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대중문화 > 윤아랑의 써야지 뭐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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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세대’란 말이 누군가의 입이나 손에서 나오는 순간 그 누군가를 곱게 생각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인셀’이란 말이 울려 퍼지는 순간 한숨을 푹 내쉬지 않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아마 요즈음에 가장 골치 아픈 낱말 중 하나일 ‘인셀’은 (물론 이 칼럼을 의도적으로 찾아본 독자라면 이미 뜻을 알고 있겠지만) 비자발적 순결주의자(Involuntary Celibate)의 약자로, 단순히 말해 '여성과 섹스를 하고 싶으나 그러지 못해 부정적인 정서를 갖게 된 남성'을 이른다. 단순한 뜻풀이만 읽자면 별다를 게 없이 ‘평범하게 소외된’ 이들에 불과한 것 같지만, 요즈음에 인셀로 정체화된 이들은 그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것이 골치 아픈 낱말이 된 건 다름 아니라 이들이 광범위한 정치적 주체로서 힘을 갖고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게는 일상적인 불평을, 크게는 온라인 테러를 일삼는 극단주의 성향의 인셀들이 저항하는 대상은 당황스럽게도 “여성친화적 현대사회”다. 여성에게 유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기능하며 자신을 주변부로 몰아넣는 사회를 자신이 겪는 소외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이다. (비판과 반박의 여지가 있는 것과는 별개로) 이는 엄연한 세계관으로서, 혹은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려 ‘논리’로서 작동하며 오늘날 특정 국가나 기존의 문화권에 국한되지 않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21세기에 나타난 정치적 주체의 상(像) 중 가장 대중적이고 강력한 것이 인셀임에는 아마 이론의 여지가 없으리라.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든다. 인셀이 별안간 세상에 나타난 족속은 아닐 것이다. 가령 아즈마 히로키는 『관광객의 철학』에서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인셀의 원형으로 지목한 바 있고, 『호밀밭의 파수꾼』이 미국 인셀들의 정전(Canon)이라서 이 책을 읽기 꺼려진다는 영미권 독자들도 있다. 그런 성질이나 심리가 있는 이들은 분명 이전에도 있었을 테고 이 이후에도 있을 테다. 그렇다면 인셀이란 이름이 생겨나기 전의 인셀들은 어떻게 자기 삶을 살았을까? 얼마 전 재출간된 에마뉘엘 보브의 소설 『나의 친구들』은 그런 삶을 잠시 엿볼 기회를 우리에게 준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참전용사였던 주인공 빅토르 바통은 제대 이후 상이군인 연금으로만 근근이 연명하고 있다. 제목이 역설적이게도, 소설은 단 한 명의 친구도 없어 친구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그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실패한다. 바통은 위축됐다고 할 만큼 극도로 소심하고 남의 눈치를 살펴서, 누군가 자신을 오해하거나 무시해도 (속으로는 엄청나게 많은 생각을 하지만) 그에 대한 반박은커녕 미약한 반응조차 하지 못하는 답답한 사람이다. 가령 센 강을 보던 도중 누군가 “당신, 자살하려는 거죠?”라고 묻자 그의 관심을 끌겠다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죽고 싶습니다.”라며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그 누군가가 사실 정말 자살하려던 사람이라서 그가 함께 죽자고 하는데도 그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차마 거절하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소설이 그의 시점에서 일인칭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독자는 그가 떠올리는 허무맹랑하고 찌질하며 과민한 생각들을 빠짐없이 읽을 수밖에 없다. 가령 다음 구절은 어떤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 열쇠 구멍으로 방 안을 들여다봤다. 긴 창문과 커튼이 보였다. 니나는 나를 기다리지 않았다.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다. 갑자기 오싹한 공포감이 밀려들었다. 만약 그녀가 방 안에 죽어 있다면, 내가 범인으로 오해받을 게 뻔하다. 황급히 계단을 내려왔다. 어느 층에서건 마지막 두 계단은 단숨에 뛰어내렸다.”(88~89쪽)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주인공을 당신은 얼마나 본 적이 있나? 그는 소설 내내 (마치 진실한 사랑을 부르짖는 최근의 젊은 남성들처럼) 진실한 친구를 찾고 싶다고 되뇐다. 하나 친구를 구하지 못하는 결정적 문제는 바로 그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닌가? 물론 에마뉘엘 보브는 바통을 순진한 피해자로도 무자비한 가해자로도 그리지 않는다. 하지만 친구나 애인이 생길 수 있는 기회를 바통 스스로 뿌리치기도 했던 걸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다음의 구절처럼, 나는 친구를 구하고 싶지만 바로 나 때문에 친구를 구하지 못한다는 (우스꽝스럽고 절망적인) 운명이 그를 휘감고 있는 것이다.
“가끔 하는 생각인데, 어쩌면 나는 머리가 좀 이상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늘 행복을 손에 넣으려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엉뚱한 생각이 떠올라 모든 걸 망쳐버리고 만다.”(163쪽)
책 뒤표지에 실린 홍보문구에는 “대도시에 고립된 현대인의 그늘”이라고 쓰여 있으나, 대도시만의 특성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다는 걸 염두에 두면 『나의 친구들』은 그보다 타인과 관계를 지속할 수 없는 남자의 얼굴에 더 가깝다. 그리고 이는 거의 대부분 요즈음의 많은 인셀들과도 겹칠 수 있는 얘기일 것이다. 인셀적인 성질과 심리는 오늘날에 갑자기 출몰한 게 아니라 역시 먼 옛날에도 나타나고 있었다. 아직은 시민들이 폭넓게 기록을 남기고 유통하기 어려웠던 20세기 초반에 이런 소설이 쓰인 덕분에, 우리는 그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바로 덧붙이건대, 나는 탈역사적인 사이비 통찰을 통찰이랍시고 제시할 생각이 전혀 없다. 다만 여기서 더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어째서 이때의 인셀들은 요즈음의 인셀들처럼 정치적 주체로 나타나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다.
처음에 얘기한 극단주의 성향을 바통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소외감은 여성혐오나 자기혐오나 폭력성으로 나아가는 대신 친구에 대한 끝없는 갈망으로 나아간다. 특히 결말에서 가난한 상황에 처했어도 그가 스스로를 혐오하는 대신 그런 자신의 삶에 자부심을 가지려 한다는 게 몹시 신경 쓰인다. 요즈음의 인셀들은 대부분 자신의 가난한 삶을 자조하고 남들과 나누는 방식으로 삶을 버티기 때문이다. 자기만족과 자조 사이의 간극. 이런 주체화의 차이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문학적 자의식? 인터넷의 유무? 경쟁주의? 백래쉬? 약화된 남성성? 사실 나는 이에 대해 아직 정리된 생각을 갖고 있지 못하다. 다만 저 각자의 키워드들만으론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바가 있다고 계속 의심할 뿐이다. 다른 맵핑의 필요성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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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을 주로 다루며, 주체성과 현실 감각을 문제 삼는 문화비평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2022),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2023), 『악인의 서사』(공저, 202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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