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 잠들면 안 돼! 정월 밤의 시집들
달의 기운을 받으며 읽기 좋은 시집을 추천합니다.
글ㆍ사진 임유영 (시인)
2025.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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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일 년 중 가장 좋아하는 명절은 정월대보름입니다. 맛있는 묵은 나물, 오곡밥, 호두와 호두 깨는 망치도 있고요. 만나는 사람마다 이름 불러 더위도 팔아 신나고요. 하지만 누가 뭐래도 저만의 하이라이트는 대보름 전날 밤, 즉 열나흗날 밤입니다. 그날 잠들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이야기, 들어보셨나요?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사람 외의 존재들이 활동한다는 상상력은 동서양이 비슷한가봐요. 대보름 다음 날은 귀신들이 활동한다고 해서 ‘귀신날’ 이라고도 한다지요. 이맘때 밤은 어쩐지 으슬으슬하고요. 고요하면서도 무언가 나직하게 생동하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이 있습니다. 아마 늦게까지 깨어있어도 혼나지 않는 날이라, 드물게 밤의 기운을 듬뿍 느꼈던 어린 시절 기억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오늘은 정월 열나흗날 깊은 밤, 달의 기운을 받으며 읽으면 좋을 시집들을 소개하렵니다. 사랑하는 친구, 연인, 가족, 동물, 귀신, 요정, 도깨비, 호랑이, 다 모이세요. 우리 함께 둘러앉아 밤새 시를 읽어봅시다. 분명 마음에 드는 책이 있을 거예요.


 

『장송행진곡』

김현 저 | 민음사

 

그늘에선 푸른 냄새가 난다

슬프다고 할 수 없는 기쁘다고도 할 수 없는

아내는 그 냄새를 귀신 냄새라고 일컬었다

 

너한테도 나지?

물으면서 사라졌다

(「산그늘」, 『장송행진곡』, 30쪽)

 

밤 열 시. 흘러간 옛 노래 부르는 척, 청승맞은 척, 모르는 척, 아픈 곳만 골라 후벼파는 귀신같은 김현 시인의 『장송행진곡』을 읽어봅니다. 시인은 통속적인 감정의 양식과 사회정치적 구호, 카피, 기사 등을 시에 적극적으로 도입해 우리 삶의 이야기를 눈앞까지 바짝 데려옵니다. 현실을 모른 척 말고 함께 보자면서요. 날카로운 자각과 힘을 뺀 표현 사이의 거리가 생각할 틈을 충분히 만들어주고요. 눈물 한 방울 톡 떨어트리게 하는 서정시인가 하면 손에 진땀을 쥐게도 합니다. 하, 인생 다 부질없다 싶으면서도…… 그래, 어차피 부질없을 거면 세게 한번 부딪혀나보자, 싶게 만드는 김현 시의 유연한 힘입니다. 

 

이 시집에서 눈에 띄게 출몰하는 이가 있으니, “아내” 입니다. 아내는 사람인 듯도, 귀신인 듯도 하고요. 시인인 듯, 시인의 시(詩)인 듯도 한 알쏭달쏭한 존재입니다. 시의 화자는 아내의 말을 전달하기도, 아내의 목소리 자체가 되기도 하며 끝내 주체에의 확신을 주저하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저 사람이 내 아내라면 나는 남편일까요? 아내일까요? 아내는 살았을까요, 죽었을까요? 아내는 희망일까요? 아내는 정말 아내일까요?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중에 누가 더 죽어 있는 걸까요? 

 

그 엽서에는 이름 없는 시인이 쓴 시가 적혀 있다

돌아오길 바랍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아내는 적어 놓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내가 해 주기를 바란다

아내는 지금 내 속에 잠들어 있고

엽서를 들고

나는 홀로 기차를 탔다

아내에게 엽서를 보내기 위해서

그 엽서에는 푸른 기차와 철도원이 있고

조용히 별이 뜬다 조용히

눈이 내린다 이런 식으로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 엽서는

(「아내의 엽서」, 『장송행진곡』, 50쪽)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신미나 저 | 창비

 

자정입니다. 열두 시가 되면은 문이 닫힙니다. 세상은 조금 더 조용해지고 작은 소리는 더 크게 들리는 시간. 들리지 않던 소리도 조금은 들을 수 있을까요? 책장과 눈싸움을 하다가 얼른 신미나 시인의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를 뽑아 듭니다. 시인은 서두름 없이 조심스럽습니다. 그는 세계를 마치 오래된 책의 바스러진 책장을 넘기듯 ‘지켜보는 사람(10쪽)’입니다. 시인의 손길로 옛이야기들이 사뿐히 현실과 중첩되어 새로이 생명을 얻습니다. 그의 시 속에서는 아무리 오래된 것도 새것처럼 천진하고, 어린 사람에게도 낡은 영혼이 깃듭니다. 

 

할머니는 겹겹의 모란치마로

나를 폭 싸서 공중에 띄웠습니다

 

키질하듯이 위아래로 까부르니

몸이 아기만큼 작아져

배꼽이 간지럽고

이히히 웃음이 났습니다

 

할머니는 내가 말을 배우기 전

아기들만 아는 우스운 재미로

슬픔을 걷어가려 한 것인데

 

오랜만에 웃은 게

세상에 없는 일인 걸 알고

섭섭해서 눈을 감았습니다

(「탱화 3」,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109쪽)

 

이 시집을 읽는 동안은 지붕이 낮은 방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는 기분을 느낍니다. 마음속 헛발질도 잠시 멈출 수 있습니다. 내가 “맨바닥에서 / 제 무게를 이고 있는 / 그릇의 굽(시인의 말, 같은 시집)”이라고 생각한다면 결코 더 가볍고 더 무거운 것은 없겠습니다. 딱 그 정도의 높이와 그만한 무게로 자신을 받아들여 봅니다. 그렇기에 다음 시는 시집 속 어느 초월적인 존재들이 등장하는 시보다 섬찟하지요. 아마 이 시집을 통틀어 가장 차가운 목소리가 아닐까 합니다.

 

인부들이 커다란 은행나무 가지를

톱으로 잘라낸다

 

왜 자르는 쪽이

소리가 더 큰가

(「심문」 전문,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92쪽)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신해욱 저 | 봄날의책

 

어느덧 새벽 두 시. 입이 심심해 호두도 깨고 땅콩도 까먹습니다. 호두 부스러기, 땅콩 껍질이 풀풀 춤을 추는 가운데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를 펼쳐 봅니다. “동생이 하늘에서 하나 하나 하나” 태어나 폴폴 내려오는 시인의 말을 지나 “쓸어버리고” 읽어볼까요. 1부 첫 시는 이렇게 시작되네요. 

 

모르겠어 이 밤은 모르겠다

 

있어야 했을 그 밤을

이 밤이 차지하고 있다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그러자 드러나고 있다

(「쓸어버리고 다시 하기」,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13쪽)

 

야호! 모험 시작입니다. 혹시 지브리 사의 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이 시집을 읽으면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세계 속의 이름 없는 존재들을 자주 떠올리곤 했습니다. 그것들은 때로 숲의 정령, 가마의 석탄 가루, 바닷속의 치어 같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거의 말이 없고, 그러니 주장하지 않고, 주위를 떠돌면서 약하게 웅성거리기나 하는 작은 것들의 무리이지만 결코 하나로 합산되지는 않는 존재. 글쎄요, 세계의 가루, 알갱이, 구성물질, 입자…… 뭐라고 해야 적당할지 잘 모르겠는데요. 이 ‘이름 없음,’ ‘캐릭터 없음’도 이들의 특성인 듯합니다. 

 

이 시집 속에서는 “나(화자)”도 종종 이들이 됩니다. 이들은 “우리”인 동시에 “나”이고, “나”는 어떤 때엔 인간처럼 존재하고 행위하지만, 개별성을 뽐내거나 인간성을 찬미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인간적인,’ ‘문명적인’ 것에 대해서는 매우 신기해하고 호기심을 갖는 눈치네요. 

 

초나누기를 하고 있습니다

 

초침은 하나

초침은 오직 하나

 

우리는 규방에 모여

골무를 끼고

바늘잎을 들고

해묵은 겨울밤의 초나누기를 하고 있습니다

(「초,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19쪽)

 

초나누기의 몫으로 우리는 하나의 바늘을 들고 깨어나. 쓸어봐. 가죽 같아. 

 

(…)

 

우리는 봉합을 맡으려는 것 같습니다.

 

자라라. 잘 자라라. 가죽이 벗겨진 어린 양에게. 어린 담비에게. 젖먹이에게. 인조가죽을 입혀주기. 여며주기. 거스르자. 우리는 결을 거슬러. 등이 있다. 엉덩이는 크다. 꼬리는 짧다. 쓸어주기. 정성껏 쓸어주기. 긁어주기. 발이 있다. 발바닥이 있다. 경혈이 있어. 깨워보자. 침을 놓아야겠어. 우리는 하나의 바늘을 들고. 

 

골몰하고 있습니다. 바늘만 들고.

(「의류와 포유류」,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54-55쪽)

 

지브리 세계에서 그 비정형 존재들은 배경의 일부처럼 보이면서도 세계를 구성하고 지탱하는 주요한 요소로 표현됩니다.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에서 “하나”와 “하나”의 합인 “우리” 역시 때리고 부수기보다는 태어나고 만드는 존재들입니다.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입은 처음 여는 것처럼, 저도 그렇게 시를 써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정말 귀엽지 않나요. 이런 허깨비라면 얼마든지 만나고 싶습니다. 자, 눈썹 색깔이 좀 어떠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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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유영 (시인)

2020년 문학동네신인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오믈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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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

1980년 출생. 2009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시 「블로우잡Blow Job」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김준성문학상,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글로리홀』, 『입술을 열면』, 『호시절』 등, 산문집으로 『걱정 말고 다녀와』, 『아무튼 스웨터』, 『질문 있습니다』, 『당신의 슬픔을 훔칠게요』, 『어른이라는 뜻밖의 일』, 『당신의 자리는 비워 둘게요』 등이 있고, 앤솔러지 소설집 『새벽의 방문자들』, 『인생은 언제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 등에 참여했다. 2012년 짧은 영화 [영화적인 삶 1/2]를 연출했다. 2021년 『낮의 해변에서 혼자』 시집을 냈다. 심야 라디오 방송을 즐겨 듣는다. 토요일에는 되도록 낮잠을 자고, 일요일에는 되도록 글을 쓴다. 어제는 목화송이를 가만히 보다가 모시조개탕을 끓이고 마음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눈은 오고요, 다정하여, 족집게로 새치 한 가닥을 뽑았다. 09시까지 출근하고 18시가 되면 퇴근한다. 야근하고 때론 주말에도 일한다. 지난 몇 년간은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한의원을 통해 쌍화탕을 종종 복용하였고, 요즘엔 아침마다 홍삼농축액을 미온수에 타 먹고 있다. 최근 가장 큰 관심사는 언제 쓸까, 하는 것이고 가장 크게 관심이 사라진 것은 사람이다. 그런 이유로 출퇴근 지하철에서 모르는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듣고 그걸 시로 옮겨 적는다. 며칠 전 아침 ‘지옥철’에서는 “아, 씨발, 자빠지겠네.”라는 말을 들었다. 무언가 들킨 기분이 들어서 뒤로 밀리지 않기 위해 앞사람을 힘껏 밀었다. 내 옆에 서 있던 사람은 그 와중에도 태연히 휴대전화로 ‘에코후레쉬세탁조클리너’를 살펴보고 있었다. 인생은 어디까지나 살아 봐야 하는 것. 이런 작가 약력을 보면 누군가는 작가가 신비하지 못하게, 하고 혀를 끌끌 찰 테지만 신비롭게도 이렇게 살고 있음이 작가에게는 가장 신비로운 일이다. 소시집, 시집들과 산문집들을 묶었고, 여러 권의 책에 산문과 소설과 시를 수록했다. 인생 영화를 꼽으라고 하면 항상 이 영화를 할지, 저 영화를 할지 머뭇거리게 된다. 내일 당신과 영화를 봐야 한다면 그 영화들 중에서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을 고르겠다. 감독은 이 영화를 두고 말했다. “관객들이 친구를 만났다고 생각하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