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리탕 없는 세상을 겨우겨우
글: 채널예스
2008.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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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볕더위가 맹위를 떨치는 계절, 칠팔월. 이열치열의 계절, 칠팔월. 에어컨은 아예 상상도 못하고 선풍기도 부잣집에만 있던 시절, 더위를 쫓는 도구라고는 손부채가 유일했던 시절, 부채질하는 것도 힘에 겨워 더우면 아예 그냥 땀 흘리고 말았던 시절, 그런 시절에 남정네들은 당산나무 밑에 모여 앉아서들 이열치열하겠다고 동네 고샅 아무데나 실례를 하던 황구를 어떻게 해볼까나 궁리하기 바쁘던 바로 그때, 아낙네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다슬기였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의아해할 사람들도 있겠으나, 단호히 말하건대, 다슬기는 확실히 여름 음식이다. 보신탕에 대적할 유일한 여름 음식. 그러니 물속에서 꼬물대는 그 조그만 다슬기가 여름 한철 비명횡사의 운명에 처한 수많은 견공들의 목숨을 보전해준 은인이 되겠다는 말씀. 왜냐하면 다슬기탕 한 그릇 먹고 나면, 그래서 팥죽 같은 땀 흠씬 쏟고 나면 보신탕은커녕 일체 다른 잡생각 같은 건 ‘금도 망도 없이’ 달아나버린 후이므로, 보신탕을 먹으면 술 생각이 나지만 다슬기탕을 먹으면 마음이 오롯해진다. 다슬기탕 그 파란 물 빛깔같이 마음이 더할 수 없이 정갈해진다. 그것이 바로 다슬기탕의 마력이다.

별이 총총한 밤, 손가락을 넣어 조약돌을 젖히면

다슬기는 주로 밤에 잡으러 나가곤 했다. 미꾸라지는 필시 남자들이 잡는 것이지만 다슬기는 여자들이 잡는다. 다슬기는 ‘잡는다’라고 하지 않고 ‘줍는다’고 한다. 내 고향에서는 다슬기를 ‘대사리’라 했다. 대사리 주우러 가는 밤. 대사리를 먹이로 삼는 반딧불이가 반딱반딱하는 밤. 동네 언니들, 고모들(집성촌이므로 나보다 나이 많은 시집 안 간 처녀들은 모두 언니, 고모들이다)을 따라 나는 호야등(*남포등.)을 들고 냇가로 갔다.

대사리 줍는 여름밤. 찰랑찰랑 찰찰찰. 냇물이 조약돌 씻는 소리. 어둠 속에서 듣는 냇물 소리. 처녀들은 짙은 어둠 속에서 치마를 훌러덩 속곳 속으로 집어넣는다. 그래야 허리를 숙였을 때 치마가 냇물에 젖지 않고 대사리 줍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처녀들은 조용히 허리를 구부린다. 조약돌을 젖힌다. 대사리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처녀들은 오로지 손가락에 닿는 감각으로 그것이 모래인지, 돌인지, 대사리인지를 판별한다. 대사리가 바구니에 절반도 안 찼는데 허리보다 장딴지가 먼저 뻣뻣해진다. 누군가는 장딴지에 쥐가 오른다. 그래서 일껏 잡은 대사리 바구니가 엎어지기도 한다.

허리도 다리도 손가락도 손목도 목덜미도 머리도 꼼짝할 수 없으리만치 딱딱해져 오면 처녀들은 물에서 나온다. 그리고 낮에 불볕으로 데워진 냇가 바위 위로 올라간다. 아직도 뜨듯한 바위에 올라앉아 처녀들은 나직나직 노래 부른다.

“해당화아 피고 지이는 서엄마으으래…….”

물에 젖은 ‘다후다’(*광택이 있는 얇은 견직물.) 속곳은 언제 마른 줄도 모르게 꼬실꼬실 말라 있다. 처녀들은 속곳 속에서 치마를 꺼낸다. 치마는 붉거나 파란 월남치마다. 옷도 말랐겠다. 이제들 돌아갈 때도 되었겠다 싶은데도 처녀들은 도무지 일어설 줄을 모른다. 나는 그예 처녀들의 노랫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고, 대사리 주우러 가던 그 밤에 나는 언제나 내가 집에 어떻게 온 줄도 모르고 오게 마련이었다. 그 중 ‘등어리’ 넓은 처녀 등에 업혀온 것이지마는. 그런데 그 야심한 여름밤에 그 처녀들은 뭣 한다고들 그렇게 냇가 바위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던 것일까. 누구를 기다리느라고, 별이 총총한 그 밤에 말이다.

다슬기가 대사리지만 대사리를 다슬기라고들 하니까

대사리를 가장 맛없게 먹는 방법은 소금물에 삶은 것을 대꼬챙이로 빼먹는 것. 소금물 대신 짠 된장 물에 삶은 것이 그나마 좀 낫다. 그러나 그 고생해서 그렇게밖에 먹지 못할 거면 대사리 같은 거 아예 줍지도 않았을 것이다. 땀 쪽쪽 흘리고 먹지 못할 거, 그 고생할 필요가 없다.

도시의 유원지 같은 데서 번데기랑 함께 놓고 파는 ‘고둥’이라고 하는 것을 먹어봤는데 중부 지방을 넘어서면 고둥이라든가 다슬기는 전부 그렇게 이쑤시개로 파먹는 것으로만 알고 있는 듯했다. 어디서도 대사리탕 하는 집을 보지 못했다. 예전에는 남쪽에서도 대사리탕 같은 건 내놓고 파는 음식이라고는 여기지 못했던 듯하다. 아무리 먹을 것 없다 해도 어찌 뒤꼍에서 ‘쪼글치고’ 먹는 음식인 대사리탕을 다 판다냐, 싶었던 것이리라. 그러다가 최근에는 더러 다슬기탕이라고 간판을 단 집을 보았다(하긴, 옛날에는 창피하다고 내놓지도 못하던 보리밥집이 깔린 세상이니). 그러나 대사리탕집은 아직도 없다. 그러니까 다슬기가 대사리지만, 대사리를 다슬기라고들 하니까 차마 대사리탕이라고 못하고 다슬기탕이라고 써 붙인 모양이다. 그렇지만 나는 끝?지 대사리탕을 끓여 먹고 싶다. 누가 그게 그거라고 해도 나는 다슬기탕 말고 대사리탕을 끓일 테다.

푸른 대사리 국물에 밀가루 반죽을 뚝뚝 떼어

처녀들은 대사리는 잘 잡지마는 끓일 줄은 모른다. 그런데 또 희한한 것은 대사리만 잘 잡던 그 처녀들이 시집을 가서는 또 그들의 엄마들처럼 대사리탕 잘 끓이는 아낙이 저절로 되었던 것인데, 하여간 딸들이나 시누이들이 잡아온 대사리를 끓이는 것은 언제나 엄마들이나 할머니들이다. 그러고 보니 엄마들이나 할머니들은 여름밤 냇가에서 더 이상 기다릴 사람이 없어서들 대사리를 주우러 가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한여름 낮에 대발 쳐진 방에서 베를 짜던 엄마는 점심때가 되기 전 방에서 나와 차가운 옹기에 담긴 대사리를 확독에다 들들 간다. 확독에다 가는 그것이 참으로 고난도의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다. 너무 세게 갈아버리면 대사리 껍질뿐 아니라 알맹이까지 모두 갈아져서 대사리는 생채로 죽이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너무 힘을 안 주고 슬슬 갈면 대사리 껍질과 알맹이를 좀처럼 분리시킬 수가 없다. 시집온 이래로 해마다 여름이면 평생을 해왔던 솜씨로 대사리를 갈아서 물에 씻어 체에 밭치면 푸른 대사리 살만이 남는다.

대사리탕에 넣는 것은 여러 가지다. 미역을 넣기도 하고, 호박잎을 손으로 비벼 보드랍게 해서 쭉쭉 찢어 넣기도 하고, 다 끓을 때쯤 방아잎(*배초향.)을 넣기도 하고, 매운 청양고추를 넣기도 한다. 굵은 감자를 도마 없이 그냥 손으로 ‘짜개’(쪼개는 게 아니라) 썰어 넣기도 하고, 그러나 공통적으로 들어갈 것은 밀가루 수제비다. 푸른 대사리 국물에 밀가루 반죽을 뚝뚝 떼어 넣는다. 소금으로 간하지 않고 맑은 청장으로 간하면 더 맛있다.

그러고 보니, 옛날 여자들이 만든 음식 중에 내가 맛있다고 여겼던 것은 거개가 도마, 칼을 사용하지 않고 만든 음식들이었던 것 같다. 뭐든지 그냥 손에서 짜개고 찢고 분질러서 뚝뚝뚝 만든 음식. 그리고 또 내가 맛있다고 여기는 음식은 파, 마늘 같은 양념을 넣지 않은 음식. 그냥 원재료만으로 된 음식. 미역과 대사리 혹은 호박잎과 대사리, 그리고 밀가루와 간장만 있으면 대사리탕 끝이다. 그리고 거기에 엄마의 땀 몇 방울.


한 그릇 뚝딱, 마음의 허기를 채우다

아침밥 먹고 논 물꼬 좀 보고 오던 길에 당산나무 밑이나 모정에서 언제쯤 뉘 집 황구에 된장을 바를까 궁리하다가, 드디어 모날 모시로 날을 잡고서 끼니때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남정네들 앞에 놓인 푸른 대사리탕 한 그릇. 식구들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대낮, 매미 소리 요란한 뒤꼍 감나무 밑 평상이나 툇마루에 둘러앉아 대사리탕을 먹었다. 대사리탕 끓이느라 얼굴이 벌게진 엄마는 앉을 자리도 없어 화덕 옆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먹었다. 왜 그랬을까. 왜 대사리탕은 앞마당 쪽마루에서 안 먹고 뒤꼍에서, 그 옹색한 자리에서들 먹었던 것일까. 아이들은 밀가루 수제비만 건져먹고 어른들은 아이들이 남긴 대사리 국물에 거무튀튀한 보리밥을 말아 먹었다. 대사리탕 먹은 날은 더워도 더운 줄 몰랐다. 대사리탕을 다 먹고 일어설 때쯤 때마침 뒤꼍 대나무밭에서 축복처럼 바람 한 줄기 일어주기라도 하면, 그것은 거의 환희였다.

대사리탕 국물 빛은 영락없이 댓잎 빛깔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대사리탕을 먹으면 대밭이 생각난다. 대밭에 가면 대사리탕이 생각나고, 대밭과 대사리탕의 공통점은 사람의 마음에서 잡념을 없애주는 것이다. 대밭에 가면 마음이 한없이 청정해져서 보신탕 같은 것은 죽어도 생각 안 나게 해준다. 힘없어도 세상사는 거 괜찮을 것 같아진다. 그런 기분인데 거기다 대사리탕으로 배를 불려놓으니 이 세상에 뭘 더 바랄 것이 있겠는가, 싶어지는 것이다. 무욕의 음식 대사리탕, 욕심을 없애주는 대사리탕. 배가 터지도록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이 허기는 대사리탕 한 그릇이면 해결될 터인데, 이제 세상엔 다슬기탕은 있어도 대사리탕은 없다. 남도를 여행하던 중 구례 차부 옆 식당에서 다슬기탕을 시켜 먹으며 나는 내 유서 깊은 허기를 겨우겨우 ‘땜빵’하였다. 그런데 그 집의 대사리는 누가 주워온 것일까? 대사리 줍는 처녀들이 없어진 지 오래인 이 시절에.

17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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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밍

2008.07.15

전 대사리하면 생각나는 추억이 어릴적 할머니댁 근처 개울에서 사촌들과 돌에 닥지닥지 붙어있는 대사리를 잡아오면 할머니께서 삶아 주시면 바늘이나 옷핀으로 대사리 눈딱지 안을 콕찍어 돌돌 말아내서 먹었던 것이 떠오릅니다. 또 다슬기 한종지를 넣고 끊여주신 대사리 강된장에 야들야들한 어린호박잎을 뒤집어 쌓먹거나 밥에 썩썩 비벼먹었던 일... 간혹 대형마트 해산물코너에 가면 알맹이만 담아져 있는 것을 볼 때마다 그때 개울에서 잡던 대사리를 떠올리게 되더군요. 사실 먹는 것보다 잡는게 더 즐거웠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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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

2008.07.15

나이가 들수록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이 좋아지네요. 직장을 그만 둔 후 집에서 저 혼자 먹을때 아무렇게나 먹게 되는데 가끔 잘차련진 밥상에 앉으면 상받은 기분이 드네요. 스스로를 위한 가족을 위한 만찬으로 이 더운 여름을 이겨나가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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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enkind

2008.07.15

대사리, 확독 등등. 남편 사투리에서 가끔 들리던 단어들이군요. 대사리탕이라는 것을 먹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외가댁에 다슬기를 잡아 마당 한켠 고무 '다라이'에 모아두었던 것이 어찌나 신기했던지 지금도 그 광경은 생생히 기억나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만들어 먹었는지는 모르겠네요. 입이 짧은 아이였던지라 아마도 수상한 것이라 생각하고 안 먹었지 싶습니다. 그런데 지금 글을 보니 무언지도 모르는 대사리탕이라는 것이 먹어보고 싶네요. 대숲의 바람소리를 들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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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1963년 전라남도 곡성 출생.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중퇴하고 1991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중편 '씨앗불'을 발표하며 작가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92년 여성신문학상, 1995년 제13회 신동엽창작기금수여, 2004년 제36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2005 제2회 올해의 예술상 문학부문 올해의 예술상, 만해문학상, 요산김정한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의 모습과 가난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다뤄온 작가 공선옥. 특히 여성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모성을 생동감 넘치는 언어로 표현해 내는 소설가이다. "근대에 태어났지만 전근대적인 삶을 살았다"고 전하는 작가의 음성은 유년시절 아버지는 밖으로 나돌고, 세 자매가 생존을 위해 뛰어야 했던 상황에서 둘째 딸의 책무를 지닌 채 "같은 연배 또래들이라고 해서 같은 시대를 사는 것은 아님"을 깨닫는다. 참외 파는 소녀이기도 했으며, 입학만 한 상태에서 무학점 학생으로 남아야 했고, 빚에 쫓겨 다니는 아버지, 몸이 불편한 어머니의 병간호가 작가 공선옥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이었다. 공장을 떠돌며 위장 취업자가 아닌, 대학생 출신 생계 취업자였으며, 나중에는 고속버스, 관광버스, 직행버스를 전전하며 안내양을 하던 어느 날 “나의 궁핍한 시절이 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작가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소설가 공선옥은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목마른 계절」 「우리 생애의 꽃」 등 개성있는 작품을 잇따라 발표하며 가진 자에게는 눈물의 슬픔을, 없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기쁨을 안겨 주는 작가이다. 화려한 정원에서 보호받고 주목받는 꽃보다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바람 부는 길가에서 피었다 지는 작은 꽃들에게 눈길을 보내온 작가는 작품 속에서 주로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들의 삶, 특히 여성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모성을 섬세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언어로 담아내고 있다. 2002년 『멋진 한세상』이후 5년만에 내놓은 소설집 『명랑한 밤길』역시 그녀의 작품 경향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소설집 역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중심이 아닌 변방에서 버둥거리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국내 최초로 온라인 독자 커뮤니티 문학동네에 일일연재되어, 화제를 모았으며, 가장 아픈 시대를 가장 예쁘게 살아내야 했던 젊은이들의 고뇌를 생생하게 그려내었다. 스무 살 시기의, ‘사람들이 많이 죽어간 한 도시’에서의 쓸쓸함과 달콤함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란』에서는 가족의 빈자리를 견디며 꿋꿋이 살아가야 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들이 일궈낼 수 있는 삶의 행복한 순간을 유려하고 따뜻하게 그려냈으며, 『꽃 같은 시절』은 삶의 터전을 위협받는 사람들, 철저하게 이 사회의 '약자'로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꽃 같은 싸움을 담고 있다. 소설집 『피어라 수선화』, 『내 생의 알리바이』, 『멋진 한세상』, 『명랑한 밤길』, 『나는 죽지 않겠다』, 장편소설 『유랑가족』,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영란』, 『꽃 같은 시절』,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