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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랑 칼럼] 식사의 역량 - 『던전밥』의 마지막 회를 곱씹으며

윤아랑의 써야지 뭐 어떡해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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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던전밥』에서 식사는 무엇보다 변화와 지속에 관련된 행위로서, (이중의 의미에서) 무언가가 다른 무언가가 되도록 만드는 행위가 된다.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을 통해 동시대 문화를 탐구했던 윤아랑 평론가가

대중문화, 시각예술 등 다양한 작품을 자유롭게 리뷰합니다.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얼마 전 쿠이 료코의 만화 『던전밥』의 잡지 연재분이 깔끔한 결말을 맞이했다. ‘라이오스 파티가 레드 드래곤에게 먹힌 동료 파린을 되살리기 위해 던전 속 마물들로 요리를 해 먹는다’ 정도로 (억지) 요약 가능할 1화의 구도가 장황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우회를 거쳐 충실히 ‘반복’되는 것으로, 약 9년간의 여정이 완수된 것이다. 오는 12월엔 두 권의 마지막 단행본이, 내년 초엔 넷플릭스 시리즈로 애니메이션이 나올 예정이긴 하나, 당장 우리에게 주어진 깔끔한 결말에 무언가를 더 덧대는 건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다소 돌연하게 퇴장한 캐릭터들의 후일담이나 보다 세세한 세계관 설정을 갈구할 독자들도 적지 않을 터이다) 개인적으로 (같은 해에 연재되기 시작해 ‘독특한 요리 만화’라는 정체성을 공유하기도 한) 노다 사토루의 『골든 카무이』가 완결된 이후 흥미를 갖고 따라가던 유일한 동시대 일본‘대중’ 만화인지라, 마지막 화를 읽으며 형언하기 어려운 시원섭섭함을 쭉 느꼈더랬다.

말이 나왔으니 내친김에 한 번 두 작품을 간단히 비교해 보면 어떨까? 양자 모두에 있어 식사가 중요한 행위임은 굳이 부연할 필요가 없겠으나, 이를 활용하는 데 있어선 서로가 적지 않은 차이를 갖고 있으니 말이다. 『골든 카무이』에서 식사란 (적어도 중반부까지는) 도처에 잠재된 폭력이 현시되도록 자극하는 무시무시한 행위다. 식사 장면과 살해 장면을 계속 밀접하게 붙여 놓음으로써, 이 행위들이 분리될 수 없을뿐더러 서로 되먹이고 보충하고 있음을 지시하는 것이다. 한편 『던전밥』에서 식사는 무엇보다 변화와 지속에 관련된 행위로서, (이중의 의미에서) 무언가가 다른 무언가가 되도록 만드는 행위가 된다.

설명을 위해 조금만 우회하자. 나는 지금 캐릭터들 간에 몸과 몸이 불편하고 괴상하게 맞닿는 순간들을 먼저 떠올리고 있다. 가령 마지막 회에서 라이오스가 막 의식을 되찾은 파린을 껴안으면서 굳이, 불편하게끔 침대맡에서 자고 있던 마르실을 사이에 끼워 넣는 장면 같은 것. 평범하게 생각해 보면 여기서 마르실을 깨우는 데엔 기쁨의 외침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하나 쿠이 료코는 굳이, (그리기에도) 불편하게끔 이런 자세를 연출하고 있다. 마치 그런 불편한 자세가 아니라면 파린의 부활을 진정 환영해 줄 수는 없다는 것처럼.

예수께서 “나를 만지지 마라”라고 선언하시기 한참 전부터, 몸과 몸 사이의 접촉은 참으로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손을 잡는 것에서 시작해 입으로 먹거나 애무를 하는 등의 접촉들은 접촉의 대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변화는 나와 대상 간의 관계에 대한 것일 수도 있으며(“우리 사귀는 거 아니었어? 뽀뽀했잖아…”) 대상의 성질 자체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앞서 거론한 마지막 회의 경우를 떠올려도 좋고, 85화에서 마르실이 미궁의 주인이 되길 포기하는 순간 일행들과 격하게 포옹하는 장면을 떠올려도 좋다. 하여튼 여기서 변화의 불편함은 (상황에 따라 달리) 캐릭터들의 몸에 직접적으로 육화되고 있는 것이다. 『던전밥』이 종종 불편하고 해괴한 자세를 그리기 위한 작품으로 보이곤 하는 건 아마 이 때문이리라.

한데 접촉의 다양한 경우를 골고루 보여주고 있긴 해도, 쿠이 료코가 좀 더 심혈을 기울이는 건 아무래도 대상의 성질 자체에 대한 변화 쪽인 듯하다. 가령 34화를 떠올려 보면, 여기서 마르실이 코카트리스에게 물려 돌로 변한다는 것만큼이나 주목해야 할 것은 라이오스가 마르실의 얼굴을 어루만질 때야 마르실이 사람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의미심장하게도, 이 에피소드에서 센시와 라이오스가 돌이 된 마르실을 들어서 옮기는 또 다른 접촉은 지나가듯 작은 칸으로 제시된다) 이 만화에서 접촉은 종종 주어진 서사를 넘어서 변화를 끌어내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도 높은 접촉은 다름 아닌 식사로, (작품 안에서 ‘미궁의 규칙’으로 여러 차례 설명되듯) 이는 소화의 과정을 통해 어떤 물질의 성질을 직접적으로 바꾸어 해체할 수 있다. 그래서 파린을 되살리기 위한 최종방안이 결국 식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식사로 인해 바뀌는 건 먹히는 물질만이 아니다. 부활하려는 파린에게 (아마도 악마의) 목소리는 지금 먹고 있는 게 “너를 형성하는 거다”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그 말을 좀 더 주의 깊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다음에 깨어난 파린의 다리에는 드래곤과 융합했을 적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먹은 것이 피와 살이 된다는 보편적인 인식을, 쿠이 료코는 그 음식이 너의 몸으로 흡수된다기보다는 너의 몸으로 바뀐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 강도(intensity)를 작동시키는 행위로서, 식사는 대상과 나 모두를 변화시키곤 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지점이 하나 더 있다. 가능한 한 대상을 덜 꺼림칙하고 더 맛있게 먹으려면 요리라는 변화의 과정이 필요하듯, 식사가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하기도 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달리 말해 무언가를 먹으려면 우리는 그에 걸맞게 바뀔 것을 각오하고 또 감수해야 한다. ‘혐오스러운’ 마물을 식사로써 먹기 위한 태도의 변화, 불사조를 먹기 위해 황금향 주민들의 영혼 없는 몸을 자기에게 두르는 (“불편하고 해괴한”) 자세의 변화, 그리고 악마의 욕망을 먹고 소화하기 위해 악마의 살점을 뜯어먹어 ‘내가 생각한 최강의 마물’이 되는 존재의 변화. (이즈츠미가 마물을 먹으면 마물이 된다고 불평하던 게 이쯤에서 문득 떠오른다) 앞서 “(이중의 의미에서) 무언가가 다른 무언가가 되도록 만드는 행위가 된다”고 말한 건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요컨대 『던전밥』에서 ‘변하기 위해 먹는다’와 ‘먹기 위해 변한다’는 동등한 무게감의 문제들이며, 나아가 '변하기 위해선 먹어야 하며 먹기 위해선 변해야 한다'는 소용돌이식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리오 버사니가 ‘단독적이고 완전한’ 자아의 성립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잉여로서 섹스를 논했다면, 쿠이 료코는 식사를 그런 잉여로 생각한 게 아닐까? 순전히 생물학적이지도 순전히 사회적이지도 않은 차원에서. 그리고 그 소용돌이식 논리의 반복이 지탱하는 건 다름 아닌 생(生)일 것이다. 시실의 ‘무한 피딩 나무’가 보여주듯 생은 단지 먹기만 하는 것으론 불가능하다. 유한하며 변덕스러운 우리에겐 매번 새로운 접속과 절단이, 적력과 휴식이, 몰입과 거리 두기가 함께 필요하다. 이들이 소용돌이처럼 이어지며 서로를 가능케 할 때야 생은 비로소 발생할 테다.

라이오스는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식사는 삶의 특권이야. 살기 위해서는 계속 먹어야 하지.” 즉 운명이자 권리로서의 식사? 말 자체만 놓고 보면 아리송하긴 하다. 하지만 이 역설을 달리 풀어 쓸 수는 있을 것 같다. 식사는 생의 지속에 있어 불가결한 필수적인 행위이자 그 생에 즐거움과 변화를 줄 수 있는 전환적인 행위라고 말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같은 쾌쾌한 격언을 굳이 불러오려는 건 아니다. 『던전밥』에서의 식사는 운명의 무게를 잊게 하는 즐거움이 아닌, 운명의 무게 자체를 바꿔버리는 즐거움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라이오스 혹은 쿠이 료코는 그런 식사의 역량을 단호하게 긍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역량 덕분에, 생에 있어 변화와 지속은 늘 함께 간다. 



던전밥 1
던전밥 1
쿠이 료코 글그림 | 김완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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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아랑(평론가)

비평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을 주로 다루며, 주체성과 현실 감각을 문제 삼는 문화비평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2022),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2023), 『악인의 서사』(공저, 202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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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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