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책을 즐겨 읽어도 피할 수 없는 관문이 있다. 바로 자녀의 읽기다. 사실 부모세대는 체계적으로 배웠다기보다는 읽다 보니 수준 높은 독자로 성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녀도 비슷하게 성장할 거라는 막연히 기대한다. 취학 전에 그림책도 읽어주고 자주 서점에도 데려갔으니 이제 잘 읽기만 하면 된다. 한데 고학년이 되어도 여전히 쉽고 가벼운 책만 찾으면 슬슬 조바심이 난다. 팬데믹 이후 『이상한 가게 전천당』 시리즈를 필두로 『깜냥』, 『똥볶이 할멈』, 『소능력자들』 시리즈 등 부담없는 책들이 앞다퉈 출간되었다. 어린이는 이런 시리즈 동화를 재미있게 읽으며 알게 모르게 읽기 능력이 향상된다. 그렇지만 하염없이 이런 책만 읽어도 되는 걸까.
마음이 조급해도 먼저 읽는 몸을 만들어야 한다. 갑자기 300쪽이 넘는 책을 읽어내기 어렵고, 고전이라면 줄거리를 따라가기도 벅차다. 한 권의 책에 줄거리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다는 걸 맛보려면 단편으로 시작해본다. 익숙해지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된다. 어린이를 위한 단편은 대략 15쪽 내외의 분량이다. 부모가 읽어주기도 부담 없고, 어린이도 가벼운 마음으로 도전할 수 있다. 하지만 그저 줄거리를 따라갈 때와 달리 읽고 나면 마음이 묵직해진다. 똑 부러지게 결론을 내리지 않지만 그래서 더 여운이 남는다. 더 말하지 않는 그 지점부터 생각하는 힘이 자란다.
『건조주의보』
이금이 저 | 밤티
이금이 작가의 대표작은 『너도 하늘말나리야』, 『유진과 유진』,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등의 장편이다. 하지만 단편이 지닌 깊이도 만만치 않다. 2012년 출간된 이 책은 최근 제목을 바꾸고 다듬어 재출간되었다. 작가는 “발전한 사회적 감수성에 뒤처지는 부분을” 공들여 고치고 다듬었다. 수록작인 「건조주의보」, 「닮은꼴 모녀」, 「사료를 드립니다」 등은 생각지 못한 곳으로 독자를 데려가는 빼어난 단편이다. 이 중 「사료를 드립니다」는 반려견 이야기다. “인간과 동물의 공존”을 새로운 시각에서 살핀 앞선 작품이다.
장우는 가족과 해외로 가며 반려견 장군이를 임시로 다른 이에게 맡긴다. 대신 사료를 보내준다는 조건이었다. 할머니가 아파 급히 돌아온 장우는 장군이의 임시 보호자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 걱정되어 찾아간 장우는 뜻밖의 광경을 목격한다. 장우에게 반려견 장군이는 그저 보호의 대상이었다. 한데 그 집에서 장군이는 “부모 없는 아이들 곁을 지키는 듬직한 가족”이 되어 있었다. 형편이 좋지 않아 여위고 털은 거칠어졌지만, 장군이는 달라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썰매를 끌며 시베리아 벌판을 달리던 자기 조상들처럼 늠름해 보였다.” 모든 생명은 보호와 의존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립적이다. 애완愛玩과 반려伴侶의 차이를 장군이를 통해 보여준다. 장군이가 늠름해 보인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보면 좋다.
『꼴뚜기』
진형민 글, 조미자 그림 | 창비
진형민 작가의 데뷔작이다. 5학년 3반 어린이의 일상을 연작형태로 담았다. 초등 고학년 어린이가 겪게 마련인 친구, 공부, 연애 감정, 학원 같은 보편적 관심사를 경쾌하지만 동시에 무게 있게 다룬다. 표제작 「꼴뚜기」는 반 아이들이 한 명씩 돌아가면서 ‘꼴뚜기’라고 놀림당하는 상황을 코믹하게 그렸다.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는 데이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하는 고학년 남자 아이의 모습이 실감나게 그렸다. 「인생 최대의 위기」는 구주호와 길이찬이 축구를 하고 싶어 거짓말을 하며 벌어진 해프닝을 그린다. 구주호가 스파르타 학원에 다녀 축구를 못하게 되자 길이찬은 형편이 어려워 학원에 못 가는 장백희를 구주호 대신 보낸다. 축구를 하고도 시간이 남아돌자 구주호는 제발로 언덕 위 도서관에 간다. 작가는 길이찬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구주호같이 공부가 싫다는 애는 죽자 사자 붙들고 공부를 시키면서, 저렇게 공부가 하고 싶다는 장백희한테는 왜 아무도 공부하란 소리를 안 할까?” 작가는 억지로 학원을 전전하던 구주호가 심심해지자 스스로 책을 읽는 모습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한다. 혹시 비슷한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는지 돌아보며 읽으면 재미있다. 희곡집도 나와 있다.
『숲속 가든』
한윤섭 글/김동성 그림 | 푸른숲주니어
마치 옛이야기 같은 단편들이다. 신기한 이야기로 들어도 무방하지만,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궁리해봐도 좋다. 인간의 본질과 인간 옆의 생명에 대한 태도를 다른 작품들이다. 표제작 「숲속 가든」부터 예사롭지 않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우연히 길에서 무언가를 주운 경험을 들려준다. 이어 트럭에서 떨어진 갓 부화한 병아리 상자로 화제가 넘어간다. 할아버지는 병아리를 길에 두자니 마음에 걸려 친척 아저씨에게 돌봐 달라 부탁한다. 병아리가 자라 닭이 되자 친척 아저씨는 식당에서 토종닭 요리를 시작한다. 닭들은 이제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을 마주한다. 과연 병아리를 살린 게 잘 한 일일까. 인간이 닭의 삶과 죽음을 좌지우지해도 좋은지를 묻는다. 다른 단편 「비단잉어 준오 씨」 역시 사람보다 똑똑한 비단잉어 준오 씨가 어처구니없이 죽게 되는 이야기다. 주제의식이 연결된다. 반면 단편 「이야기의 동굴」은 주문받은 단어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의 신이, 「잠에서 깨면」은 치매로 어린 시절과 현재를 왔다 갔다 하는 할머니가 등장한다. 동물과 사람의 이야기를 두 편씩 짝 지은 구성이다. 인간이란 이야기를 만들며 혹은 기억으로 짠 이야기에 기대어 살아가는 생명이다. 그런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곁의 생명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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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화(어린이책·출판 평론가)
어린이책 평론가이자 출판평론가. 독서운동가, 사서, 현직 교사 사이에서 ‘책으로 아이와 소통하는 법을 가장 잘 아는 어린이책 전문가’로 손꼽힌다. 웅진출판과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등에서 일하며 25년 넘게 어린이책을 다루었고, 출판 잡지에 기사를 쓰고 인터뷰를 하며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