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소설이 아닐 리 없다.”
『멜론은 어쩌다』의 추천사에서 박서련 소설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줄곧 소녀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아밀 작가의 신작이 ‘마녀의 소설’이라니. 어떤 마녀가 등장할지, 작가는 소설에 무슨 마법을 부렸을지 궁금해집니다. 레즈비언 뱀파이어 친구, 사람보다 더 사람 마음을 잘 보듬어주는 섹스 로봇, 유전자 편집으로 만들어진 ‘모태 아이돌’, 점쟁이와 위험한 거래를 한 동양인 여성 피아니스트, 아이돌 인형 제작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백마녀, 어린아이만 갈 수 있는 천국 등 현실을 뒤집고 비틀어서 만든 틈새로 범상치 않은 이야기가 흘러나옵니다. 경쾌한 리듬으로 현실 사회의 문제를 비쳐낸 아밀 작가의 신간 『멜론은 어쩌다』 작업 이야기를 전해 들어봅니다.
『멜론은 어쩌다』 작업 후기
『멜론은 어쩌다』는 21년부터 24년까지 쓴 단편소설들을 묶은 책인데요. 4년이라는 시간을 한 권의 책으로 갈무리한 셈이다 보니, 제 마음도 삶도 한 차례 정리된 기분이 들어요. 계속 문장을 이어가다가 구두점을 한 번 찍은 기분이라고 할까요. 이제 숨 좀 돌리고 도움닫기를 해서 또 다음 이야기들을 써야겠죠.
소설집은 표제작을 제목으로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제목은 어쩌다 ‘멜론은 어쩌다’로 정해졌나요?
원래 가제는 『노 어덜트 헤븐』이었는데요. 출간 일정이 늦여름으로 잡혔고 마침 작중에 멜론이 나오니까, 멜론이라는 여름 과일을 제목에 넣으면 독자들의 이목을 끌 수 있을 거라고 편집자님이 판단하셨어요. 결과적으로 청량하고 싱그러운 느낌의 멜론 일러스트 표지와 더불어 경쾌한 제목이 독자분들의 호응을 얻고 있는 것 같아서 만족합니다. 「노 어덜트 헤븐」의 주인공 멜론의 이름은 사실 즉흥적으로 지어졌는데요. 경계를 뛰어넘는 주인공의 속성, 그리고 천진한 성격을 토대로 이름을 지으려 하니,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달콤한 멜론이 연상된 것 같아요.
전체적인 작품 톤이 경쾌하면서도 예리합니다. 뱀파이어 레즈비언 친구, 아이돌 인형 눈알을 붙이며 생계를 이어 나가는 마녀, 유전자 편집으로 만들어진 아이돌, 이성애자가 성소수자인 세계 등 엉뚱한 인물과 세계관으로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현실의 차별과 혐오를 뚜렷하게 응시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각 소설의 시작점은 무엇인가요?
전체적인 톤을 일부러 맞춘 건 아니었는데 쓰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첫 번째 소설집 『로드킬』은 무겁고 진중하고 비극적인 톤이었기 때문에 180도 달라진 셈인데요. 같은 사람이 쓴 것 같지 않다는 말도 들을 만큼 큰 변화여서 저 자신도 새삼 놀랐어요. 돌이켜보면 일단은 일종의 반골 기질이 발동한 것 같아요.
예컨대 「어느 부치의 섹스 로봇 사용기」는 ‘SF 장르에서 섹스 로봇 이야기는 쓰지 말라’는 금기에서 출발한 아이디어였어요. 그만큼 섹스 로봇 소재가 너무 흔하고 또 잘 쓰기가 어렵다는 의미인데, “안 흔한 방식으로 재밌게 잘 써볼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반문을 제기하고 싶었던 거죠.
「나의 레즈비언 뱀파이어 친구」는 레즈비언 친구를 둔 헤테로 여성의 우정 이만 사랑 미만의 감정을 그리는데, 갈팡질팡하고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는, 어찌 보면 모두의 미움을 살 만한 여자 주인공의 입장에서 글을 써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노 어덜트 헤븐」은 짐작하시겠지만 노키즈존에서 착안해, 그러면 어른은 못 들어오는 곳에 대해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이야기이고요. 뭔가 반박하고, 도전하고, 질문하고 싶은 제 안의 충동이 이런 흐름을 만들어낸 것 같아요.
『멜론은 어쩌다』는 인간, 비인간, 성별, 쓸모와 상관없이 존재 그대로 끌어안아 버리는 사랑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작가님께서 생각하는 사랑은 무엇일지 궁금해집니다.
너무 좋은 말씀을 해주셨네요! 저는 사랑이란 타자간의 필연적인 차이를 뛰어넘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생각해요. 로봇, 뱀파이어, 유전자 편집 인간... 모두 일반적인 사람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고 생각되지만, 따지고 보면 같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심연이 가로놓여 있죠. 그 심연 너머로 손을 뻗어 상대방을 끌어안고자 하는 노력은 때로는 잘못 전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실패하기도 하지만, 그런 노력을 멈출 수 없는 것이 바로 인간성인 듯해요.
작가의 말에서 “예전에는 누군가에게 충격과 불안을 안기고 밤잠을 어지럽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요즘에는 누군가에게 위로와 힘이 되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고 하셨죠. 이런 마음의 변화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마도 제가 좀 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예전의 저는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동력으로 글을 썼고,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요즘의 저는 점점 더 소중한 존재들에 대한 사랑에서 글을 계속 써나갈 힘을 얻고 있어요. 제가 그만큼 사랑을 많이 받은 덕분이겠죠? 독자분들에게 사인을 해드릴 때 “사랑과 용기가 가득하기를”이라는 문구를 써드리곤 하는데, 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해요. 우리가 사랑과 용기를 말미암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요.
작업실을 소개해 주세요.
저는 집에 갖춰놓은 작업실에서 작업해요. 미드센추리풍으로 컬러풀하게 꾸몄어요. 책상 뒤에는 큰 창문이 있어서 채광이 좋고, 모니터 뒤 벽에는 제가 좋아하는 엽서나 사진 등으로 ‘벽꾸’를 해요. 벽꾸는 계절마다 다르게 하는데, 그렇게 하면 긴 작업을 하는 기간에도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기분이 들어서 좋아요. 책상 바로 뒤에 있는 책장에는 제 저서와 번역서 들 위주로 꽂아두고 언제든 쉽게 꺼내볼 수 있게 해두었고, 작업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서재에는 더 많은 책이 갖춰져 있어요.
작업을 하는 동안 가장 의지한 반려 [ _______ ]
제 반려견 ‘아궁’이에요. 이름은 “아구구궁 귀여워!”하다가 그렇게 지어졌어요. 정말 그런 말이 절로 나오게 귀엽지 않나요? 아궁은 이제 7살이고, 누나인 저에게 찰싹 붙어 있으려 하는 껌딱지입니다. 잠만보에 귀차니스트이기도 해요. 아궁이 저를 주기적으로 산책 시켜준 덕분에 건강하게 글을 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고마워, 아궁!
아궁
마감 후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인가요?
8월에 마감을 하고 월말에 강릉으로 휴가를 떠나는 게 목표였어요. 못다 한 일거리를 뒤에 남겨두고 여행을 가면 찝찝하잖아요. 계획대로 모든 일을 깔끔하게 마치고 강릉 바다를 즐기고 와서 행복했습니다.
할 일이 있을 땐 그것 빼고 모두 재밌게 느껴집니다. 책을 만드는 동안 특히 재밌게 본 남의 콘텐츠는 무엇인가요?
김원우 작가님의 SF 소설집 『좋아하길 잘했어』를 즐겁게 읽었어요. 세 편의 중편이 실려 있는데 모두 빠짐없이 재미있었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들이었어요. 나도 좋은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좋은 영향을 주는 독서였습니다.
“천국에서는 그 누구도 멜론에게 멜론이 아닌 이름을 붙이지 않았고, 여자라느니 남자라느니 나누지 않았고, 부모님에게 돈이 많고 적고나 사는 집이 넓고 좁고를 따지지 않았으며, 어른이 되면 거짓임을 알게 되는 가짜 지식을 가르치지도 않았고, 이해할 수 없는 규칙을 따르라고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런 것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때리거나 혼내지도 않았다.” (「노 어덜트 헤븐」 113쪽)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멜론은 어쩌다
출판사 | 비채

이참슬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