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숙 작가의 책장
이연숙 작가가 요즘 애정하는 『메달리스트』, 『해변에서』, 『치치새가 사는 숲』, , <스쿠비 두와 대처 정권>.
글 : 이연숙(리타)
2025.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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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달리스트』

 츠루마 이카다 | 학산문화사


인기가 많다는 건 알았다. 상도 많이 탔고 곧 애니화가 될 거라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도 안 봤다. 그야 뻔한 열혈 스포츠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표지도 마음에 안 들었다. 무슨 성인 남자랑 어린 여자애랑… 뭐야? 근데 막상 보기 시작하니 뻔한 열혈 스포츠물인 건 맞았지만 그 이상의 감동이 있었다. 보면서 자주 울었다. 예를 들면 이런 대사. “어른들은 아이들의 마음을 멋대로 상상해. 조금만 실력이 늘어도 우리가 만족할 거라 착각하지. 말로 전하지 않으면 몰라.” 자기 안의 어린 아이를, 그 어린 아이의 기쁨과 슬픔을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만이 이런 작품을 그릴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해변에서』

네빌 슈트 저 / 정탄 역 | 황금가지


1957년 발표된 소설로 핵전쟁 이후 불어닥친 핵바람(...) 때문에 인류 전체가 시간 차를 두고 어쨌든 다 죽는다는 설정이다. 우리 주인공들은 차분하고 우아하게 정해진 최후의 날을 기다리며 나무도 심고 아기도 키우고 동네 사람들하고 잘 지내고 연애도 한다. 오늘날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에서 당연하게 등장하는 서로 죽고 죽이는 인간의 ‘본성’ 같은 건 전혀 튀어나오지 않는다. 담담하게 시작해서 담담하게 끝난다. 세상의 종말이 이럴 수도 있겠구나… 그런데, “세상의 종말은 아니지. 우리의 종말이지. 세상은 언제나처럼 계속 존재할 테니까. 다만 그 속에 우리가 없을 뿐이지. 우리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갈 거야.” 이거 완전… ‘인류세’ 이야기 아님? 대박. 우연히 발견해 그 자리에서 완독했는데 그 여파가 아주 길었다. 




『치치새가 사는 숲』

장진영 | 민음사


처음에는 이렇게 재밌고 이렇게 대단한 걸 내가 왜 이제서야 읽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이제라도 읽게 되어 다행이다. 소설은 성인 여자가 20년 전 어린 여자애였던 자기가 겪었던 일을 회상(또는 고발)하는 내용이니까 광의의 의미에서 여성 소설, 페미니즘 소설이라 쉽게 분류될 수 있을 것 같다. 근데 여기에 더해 나는 이 소설을 하드보일드 펑크라고 불러야 마땅하다고 본다. “기절은 삶을 공짜로 사는 방법이다.” 열네 살의 ‘치치림’은 어른들의 폭력으로 초토화된 삶을 살면서 어떻게 이런 간지를 유지할 수 있는 걸까. 간지는 폭력에 대한 방어구인걸까, 아니면 폭력을 뚫고 나올 만큼 ‘치치림’의 간지가 “굉장”한 걸까. 이 여자애가 오래 기억날 것 같다. 



<Here Come the Warm Jets>

 브라이언 이노, 1974


이 앨범의 모든 곡이 정말 다 훌륭하다. 그중에서 내가 제일 자주 듣는 건 세 번째 트랙인 “Baby’s on Fire”다. “아기가 불타고 있어요, 물에 던지는 게 나아요.” 앨범 전체가 거의 숭고한 레벨로 직조된 익살맞은 방귀 소리처럼 느껴진다. 대체 이런 걸 어떻게 만든 걸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스탠드업 코미디 <스쿠비 두와 대처 정권>

스튜어트 리


스튜어트 리는 아마 한국에서 그리 잘 알려진 스탠드업 코미디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를 정말 좋아한다. 일단 그는 정말 웃기다. 말도 안 되는 비유 구사도 웃기고 조니 로튼처럼 카메라에 대고 윽박지르는 연기도 웃기다. 그런 그의 비트 중에서 내가 제일 자주 보는 건 “스쿠비 두와 대처 정권”이다. 일단 자막이 달려 있기도 하고 “매일 스쿠비 두를 봅니다. 하는 일이 그거예요…. 그래서 아는 게 잘 없어요. 경험이나 지식이나 그런 것들이요”라는 첫 대목부터 늘 처음처럼 폭소가 터지기 때문이다. 이 이상 설명은 하고 싶지 않다. 유머를 설명한 뒤에도 유머가 살아남을 수 있는지, 굳이 내 손으로 직접 시험해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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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ing513

2025.04.19

연숙 님 추천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을 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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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달리스트 1

<츠루마이카다> 글,그림

출판사 | 학산문화사

해변에서

<네빌 슈트> 저/<정탄> 역

출판사 | 황금가지

치치새가 사는 숲

<장진영>

출판사 | 민음사

Brian Eno - Here Come The Warm Jets

Brian Eno

출판사 | Univers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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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숙(리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쓴다. 2015 크리틱엠 만화평론 우수상, 2021 SeMA-하나 평론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진격하는 저급들』, 『여기서는 여기서만 가능한』, 『아빠 소설』이 있다. 공저로 『당신은 피해자입니까, 가해자입니까』, 『크래시 – 기술·속도·미술시장을 읽는 열 시간』, 『미친, 사랑의 노래』, 『퀴어 미술 대담』이 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hotleve를 운영한다.