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 없는 세상에 산다는 것 - 올리버 색스의 『색맹의 섬』
글ㆍ사진 채널예스
2008.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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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이 어떤 부분을 상실하거나 손상당한 상태에서 그것을 이겨내고 새롭게 적응해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올리버 색스

하와이에서 남서쪽으로 3,900km 떨어진 태평양의 작은 섬. 현재 인구는 약 700명. 폰페이를 둘러싼 바다에 점점이 박혀 있는 여덟 개 산호섬 중 하나. 1년에 고작 대여섯 차례, 배 한 척만이 이따금씩 찾아오는 승객들을 실어 나르는 곳. 이 외딴 섬이 바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색맹의 섬, 핀지랩이다.

저자인 올리버 색스는 저명한 신경계 의사다. 그가 핀지랩으로 떠나게 된 계기는 사실 단순하다. 그는 교통사고의 충격으로 완전히 색맹이 된 환자를 진료하게 되는데, 그 환자는 뇌의 손상 때문에 색을 보는 능력뿐만 아니라 색을 상상하거나 기억하는 능력까지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평생 빛깔을 보다가 어느 순간 그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자신의 세계가 빈약해지고 괴기스러워지고 비정상이 된 것 같다고 호소했다. 이 일을 계기로 색스는 ‘색깔 없는 세상에 산다는 것’에 대해 강한 궁금증을 갖게 된다. 그것은 그의 어린 시절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다.


어렸을 때 나는 편두통으로 시각 이상을 겪었다. 그럴 때면 눈앞에 별이 보이고 시야에 이상이 생기는 전형적인 증상만이 아니라 색각에도 이상이 생겼는데, 몇 분 동안 색각이 약해지거나 아니면 완전히 사라지는 증상이었다. 이런 증상을 겪을 때면 겁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몇 분 동안이 아니라 영원히 아무런 색깔 없는 세상을 사는 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어 애가 닳기도 했다.

여기에 미지의 섬에 대한 오랜 환상과 때마침 미크로네시아에서 신경질환을 치료하는 친구의 도움 등이 맞물리면서, 그는 마침내 ‘색맹의 섬’을 향해 떠나게 된다. 핀지랩은 열대초목이 사방으로 무성한 아름다운 섬이었다. 한쪽에는 근사한 쪽빛 바다가 펼쳐지고 다른 쪽 숲에선 팔다리가 낭창낭창한 흑인 아이들이 꽃과 바나나 이파리를 흔들면서 뛰노는 곳. 한때 이 섬에는 왕국이 존재했었다. 세습왕 난음와르키가 다스리는 이 왕국에는 복잡한 계급제도, 구전 문화와 신화, 그리고 그들만의 언어가 있었다. 그러나 이 번창하던 사회는 1775년 핀지랩 일대를 덮쳤던 태풍 렝키에키로 인해 비극을 겪는다. 당시 엄청난 힘으로 이 작은 섬을 집어 삼켰던 태풍은 섬 인구의 90퍼센트를 그 자리에서 죽였으며, 생존자 대다수도 기근에 시달리다 죽어갔다. 1천 명에 육박하던 인구는 단 몇 주 만에 2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후 이곳에선 생존을 위한 대대적인 번식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불가피했던 근친교배로 인해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전에는 희귀했던 유전적 특징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색맹 돌연변이의 출현…… 그들은 이 기이한 상태를 묘사하는 말로 ‘마스쿤(안 보인다)’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그 태풍으로부터 200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 이 섬 인구의 3분의 1이 마스쿤 유전자 보유자이며, 전체 인구 약 700명 가운데 57명이 전색맹이다. 세계 다른 지역에서 색맹의 발생률은 3만 분의 1 미만인데, 이곳 핀지랩에서는 12분의 1이다.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몇 가지가 있다. 망막세포의 결함에서 오는 색맹은 대부분이 부분색맹이며, 일부 유형은 아주 흔하다는 것. 적록색맹의 경우, 남성 20명당 한 명꼴로 나타난다. 그러나 선천성 전색맹(全色盲)은 극히 드물어서 3-4만 명당 한 명꼴밖에 되지 않는다. 색맹의 특징은 눈에 원뿔세포가 없다는 것인데, 막대세포에 포착되는 불충분한 정보에만 의존하다보니 밝은 빛 아래에서는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다고 한다. 햇빛이 강할 때는 시야가 즉각적으로 쪼그라들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극도로 시력이 약하고, 눈이 흔들리는 안진증에 시달린다. 색맹인 사람들은 대개 눈을 찌푸리고 쉴 새 없이 깜빡거리며 환한 곳을 피하는 행동을 보이는데, 이것은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핀지랩에 도착한 올리버 색스는 일행과 함께 마스쿤을 앓고 있는 원주민들을 방문해 관찰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을 모아 놓고 여러 가지 색맹 테스트를 하면서 잘못된 지식을 바로잡아 주기도 하고, 준비해 간 돋보기, 선글래스, 외알 망원경 등 시력 보조기구를 선물한다. 사실 핀지랩에도 작은 의료시설이 있긴 하지만, 목숨에 전혀 지장이 없으면서 선천적 비진행성 질환인 ‘마스쿤’은 아예 치료 대상이 아니다. 그는 섬에 머물면서 새로운 차원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색맹의 섬』을 읽으면서 줄곧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생각 하나. 과연 ‘색깔 없는 세상에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처음 책 제목을 봤을 때는 느닷없이 영화 대사 하나가 떠올랐었다. <케이트와 레오폴드>라는 맥 라이언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물인데, 19세기에 살고 있는 귀족 남자와 21세기 뉴욕에 사는 여자가 시간을 건너뛰어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다. 딱히 기억나는 장면은 없는데, 대사 하나만 또렷이 남아있다. 타임워프(Time Warp: 시간과 공간이 엇갈리는 순간)의 비밀을 처음 발견한 박사가 그 충격을 묘사하는 대목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처음으로 무지개를 본 개예요. 다른 모든 개들은 날 믿지 않죠.”


이것은 결핍과 부재를 전제로 한 말이다. 감각이 차단된 상태, 흡사 필터에 의해 중요한 정보가 걸러지고 있는 듯한 답답한 감정을 먼저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지만 현실은 좀 달랐다. 그들이 인지하는 세상은 다른 감각에 의해,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올리버 색스는 마스쿤 원주민들을 만나면서 이런 사실들을 깨닫게 된다. 그는 마스쿤 여인이 어두운 방에서 짠 전통 무늬 깔개를 보게 되는데, 이 깔개는 어둠 속에서 독특한 빛을 발한다. 정교한 무늬들이 서로 다른 밝기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깔개를 환한 밖으로 가지고 나오는 순간, 아름다운 무늬들은 사라져버린다. 그것은 연한 갈색과 자주색처럼 명도 차이만 있을 뿐, 색채 대조가 별로 없는 색깔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마스쿤에게만 부여된 특별한 능력은 저자의 글을 읽고 편지를 보내온 어느 색맹 독자의 경험에서도 알 수 있다.

“‘색맹’ 같은 어휘는 우리에게 없는 것만을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우리가 보고 느끼며 우리가 이루는 그런 세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지요. 저에게 해질녘은 마법 같은 시간입니다. 극명한 명암 대비가 없어 시야가 확장되고 시력도 갑자기 좋아집니다. 제 인생 최고의 경험은 해질녘이나 달빛 아래 이루어진 것이 많습니다. (……) 저에게 가장 행복한 추억은 거대한 미국삼나무 숲 속에 누워 별을 구경하던 그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들만의 특별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색맹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에서 중증 장애인으로 살아간다. 빛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실내에서만 지내는 사람들. 그들은 워낙 소수인 까닭에 어려서부터 줄곧 또래 아이들의 오해, 그리고 고립과 맞서 싸워야 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그들이 경험하는 세계를 이해하고 공유할 그 어떤 사람과도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러나 그가 섬에서 만났던 색맹 주민들은 달랐다. 핀지랩의 모든 사람이 마스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스쿤으로 태어난 이들이 색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밝은 빛을 견디지 못하며, 사물의 세세한 부분을 볼 수 없는 장애까지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다. 핀지랩의 아기가 빛을 보고 눈을 찌푸리기 시작할 때쯤이면 이미 그들은 그 아기가 바라보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 그 아기에게 필요한 환경과 그 아기의 특별한 능력이 무엇인지를 사회 전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것을 설명하는 신화도 있다. 올리버 색스는 그런 점에서 핀지랩을 명백한 ‘색맹의 섬’으로 규정한다. 다른 곳에서 색맹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어김없이 철저히 고립되거나 오해받으며 살아가지만, 이곳에서는 마스쿤으로 태어난 그 누구도 그런 일을 당하지 않는다.

섬의 고립성이라는 특수성이 부여한 잠시의 가능성, 짧은 시간 스치고 지나가는, 기이한 유전자 이상, 유전자의 소용돌이. 그러나 섬은 바깥세상으로 열리고 사람들은 죽거나 다른 종족과 결혼하여 유전적 특성은 희소해지고 그러면서 병도 사라진다. 그처럼 고립된 지역에 발생하는 유전병의 수명은 여섯에서 여덟 세대로, 대략 200년이면 그에 얽힌 기억과 흔적과 함께 그침 없는 시간의 흐름 속으로 사라진다.

이제 머지않아 세상에서 유일하게 존재했던 ‘색맹의 섬’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와 함께 섬 주민들이 공유했던 공통의 기억과 그들만의 신화도 사라질 것이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안타깝다. 소외된 자들의 정신적 쉼터 혹은 고립된 낙원이 사라진다는 느낌. 마치 흑백 영화의 소멸이 자연스런 기술 진화의 과정임을 알면서도 왠지 아쉽게 느껴지는 기분이랄까. 그들이 유지하고 있던 색맹 공동체의 따뜻한 정서와 공감대도 함께 지워진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하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 이런 고립된 섬이 존재한다는 믿음 자체가 이상하게도 삶의 위안이 되어 준다.

색맹의 섬
올리버 색스 저/이민아 역 | 이마고 | 2007년 11월

저명한 신경의이자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작가 올리버 색스가 쓴 미크로네시아 섬 여행기. 태어날 때부터 아무런 색깔도 볼 수 없는 유전적 완전색맹들만이 모여 사는 섬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올리버 색스는 이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색맹의 섬’을 찾아 핀지랩으로 한달음에 달려가 인간주의적인 관점으로 질병에 접근한다.

2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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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2.03.16

섬의 고립성이 낳은 색맹의 사람들 유전자의 복수인가봐요. 일반인들이 보는 세상과 다르게 보는 이들의 삶은 이들에게는 익숙한 세상이네요. 하지만 이들은 외부로 나오지 않으면 차별받지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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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pduddlrk

2008.04.06

저희 집에도 올리버색스의 책이 몇 권 있습니다. 모자를 아내로 착각한 남자가 있지요.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읽기는 하지만 정말 이런 증상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안타까워 집니다. 하지만 정말 이럴 수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에도 새로운 책이 나왔네요. 자신의 경험 속에서 나오는 사례들이라 더 자세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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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맹의 섬

<올리버 색스> 저/<이민아>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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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색스

1933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 대학 퀸스칼리지에서 의학 학위를 받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와 UCLA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했다. 1965년 뉴욕으로 옮겨 가 이듬해부터 베스에이브러햄 병원에서 신경과 전문의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 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의과대학과 뉴욕 대학을 거쳐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컬럼비아 대학에서 신경정신과 임상 교수로 일했다. 2012년 록펠러 대학이 탁월한 과학 저술가에게 수여하는 ‘루이스 토머스상’을 수상했고, 모교인 옥스퍼드 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5년 안암이 간으로 전이되면서 향년 82세로 타계했다. 올리버 색스는 신경과 전문의로 활동하면서 여러 환자들의 사연을 책으로 펴냈다. 인간의 뇌와 정신 활동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쉽고 재미있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들려주어 수많은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뉴욕타임스〉는 이처럼 문학적인 글쓰기로 대중과 소통하는 올리버 색스를 ‘의학계의 계관시인’이라고 불렀으며,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색스는 독자들을 다른 사람의 마음속으로 초대하여 근본적인 형태의 공감을 느끼게 해준다”고 썼다. 그는 왕립내과학회, 미국문화예술아카데미,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의 회원이었으며, 2008년 엘리자베스 2세는 그에게 대영제국 명예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지은 책으로 베스트셀러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비롯해 《색맹의 섬》 《뮤지코필리아》 《환각》 《마음의 눈》 《목소리를 보았네》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 웠다》 《깨어남》 《편두통》 등 10여 권이 있다. 생을 마감하기 전에 자신의 삶과 연구, 저술 등을 감동적으로 서술한 자서전 《온 더 무브》와 삶과 죽음을 담담한 어조로 통찰한 칼럼집 《고맙습니다》, 인간과 과학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담긴 과학에세이 《의식의 강》, 자신이 평생 사랑하고 추구했던 것들에 관한 우아하면서도 사려 깊은 에세이집 《모든 것은 그 자리에》를 남겨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