요. 시는 저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거든요. 하지만 시집을 내는 게 보통 일은 아니잖아요. 출간을 염두에 두지 않고 지금처럼 꾸준히 쓸 생각이에요.”
루시드폴의 팬이라면, 그와 마종기 시인이 주고 받은 서신을 담은 책 『아주 사적인, 긴 만남』의 존재를 알 것이다. 한번도 만난 적 없는 두 사람은 2년간 메일을 통해 예술과 과학, 그리움과 일상의 기쁨을 나눴다. 스위스에서 생명공학을 공부하던 시절, 루시드폴은 마종기 시인의 『이슬의 눈』을 읽으며 그리움과 외로움을 달랬다. 클래식을 애호하던 마종기 시인은 이 책을 계기로 루시드폴의 음악을 듣게 됐고, 두 사람은 지금도 가끔씩 서로의 안부를 전하고 있다. “2007년쯤인가 마종기 선생님의 신작이 나왔을 때, 한 팬 분이 제 이름으로 사인을 받아서 시집을 선물해주셨어요. 제가 평소에 마종기 선생님 작품을 좋아하는 걸 알고 계셨더라고요. 그리고 얼마 후에 그 분이 ‘마종기 선생님과 연락을 해볼 생각이 있냐’고 묻더라고요. 알고 보니 출판기획을 하는 분이셨어요. 처음에 책 제안을 주셨을 땐 연구소에 있던 중이라서 고사를 했는데, 마종기 선생님과 함께 쓰는 콘셉트를 듣고는 곧바로 좋다고 했죠(웃음). 그렇게 나오게 된 책이 『아주 사적인, 긴 만남』이에요.”
2008년에도 루시드폴은 15년간 써온 52편의 노랫말을 묶은 가사집 『물고기 마음』을 펴낸 바 있다. 때문에 루시드폴이 세 번째 책을 낸다면 ‘시집’일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짐작했다. 소설가, 아니 책을 내겠다는 생각은 어렸을 때도 해본 적이 없는 루시드폴. 하지만 글을 쓰면서 음악을 하는 것이 한결 편해졌다고 한다. 왜일까.
“피아니스트 혹은 판소리를 하는 사람이면 상관이 없겠지만 저는 싱어송라이터잖아요. 음악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노래, 대중가요를 만드는 사람이고, 가요라는 건 결국 이야기가 있어야 하죠. 그런데 가요라는 포맷에서 구현할 수 있는 이야기에는 여전히 제한이 많아요. 길이의 제약, 멜로디의 제약, 발음의 제약 등이 있어요. 그러니까 하고 싶은 모든 이야기를 음악으로 만들 순 없는 거죠.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꼭 무슨 이야기를 할 때 음악으로 해야 하나? 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창작자의 입장으로서 어떤 이야기를 할 때 다른 형식으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통로 하나를 찾은 느낌이에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모호하게 그리고 싶었다
독특한 제목 『무국적 요리』는 루시드폴이 교토 여행 중에 발견한 식당의 이름이다. 원조 대결이 한창인 다른 식당과 달리, 자신감이 엿보였다. 소설집에 실린 8편의 단편 중에 ‘무국적 요리’를 제목으로 건 작품은 없다. 가제로 언뜻 생각난 게 『무국적 요리』였고, 소설을 쓰다 보니 단편 속 주인공들의 모호한 캐릭터와 배경, 시간이 조금은 연관성이 있게 느껴졌다.
“웬만하면 제목을 바꾸고 싶었어요. 새로운 이름을 창조하고 싶었거든요. 현실에 ‘무국적 요리’라는 식당이 존재하니까요. 하지만 뭔가 조어해봐도 마땅하게 없고 단편 제목 중에 하나를 꼽자니 대표성이 떨어지고…. 그러다 결국 『무국적 요리』로 결정이 난 거예요. 책이 나오고 나서 강풀 작가에게 문자가 왔어요. ‘무국 끓이고 있냐고’(웃음).”
고향을 떠나 도시로 온 청년이 목욕탕을 찾다가 벌어지는 일을 그린 ‘탕’, 우화의 형식을 빌려 권위에 대한 욕망을 표현한 ‘똥’, 목욕탕을 둘러싼 한 가족의 좌충우돌 여행기를 다룬 ‘싫어!’, 광기와 허상의 허무함을 다룬 ‘추구’ 등 『무국적 요리』에는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파격적인 소설 문법이 다양한 레시피로 요리되어 있다. 루시드폴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그려보고 싶었고 사람이나 동식물도 대등한 위치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주인공의 배경을 설정하는 순간, 사회적 의미가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목들이 굉장히 짧은 단어, 문장인데 꼭 어떤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은데, ‘탕’의 경우는 ‘탕’이라는 단어가 갖는 중의적인 의미와 소리가 중요하고 ‘독’ 역시 마찬가지에요. 우리 말 중에 한 글자 단어가 중의적인 의미를 갖는 경우가 말에 많잖아요. 여러 의미가 중첩되면서 울림도 생긴다고 생각했어요.”
모든 단편의 초고가 반나절 이상이 걸리지 않았지만, 마지막에 수록된 ‘독’의 경우는 마무리를 짓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독’은 몸 안에 쌓인 독을 내뱉는 의식을 치르는 한 마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소설의 결말은 무책임할 만큼 끔찍하다. 어느 날, 독을 받아주던 사당의 독이 사라지면서 결국 마을 사람들이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된다. 하지만 사건의 원인은 소설 속에서 찾을 수 없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모두들 독이 있잖아요. 그게 한(恨)일 수도 있고 원(鴛)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사람이나 사회에는 항상성(恒常性)이라는 게 있어 유지가 되지만, 그것이 깨지면 병이 들죠. 하지만 사람들은 외부인자에만 관심이 많은 거 같아요. 사실 항상성이 깨지지만 않으면 병은 들지 않을 수 있는데 말이죠.”
작가 루시드폴, 소설에 대한 평가와 반응에 대해서 크게 동요하지 않을 생각이다. 누군가 ‘기적의 물’을 읽고, “소설 속 주인공이 무척 예민한 캐릭터인데 혹시 작가 본인의 모습이 아니냐”고 묻자, “글쎄”라고 대답했다. “캐릭터에 몰입해서 쓰다 보면 작가의 이야기가 투영되기도 하죠. 하지만 그 경계가 뭔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제가 소설 속 주인공처럼 물 맛을 다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예민하진 않아요(웃음).”
하나의 앨범, 천천히 여유 있게 들어보세요
스위스개그의 창시자인 만큼, 언어에 관심이 많은 루시드폴. 평소 다독가이냐고 물으니, “작년에 놀면서 할 일이 없어서 조금 읽었다”고 겸연쩍은 듯 웃었다. 하지만 최근 인상 깊게 읽은 책이 궁금하다고 하자, 서슴없이 책 제목을 읊었다.
“지금은 생태농업에 관련된 책을 읽고 있어요. 스피노자의 『에티카』도 읽었고, 윤여일 씨의 『여행의 사고』도 재밌게 읽었어요. 작년에 읽은 책 중에는 『한글의 탄생』,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체홉 단편선』 정도가 기억에 남아요.”
루시드폴은 오는 4월 2일부터 ‘목소리와 기타 2013- 다른 당신들’을 타이틀로 한 공연을 펼친다. 따뜻한 봄, 4월 한 달 동안 24회에 걸쳐 관객들을 만날 계획이다. 2011년부터 매년 4천여 석을 매진시킨 ‘목소리와 기타’ 공연은 루시드폴의 목소리, 기타, 건반 연주만으로 채워지는 단출한 무대로 꾸며진다.
“처음 기획했을 때부터 염두에 둔 게 ‘콘셉트 없는 콘셉트로 오래 하자’는 거였어요. 어차피 제가 할 수 있는 악기가 기타밖에 없고, 노래를 하는 사람이니까 기타 또는 피아노만 하나 놓고 하는 공연으로 가장 기본적인 노래의 골격만 남긴 무대를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공연이 길지도 않고 토크가 많지도 않아요. 부담 없이 음악이 듣고 싶은 관객들이 많이 찾아와 주셨으면 좋겠어요.”
작가가 아닌 가수 루시드폴로 돌아가, 독자 혹은 관객, 팬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물었다. “좋아하는 책, 좋아하는 음반이라면 한번쯤은 사서 천천히 읽어보고 들어보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제가 뮤지션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타이틀곡 한 두 곡 다운 받아서 듣는 것도 좋지만 하나의 앨범, 책을 여유 있게 천천히 들어보고 읽어보면 감동이 다를 거예요.”
『무국적 요리』가 출간된 지 딱 1달이 지난 지금, 루시드폴은 아직까지 마종기 시인에게 책을 보내지 못했다. 유일하게 좋아하는 문인이기에 선뜻 부끄러워서 망설이게 된다고. 혹시나 시집을 기다리셨을 선생님이 서운해 하시진 않을까 염려되기도 한다. “선생님께서 5월쯤에 산문집이 나와서 그 때 맞춰 한국에 오신다고 하셨거든요. 늦어도 그 때는 드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선생님의 반응이 걱정됐는지 살짝 얼굴을 붉히는 루시드폴, 과연 이 독특한 소설을 창작해낸 주인공이 맞나? 의심이 드는 찰나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책 날개에 사인을 부탁하자, 커다란 등산 배낭에서 사무실에서나 쓸법한 커다란 인주와 도장을 꺼내 들었다. 예전에 팬이 선물해준 도장인데, 쓸 데가 없어 아쉬워하다가 ‘소설가 데뷔’ 덕분에 사용하게 됐다고 즐거워한다. 루시드폴 사인 옆에 조윤석이라는 이름이 빨갛고 단단하게 찍혔다.
“소설가 다음으로 욕심나는 타이틀이요? 누군가의 ‘약혼자’요(웃음).” 시를 쓰다 보면 누군가의 약혼자가 되어 있을 것이고, 반려자가 옆에 있으면 어느새 시인이 되어 있지 않을까. 루시드폴의 무국적 언어로 요리된 시집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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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국적 요리 루시드 폴 저 | 나무,나무
음악인이자 화학자인 루시드폴이 첫 소설집 『무국적 요리』를 출간했다. 소설집은 「탕」 「똥」 「기적의 물」 「애기」 「행성이다」 「싫어!」 「추구」 「독」등 총 여덟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은 기존 소설문법에서는 읽을 수 없는 독특한 세계관과 스타일로 무장하고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국적, 성별 등은 모두 무국적이다. 국적도 알 수 없고, 성별에도 구애받지 않고, 특정한 전통적 영향도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모든 관계와 규범에서 자유로운 새로운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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